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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표돌 순례기

peppuppy(깡쌤) 2018. 5. 18. 08:29
손석희앵커브리핑 <역사는 짓궂다. 또 모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 인연 > 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그는 열일곱 시절 도쿄에서 만난 아사코를, 평생 기억했습니다. 앳된 소학교 1학년생과의 첫 만남과 10년 뒤 세련된 대학생으로 성장한 그와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또다시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여인과의 세 번째 만남. 실로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합니다.

불가에서는 현생에서 옷깃 한번 스치는 이들조차 전생에 수많은 겁의 인연이 있었다고 설명하지요. 아시는 것처럼 겁이란 우주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시간. 물방울이 떨어져 집채만 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을 나누고 있는 우리 역시 굽이굽이 긴 시간을 넘겨서 이어진 인연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몇 겁의 인연을 갖고 있었을까. 각자의 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5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 노무현, 그리고 이명박.

 

"결과는 참담했다. 2등도 아니고 3등으로 떨어졌다"

- 노무현 자서전 < 운명이다 >
"예상 밖의 대승이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었다"
- 이명박 회고록 < 대통령의 시간 >

한 사람은 17.66% 득표라는 개인 선거사에서 최악의 성적을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한 끝에 당선됐지만 선거부정이 드러나 결국 의원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그 자리를 가져간 사람은 바로 패자였던 노무현.

"이긴 사람이 물러나자 졌던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찼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됐고, 물러났던 사람은 다시 돌아와서 대통령이 됐다…살아남은 사람은 지금 구치소에 있다…엇갈린 운명이다."

지키고 싶었던 원칙과 명분이 자꾸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했던 노무현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했던 이른바 컴도저 이명박. 이렇듯 부대끼고, 뒤섞였던 그들의 인연 혹은 악연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길게 이어져…

총 16가지 혐의… 무려 110억 원 이상 뇌물수수 의혹을 받는 피고인이 처음 법정에 선 오늘은 9년 전 전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입니다. 1996년, 종로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길고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작가 피천득은 회를 거듭할수록 안타깝기만 했던 여인과의 인연에 대해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억겁의 인연이 거듭되어야 이어진다는 현세의 인연.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악연이었으니. 22년 전 그들 역시 차라리 '아니' 만났더라면…
1996년 종로의 그 순간을 자세히 취재했던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압구정 터

조선 초 3대조 권세 누린 한명회가 놀던 정자에서 이름 유래
후대에 부관참시, 철저하게 부정당해 마지막 주인은 개화파 박영효



강남구 압구정동 구현대 1차아파트 근처 압구정 옛터. 정자 터 아래 ‘압구정지’라고 새긴 큰 바윗돌이 이곳이 압구정 터임을 알려준다. 현대아파트 72동73동 사이에 푯돌있슴

서울은 푯돌의 도시이다. 우리가 흔히 표석, 또는 표지석이라고 일컫는 푯돌은 서울처럼 오래 묵은 도시의 파란만장한 속살을 보여주는 장소인문학의 보물창고이다. 특정 시공간에서 활동한 인물이나 사건의 전말을 묵묵히 말해주는 역사의 파편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300여개의 푯돌이 서 있다.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나 사건이 몰렸기 때문이다. 푯돌은 역사의 층위가 얽히고설킨 곳에 세워진다. 지금은 비록 길 가장자리, 건물 한쪽에 볼품없이 서 있을지라도 반드시 사연이 있다. 서울의 시공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명멸하고 진화해왔는지 온몸으로 증언해준다. 서울을 휩쓴 경천동지할 변화의 지문이 내밀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곤 하는 푯돌을 통해 사람·사건의 내막과 장소의 내력을 알아보려 한다. 살아남은 것들도 아름답지만, 푯돌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서울택리지> <서울특별시 vs 서울보통시>의 저자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이 연재를 맡아 격주 금요일 아침마다 흥미로운 푯돌의 세상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는 압구정이 없다. 강남 시대를 열었고, 뚜렷한 문화코드를 생성했으며, 서울 제일의 부촌으로 군림하는 압구정동에는 동 이름을 증명할 물증이 없다. 실체가 없는 것이 압구정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내력은 이렇다. 압구정(狎鷗亭)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등극시킨 뒤 세조-예종-성종 3대에 걸쳐 최고의 권세를 누린 한명회(1415~87)가 지은 정자 이름이다. 2대에 걸쳐 딸 둘을 왕후에 올린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신 한명회의 호이기도 하다.

압구정 터 표지석.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구글 누리집 갈무리

중국 송나라의 명재상 한충헌이 ‘세상사 모두 잊고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은 호를 글자 한 자 고치지 않고 대물림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갈매기와 벗 삼는 척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갈매기와 친하다는 ‘압구’(狎鷗)를, 갈매기를 누른다는 ‘압구’(押鷗)라고 바꿔 말했다. 압구정에 갈매기가 얼씬도 하지 않은 탓이다.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다.

칠삭둥이 한명회에 대한 후세 평가는 가혹했다. 74세로 죽자 왕조실록에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때에 떨쳤다”라는 졸기를 남겼다. 결국 연산군 때 부관참시당했다.

압구정은 권력무상의 대명사다.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은 한명회가 정자에 써 붙인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시를 한 글자씩 고쳐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라고 놀려먹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거친 숲 엉킨 풀이 높은 언덕 덮었으니/ 그 옛날 성대한 놀이 베풀어지던 일 생각나네/ 인간사 100년이 그 얼마나 되던가/ 안개 낀 강을 바라보며 머리만 긁적긁적”이라고 읊었다.

학봉 김성일은 죽은 한명회를 대놓고 손가락질했다. 다산 정약용도 “압구정 피리 연주 즐거웠겠지/ 그때는 금가락지 미녀를 끌어안았으리/ 지금은 적막한 집 누가 살려 하겠나/ 수양버들 예전 같고 저녁 매미 많이 우네”라고 비웃었다. 압구정이라는 정자와 호는 가식과 허세에 불과했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

압구정은 어떻게 생겼을까.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 두 점과 작자 미상의 일본 대화문화관 소장 ‘계회도’가 모습을 전한다. 겸재는 잠실 쪽에서 압구정을 바라보는 장면과 한강 남단에서 압구정을 보는 두 장의 그림을 따로 그렸다.

계회도 속 압구정은 웅장하고, 겸재 그림 속 정자는 한강을 바라보는 높은 언덕에 자리잡았다. 제법 가파른 낭떠러지 위 정자에 담장을 둘렀고, 마루에 난간을 쳤다. 팔작지붕에 부속 건물까지 딸렸다. 10여 칸이 넘는 두 채의 한옥으로 보아 예사로운 정자가 아니라 화려한 별장이었다. 왕이 하사한 시와 당대 문장가들의 시문 수백 편이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경관과 호화로움을 자랑하던 압구정의 마지막 주인은 철종의 유일한 부마이자 한때 개화파였던 박영효였다.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헐렸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22년(1885년) 12월23일자에 “…압구정에 모여 사냥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몰래 우정국에 가서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러…”라는 기록으로 보아 개화파의 소굴로 낙인찍힌 탓이리라.

압구정은 어디로 갔나? 조선의 시인묵객처럼 정자를 찾아나섰지만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압구정역 1번 출구에서 동호대교를 따라 올림픽대로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수십 동의 거대한 아파트 숲이 앞을 막아섰다. 압구정 옛터는 24개 아파트단지 1만여 세대가 사는 압구정아파트지구 한가운데 파묻혀 있다.

압구정 정자가 있던 언덕에서 내려다본 1961년도 한강변. 앞에 나룻배가 보이고, 오른쪽에 마을굿을 열던 도당터가 남아 있다. 멀리 보이는 곳이 뚝섬이다.

본래 강 건너 옥수동 쪽 저자도와 독서당, 삼각산을 바라보며 제왕의 풍수와 경관을 뽐내던 곳이었다. 1969년 멀쩡한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파내 강남 쪽 강변을 메운 한강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끝난 1972년 저자도는 종적을 감췄다. 압구정 정자 터를 중심으로 마련된 4만8000평의 택지 위에 23개 동 1500가구의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압구정 옛터는 구현대 1차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 비탈진 응달에 달랑 푯돌 하나로 남았다. 서울시에서 세운 공식 푯돌 이외에 안내판을 따로 세웠다. 네모난 공터에는 벤치 8개가 놓였고, 정자 터 아래 ‘압구정지’(狎鷗亭址)라고 새긴 큰 바윗돌이 덩그렇게 서 있다. 인적은 드물었고, 주민들의 반려견 산책 코스인 듯했다.

지대가 높은 74동과 아래쪽 72동 사이에 20개가 넘는 계단이 여러 층으로 나눠 놓여 있었다. 72동 아래로는 신사시장과 20동, 21동, 22동이 나란히 줄을 섰다. 계단 오른쪽으로는 압구정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정자 옛터와 한강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수십 채의 아파트가 빼곡하고, 올림픽대로가 한강을 가로막고 있다. 압구정 옛터에서 한강까지는 배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종로구 화동 김옥균 집터

그의 집터인 정독도서관 자리는 붉은 기운이 지배해 ‘홍현’이라 해

공교롭게도 성삼문과 생거지 공유 1880년대 개화파 인물 집중 주거

10년간 떠돌다 암살된 뒤 능지처참돼 도쿄 아오야마공원 묘지에 비석

박영효 “사람 잘 사귀지만 덕 부족” 막부 말 사카모토는 사후 존경받지만

그는 외세 의존 한계로 동상도 없어

김옥균의 집터인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앞 담장이 허물어지고 붉은 언덕을 알리는 홍현 푯돌이 세워졌다.

구한말 ‘삼일천하’의 풍운아 김옥균(1851 ~1894)의 집터가 있는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자리는 붉은 기운이 지배한다.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뒤편 화단에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는 듯 없는 듯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이 일대의 흙이 유달리 붉다 하여 “붉은재”라 이르고 ‘홍현’(紅峴)이라 적었다.

붉은재와 꽃동네 ‘화동’은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장소인문학적 관점으로 따져보면 붉은 언덕에 화염을 일으키는 화기도감(총과 포를 만드는 관청) 터가 들어선 데 이어, 사시사철 꽃과 과일을 궁중에 공급하는 장원서가 세워진 점도 공교롭지 않다. 더욱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두 사나이,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1418~1456)과 고균 김옥균이 400년 세월을 두고 생거지(살던 곳)를 공유한 사실에 이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화동(花洞)이라는 동명은 두 갈래 기원설이 있다. 하나는 화기도감이 있어서 ‘화기동’(火器洞)이라고 하다가 ‘화개동’(花開洞)으로 음이 변한 끝에 결국 화동이 됐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꽃을 다루는 장원서가 있어서 ‘꽃이 피는 동네’(花開洞)를 거쳐 ‘꽃동네’(花洞)로 변했다는 것이다. 화동은 동쪽으로는 가회동, 남서쪽으로는 소격동, 남쪽으로는 안국동, 북쪽으로 삼청동, 북서쪽으로 팔판동과 붙어 있는 유서 깊은 동네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혈기가 요동치는 땅에 피어난 꽃과 음악, 음식은 어울리는 법이다. 화동 34번지에 왕이 먹던 약수 ‘복정’ 터가 남아 있고, 정독도서관 서북쪽 화동 23번지에 장악서(궁중의 음악을 담당한 관청) 터도 있다. 화동 23~24번지 일대 옛 장원서 앞 다리는 삼청동과 팔판동의 길목이었고, 경복궁에서 이 다리를 건너 홍현을 오르면 가회동, 재동에 닿았다.

성삼문 집터는 화동 1번지, 지금의 정독도서관 서북쪽에 있었다.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 ‘장원서는 성삼문의 옛집이다. 선생이 심은 소나무가 말라죽어 밑동만 남았는데 이를 잘라 거문고를 만들었다고 한다’는 옛 기록이 각각 전한다. 성삼문 집터에 장원서가 들어선 것은 세조 12년 1466년의 일이니, 장원서 터와 성삼문 집터 푯돌은 한자리에 나란히 세워지는 게 순리이지만, 무슨 영문인지 장원서 터 푯돌은 화동 25-1 뒷골목에 외떨어져 있다.



화동의 절반을 차지하는 정독도서관은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였다. 1900년, 최초의 중등학교인 관립 한성중학교, 1921년 관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거쳐 1951년 경기 중·고교로 개편됐다. 역적으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을 학교 터로 활용한 것이다. 이후 정독도서관 본관 터에 있던 을사오적의 매국노 박재순의 집도 편입됐다.

김옥균이 활동하던 1880년대 개화파의 인물 지도를 그려보면, 북촌에서 개화사상이 움트고, 근대 교육과 의학의 싹이 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박물관이 들어선 김옥균의 화동 집을 중심으로 지척인 운동장 자리에 서재필이 살았다. 단짝 서광범의 집은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쯤에 있었다.

개화사상은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발화됐다. 헌법재판소 안 600년 묵은 백송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집 뒤뜰에 있었다.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 홍영식의 집은 박규수 집과 담을 대고 있었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은 난리 통에 비명횡사한 홍영식의 집을 제공한 것이다.

박규수는 역관 오경석, 한의사 유홍기, 승려 이동인과 함께 양반가의 자제들을 이끌었다. 김옥균을 리더로 해서 서광범·윤치호·서재필·유길준이 핵심 멤버였다. 여기에 철종의 부마 박영효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 관료 김홍집, 김윤식 등이 가담했다. 실질적 지도자는 대치 유홍기였다.

개화파에서 친일 거두로 변신한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 1931년에 한 인터뷰에서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재동에 모였지요… <연암집>(연암 박지원의 문집)의 양반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또 “김옥균의 장처(장점)는 교유요. 그는 교유가 참으로 능하오. 글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시문서화를 잘하오. 그러나 단점이라면 덕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는 것이오”라고 평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정독도서관 안 서울교육박물관 앞에서 가회동 넘어가는 길가에 붉은 흙으로 다져진 돌계단이 2016년 조성됐다. 그 아래 ‘紅峴’(홍현)이라는 푯돌도 세워졌다. 길손이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단절됐던 공공 공간 속에 묻혀 있던 붉은 흙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케케묵은 과거지향적 교육박물관과 달리 정독도서관 일대는 마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몇 백 년 묵은 회화나무와 아름드리 측백나무, 귀하신 몸 백송 두 그루와 중앙 분수대를 둘러싼 장대한 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도서관 1동과 2동 사이 화단에 고려 때 우물과 굽은 소나무가 서 있는데 매국노 박재순의 집터였다.

터를 감도는 붉은 기상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가보다. 정독도서관 중앙에는 1992년 문화부가 세운 조각가 김영중 작품 ‘겸재인왕재색도비’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서울 시내에서 백악과 인왕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명소가 바로 여기일 듯하다.

망명객으로 10년을 떠돌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사후 능지처참을 당했다. 여섯 토막 난 시신은 팔도의 저잣거리에서 전시된 뒤 버려졌다. 머리는 한강 변 양화진에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글을 달고 매달렸다. 그를 흠모하던 일본인이 의발(옷과 머리털)을 구해 도쿄 분쿄구 신쇼지 사찰 경내에 모셨다. 1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찰 주지에게 특별 부탁한 것이다. 또 도쿄 아오야마공원 외국인 묘지에 비석이 있다. ‘金公玉均之碑’(김공옥균지비)라고 새겨진 키 3m, 폭 1m의 비교적 큰 석비 역시 일본의 당대 유력 정치인들이 주선한 것이다. <서유견문록>을 쓴 유길준이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라고 묘비명을 썼다.

능지처참된 뒤 한강나루터에 내걸린 김옥균의 머리.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고균 김옥균의 이름 앞에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패장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홍영식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지만 ‘근대 우정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서울 한복판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앞에 동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재필도 독립문과 <독립신문>의 정신을 대표하는 선각자로 서대문 독립공원에 동상을 남기고 있다. 김옥균은 멍에를 벗지 못했다. 사후 2년 뒤 1896년 갑오개혁 때 그는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복권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는 12년 전 그가 ‘내건 혁신정강 14조’ 중 제7조에서 제일 먼저 없애자고 한 규장각의 우두머리 자리였다.

김옥균의 화동 집터에 서서 일본 막부 시대에 종언을 고한 사카모토 료마(1835~1867)를 생각한다. 일본 1천 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1위에 뽑혔을 만큼 일본인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동시대인 김옥균의 인간적 매력과 능력은 료마를 능가했지만 사후 평가는 천양지차다. 김옥균은 죽어서도 패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에 의지한 위로부터의 일방적이고 급진적 혁명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곁에는 그의 동상 하나 남지 않았다.

 

종로구 삼봉 정도전 집터

유학도 으뜸, 공적도 으뜸이라는 태조의 어필 하사받은 정도전

1차 왕자의 난 때 참수당한 뒤 조선 말 467년 만에 ‘신원’돼

풍수에 따라 명당자리에 집터 잡아 풍수도참설을 부인하며 뒤로는

무속 찾은 당시 사대부 모습 그대로 산소 터, 봉분 없고 작은 푯말 고작

서울 종묘공원 안에 1995년 정도6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삼봉정도전시비에는 그의 시 ‘진신도팔경시’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 정도전의 초상 부조도 있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7 종로구청 정문 앞에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서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가까운 대한민국 심장부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 서울 인문지리지 <한경지략>에서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서울에 설치된 국립 중등교육기관)이 자리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가의 서당 자리요, 지금 제용감(왕실용 옷감과 의복의 염색·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궁중에서 사용한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는 정도전가의 마궐(마구간)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이다”라고 소개한 바로 그 집터이다.

태조가 ‘儒宗功宗’(유종공종·유학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다)이라는 어필을 내린 개국 일등 공신 정도전의 옛집은 종로구청·종로소방서·서울지방국세청·코리안리재보험·석탄회관·이마(利馬)빌딩에 걸친 드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삼봉의 비참한 최후 이후 고대광실도 잘게 쪼개졌다. 서당은 중학당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수송초등학교를 거쳐 종로구청으로 흘렀다. 마구간은 궁중 마구간 사복시가 되었다가 경찰기마대를 거쳐 이마빌딩으로 맥이 이어졌다. 안채는 제용감에서 불교관리기구인 사사관리서, 황성신문 사옥, 농상공학교, 수진측량학교 등 수많은 기관과 단체가 지문을 남겼다. 목은 이색의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이 제자의 집터 옆에 자리잡은 것도 이색적이다.

태종은 계모(신덕왕후)의 능(정릉) 병풍석을 헐어 청계천 광통교 아래에 깔아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듯이 만고역적 삼봉의 집도 말발굽이 짓밟게 했다. 집터를 스쳐 간 숱한 역사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다. 땅의 유전(流轉)이다.

‘풍수설에 맞춰 지었다’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이른바 풍수명당이라 일컬어지는 집터를 고르고, 땅이름을 지었다. 한성부 중부 8방 중 ‘수진방’(壽進坊)이라는 지명은 ‘장수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 일부이다. ‘백자천손’(백 명의 아들과 천 명의 손자를 본다)의 명당으로 꼽힌다. 조선 초 경복궁 앞 육조대로변 의정부와 이조, 한성부 바로 뒤편이고 지금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대사관, 케이티(KT)가 뒤를 이었으니 관청이나 상업지구로는 복지(福地·집터의 운이 좋아 운수가 트일 땅)임에 틀림없다.



거주지로는 어떨까? 1398년 8월26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방원 일파에게 급습을 당한 정도전은 남은·심효생과 함께 집 근처 송현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아들 넷 중 맏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세종 때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양택의 음덕으로 멸문지화를 면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삼봉이 ‘수명을 다했다’는 의미로 수진방(壽盡坊)이라고 동네 이름을 바꿨다. 정도전의 최후 현장은 김수근이 설계한 중학동 옛 한국일보사 어림이다.

<불씨잡변>(불교 교리 비판서)을 지어 조선의 국시 ‘숭유억불’을 실현했고, 도선에서 무학으로 전해지는 전통 풍수도참설을 부인한 정도전이 자신의 집터 입지는 풍수에 따랐다는 얘기다. 선비도 뒤로는 불교와 도가, 무속에 심취하는 게 당시의 풍속도였다.

삼봉이 처형된 날 <태조실록> 졸기(卒記)에 사관은 “고려사를 왜곡 폄하한 불충과 조선 왕실을 해친 천하의 간적이자 역적이며… 도량이 좁은데다, 시기와 겁이 많았다”라고 적었다. “승려가 종의 아내와 간통해 낳은 딸이 정도전의 외조모”라는 미천한 출신 성분도 빠뜨리지 않았다.

땅속에 묻혀 있던 삼봉이 명예를 회복한 것은 400년이 흐른 뒤였다. 정조 15년(1791년)에 <삼봉집>을 수정·편찬토록 했고,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도성 건설의 공을 인정해 시호(문헌)를 내렸다. 무려 467년 만의 공식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림)이다.

승자의 역사인 <태조실록>에 묘사된 정도전의 최후는 드라마처럼 장렬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예전에 공(이방원)이 이미 나를 살려주었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라고 목숨을 구걸했으나 정안군(이방원)은 가차 없이 목을 쳤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23의1 양재고등학교 정문 앞 쌈지공원 안에 서초구청이 2013년 세운 ‘삼봉 정도전 산소터’푯돌. 1989년 유족의 의뢰로 발굴한 결과, 정도전의 묘로 추정됐으나 묘지가 도굴돼 확인은 불가능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23의 1에 삼봉의 산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실학자 유형원이 펴낸 <동국여지지> 과천현 편에 “정도전의 묘는 과천현에서 동쪽으로 18리, 양재역에서 동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후손들은 우면산을 뒤진 끝에 묘를 발견했고, 1989년 한양대박물관에 의뢰해 묘 3기를 발굴했다. 1호분에서 몸통이 없는 머리 부분 유골이 나왔는데 왕자의 난 때 참수됐다는 실록 기록과 일치했다. 2호분은 부인 최씨의 묘로 추정됐다.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도 함께 출토됐지만, 결정적 물증인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가 도굴된 상태여서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마무리됐다. 유골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 부근에 모셨다.

삼봉의 서울 산소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양재역 3번 출구로 나와 서초구청과 국립외교원 사잇길로 걸어 올라가다 양재고 정문 앞 쌈지공원 안 서초동 산 23-1에 있다. 봉분은 사라지고 쌈지만 한 푯돌 하나가 전부다. 산소를 생각하고 찾다보면 지나치기 쉽다. 2013년 건립하면서 ‘삼봉 정도전 산소 터’라고 세웠다. 길섶에 있고 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공원 가운데로 옮기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크기는 작지만 오석 두 개로 세 봉우리 모양을 흉내냈다.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峯)이라는 것을 기린 것 같다. 그런데 정도전의 호가 왜 삼봉이며 어디를 일컫는지 알고나 세웠을까? 삼봉의 호는 외가가 있던 충북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땄다는 설과 서울 삼각산이라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도담삼봉설에 대해서는 단양군에서 전설까지 곁들여 연관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삼봉집>에 전해지는 ‘산중에서’ 등 시조와 정도전이 30대에 떠돈 곳이 개성에서 멀지 않은 부평, 김포였다는 점에서 시조에 등장하는 삼봉의 옛집 ‘삼봉재’는 삼각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지금은 북한산이라고 통칭하지만 백운대·만경봉·인수봉 세 봉우리를 삼각산 혹은 삼봉이라고 일렀기 때문이다. 또 정도전이 거주한 삼봉은 깊은 산이고, 강이 등장하지 않는 점도 삼각산설에 힘을 싣고 있다.

삼봉은 한양천도 이후 ‘신도가’에서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며 서울의 정체성이 한강과 삼각산에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삼각산에 살았고, 삼각산을 칭송했다. 호도 삼봉, 집도 삼봉재, 문집도 <삼봉집>으로 지을 만큼 애착을 보였다. 그러나 삼각산에는 정도전의 족적이 없다. 삼봉 정도전을 위로해주고 싶다.

 

서촌 송석원 터

서당 훈장 천수경의 집 이름 중인 13명과 함께 시모임 결성

흥선대원군과 김정희도 출입 김홍도 그림, 김정희의 글씨로 남아

매국노 윤덕영이 그 자리에 3층 프랑스풍 건물 벽수산장 지어

800평 규모, 한양 아방궁으로 불려 김정희 글씨 새겨진 바위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

한양 아방궁’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로 지은 돌계단 위 한옥이 옛 송석원 터를 증언해준다. 한옥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복원돼 있다.

송석원(松石園) 터 푯돌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3번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전봇대 옆 좁은 보도 위에 있다. 통인시장 후문 앞 정자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GS리더십센터 쪽으로 좀 걸어 올라가다 보면 인왕부동산과 국시한그릇이 나오는데 바로 그 앞이다. 외진 곳인데다 푯돌의 전면부가 보도를 향해 있어서 큰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역사지식이나 서울지리에 능한 사람이 아니면 푯돌만 보고는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동네 꼬마를 붙잡고 물어보니 “송석원…? 몰라요. 수송동 계곡은 알아요”란 대답이 돌아온다.

역사란 생성도 쉽지 않지만 제대로 전승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오늘의 서촌이나 옥인동이라는 동네가 생기기도 전에 위명을 떨쳤던 송석원이 이제는 한갓진 이야깃거리가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서울의 산하에서 송석원처럼 드라마틱한 장소는 흔치 않다. 서울을 지탱하는 4개의 산 가운데 우백호, 서산에 속하는 인왕산의 본류가 옥류천이었다. 계곡 이름에서 옥류동이라는 지명이 나왔고,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억지로 합성해서 만든 지명이 오늘의 옥인동이다.

송석원은 인왕산과 옥류천의 대명사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족 전용 세거지였고, 이후 세도가의 별장지대였다가, 선비도 아닌 중인 신분으로 시를 쓰는 별난 서리, 아전들의 본거지가 됐다. 건축 당시 대궐보다 크고 화려한 ‘한양 아방궁’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필지가 분할되기 전까지도 ‘송석원인왕산 아랫동네’를 지칭했다.

뜸 그만 들이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송석원은 서당 훈장 천수경(1758~1818)이 살던 집 이름이다. 송석도인(松石道人)이란 호에서 비롯됐다. 한낱 서당훈장의 아호와 당호가 역사가 된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가난하지만 독서를 즐겼고, 인품 있고, 글솜씨가 출중한 시인은 정조10년(1786) 7월 장혼, 임득명, 김낙서 등 중인 13명과 함께 시모임을 결성해 3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문인 사대부를 포함해 당대 선비들은 모임과 백일장에 초청받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이 모임을 ‘송석원 시사’ 혹은 옥계시사라고 일렀다. ‘옥계청유첩’ ‘옥계십경첩’ ‘풍요속선’ 등 문집에 그림과 시편이 전한다.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이나 추사 김정희도 함께 어울렸다.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는 1791년 유둣날 낮 송석원 시사의 낮 모임을 그렸다. 옥류천 하류 초입 풍경이며 바위 절벽 아래 ‘송석원’(松石園)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오늘의 박노수미술관 어림으로 추정된다.

송석원은 당대 최고이자,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이인문이 남긴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임이 결성된 지 5년이 지난 1791년 음력유월 보름 유둣날 9명이 낮밤으로 두 차례 시회를 열었다. 낮모임은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에, 밤모임은 김홍도의 ‘송석원시사 야연도’에 각각 담겼다. 그림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화서의 두 화원에게 주문 제작했다. 당시 김홍도의 그림 한 폭에 쌀 60섬이었으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그림 두 장 값으로 2000만원을 지불했다는 얘기다.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큰 바위 절벽 아래 한자로 ‘송석원’이라고 세로로 적힌 각자가 선명하다. 바위 각자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바위 각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아예 다른 곳이다. 너럭바위에 갓과 도포를 차려입은 8명이 앉아 있고, 1명이 막 도착하는 장면이다. 가운데 좌정한 이가 천수경으로 보인다.

그림 속 풍경은 과연 어디일까? 지금은 크고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산기슭의 흔적은 사라졌고, 쏟아져 흐르던 옥류천 물길은 수십 갈래 골목길과 사람길로 덮여 자취가 없다. 다만 낮은 옥류천의 하류 초입이요, 밤은 상류 언덕 위라고 추측된다.

전문가들은 김홍도가 그린 밤그림 장소를 옥인동 청휘각 뒤 서울교회쯤으로 추정하는데, 1958년 건립된 이 교회의 이름은 ‘하와이 한인 기독교 독립교회’였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육군공병단을 동원해 지었다고 한다. 교회 종탑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이는 서촌의 풍경이 아스라하다. 이인문의 낮그림 장소는 박노수미술관 어림으로 짐작된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 야연도’는 이인문의 그림과 같은 날 벌어진 시회의 밤 풍경이다. 그림 속 옥류천 상류 언덕 위 너럭바위는 오늘의 옥인동 청휘각 터 옆 서울교회 쯤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이 찍은 사진에 남아 있는 ‘송석원’이라는 바위의 각자는 추사 김정희의 32살(1817년) 때 글씨다. 조선 최고의 화가와 서예가의 작품이 한 장소에 헌정된 유일한 사례라는 점과 함께 송석원 최대의 미스터리는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의 위치에 쏠려 있다.

송석원의 열쇠는 장동 김씨와 여흥 민씨에 이어 해평 윤씨로 대물림됐고, 일제 강점기 윤덕영(1873~1940)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일병탄에 기여한 공으로 자작 칭호를 받고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윤덕영은 순종비 윤씨의 백부이며, 일제 후반기 납세액 순위가 20위 안에 들 정도로 부호였다. 치마폭에 옥새를 감추고 달아나는 조카딸에게서 옥쇄를 빼앗아 열흘 동안 집에 보관했다가 일제에 바친 병탄의 일등공신이다.

윤덕영은 인왕산 아랫동네를 싹쓸이한뒤 ‘벽수산장’이라는 프랑스풍의 3층짜리 석조저택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 집을 ‘한양 아방궁’이라고 했다. 대궐을 굽어보는 위치에다 건평이 800평에 달하는 벽수산장은 건축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단일 건물이었다. 뱃놀이가 가능한 200평 정도의 호수도 만들었다.

1910~3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 속 윤덕영의 머리 위에 ‘벽수산장’이라는 거대한 세로 각자가 보이고, 바로 왼쪽에 가로로 ‘송석원’이란 추사 글씨가 흐릿하다. 추사의 각자가 처음 사진에 찍힌 것이다. 윤덕영이 세운 벽수산장이 바로 송석원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1927년 당시 지적도에 따르면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가 윤덕영의 집으로 표기돼 있을 정도이니 사진 속 바위벽이 어디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3번지 길거리에 있는 송석원 터 푯돌.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노주석 제공

송석원 각자는 종적을 감췄고, 한국전쟁 이후 필지가 잘게 쪼개져 피난민들의 집이 난마처럼 얽히면서 묘연해졌다. 추측이 무성하지만 이인문의 그림 속 옥류천 하류를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인 박노수미술관으로 본다면, 이 건물 뒤 바위벽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송석원의 기구한 장소 유전은 끝없이 이어졌다. 1966년 벽수산장 본관 보수공사 중 불이나 건물이 전소하다시피 하면서 건물의 수명은 끝났고, 1973년 도로정비사업 중 철거됐다.

윤덕영은 여론의 지탄이 부담스러웠던지 정식으로 입주하지 않고, 중국의 종교단체인 홍만학회의 조선지부 예배당과 사무실로 본채를 임대했다. 해방 후 덕수병원, 조선인민공화국 청사, 미군 장교숙소로 전전하다 1954년부터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이 사용하던 중 불이 난 것이다.

사람들이 서촌 옥인동에 열광하는 이유는 서촌의 정신적 고향, 송석원의 네버앤딩 스토리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 아닐까? 길가에 널브러진 육중한 돌기둥 3개와, 36개 돌계단 위 한옥의 위풍도 범상찮다. 인왕산 아랫동네의 정체성인 송석원 바위 각자를 언젠가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나래를 편다.

이완용 못잖은 매국노 윤덕영은 송석원에서 살지 못했고, 대가 끊긴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는 ‘권선징악&사필귀정’ 스토리는 덤이다. 그러나 생존 현실은 낭만이 아니다. 옥인동은 재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방황 중이다. 도시재생의 마법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