
메시아, 2013
이상적인 산수경 ‘소상팔경’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소상팔경은 관념 속에 있는 이상적인 산수경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소상팔경을 상상 속에서 그렸습니다. 문인들은 그림을 보며 시를 남겼습니다.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이니 하는 ‘팔경’의 유래도 소상팔경에서 온것입니다.
소상팔경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최대공약수’가 됐습니다.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그림의 소재를 나열해 볼까요. 산·물·구름·안개·비·눈·달·기러기·산사·초가집·어부·고깃배·낚시…. 이는 다른 산수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소상팔경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 속에는 가장 이상적인 풍경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산허리를 감고, 계곡마다 드리워진 운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사진에 몰입하게 됩니다. 아마 산수화가나 풍경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는 ‘밈(meme)’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일종의 ‘문화적인 유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술, 철학, 종교, 사회적 관습 등도 모방과 흉내를 통해 복제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 조상이 즐겨 그리고, 감상하던 산수화의 소재가 정서적인 DNA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 중서부의 캐년 여행을 했습니다. 레드캐니언, 캐니언랜드, 모뉴멘트 밸리, 아치스 국립공원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입니다. 수억년 동안 만들어진 협곡과 바위가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광을 연출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선뜻 카메라에 손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감탄은 하지만 감동이 없다고나 할까요. 습관적인 관광사진만 찍다가 돌아왔습니다. 낮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지형 때문인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은 ‘메시아(사진1)’ 정도입니다. 이곳은 서구의 침략으로 땅을 뺏기고, 죽임을 당한 인디언의 후손들이 자치국가를 세우고 사는 곳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가장 자리에 삐져나온 인체 조각같은 형상에서 ‘메시아’의 이미지를 봤습니다. 돌탑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디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 협곡 여행 중 처음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 역사가 오버랩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신념 묻어나야

회룡포의 아침, 2016
진정한 풍경사진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산수화는 ‘경치 밖의 뜻(景外意)’을 중시합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과 신념 등 정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DNA를 건드려 줘야 합니다. 좋은 풍경사진은 경(景)을 넘어 정(情)이 느껴집니다. 경과 정이 어우러진 ‘환(幻)’의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산수를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코노미스트>
사진 주기중기자 click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