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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성곽길의 비하인드 스토리

peppuppy(깡쌤) 2021. 2. 28. 11:34

 

북악산 성곽길의 비하인드 스토리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질문한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그녀가 답한다. ‘무슨 후회?’

다시 기자가 묻는다. ‘그 사람 생각은 언제 많이 하셨나요?’

그녀가 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하며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 복을 받으셔야 줘.’

그녀가 힘없이 말한다. ‘그게 무슨 소용 있어.’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하며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녀가 답 한다.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할 거야.’

기자가 측은한 눈빛으로 마지막 질문을 한다.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녀는 잠깐의 기다림도 없이 답을 한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 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자야 - 김영한 여사

그녀가 바로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 여사이다. 3공 군사 시절 ‘밀실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만큼 그 당시 3대 고급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은 오늘날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로 유명하다. 백악산(북악산) 구간의 주변 지역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지금은 일반 시민들이 자주 들리는 아름다운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이름 없던 시인과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인 기생의 만남이 오늘날의 길상사가 있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제 와서 밝히는 것이지만 내가 처음 사진의 비밀 프로젝트로 서울성곽길을 기사로 쓰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길상사의 숨은 이야기 때문이다. 지금의 길상사가 오래전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으며 그 요정의 주인이자 야[子夜]라는 애칭을 가진 기생 김진향(기명)이 함흥 영생 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白石](본명:백기행)과 운명적으로 만나며 둘의 슬프고긴 기다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 영생 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과 첫 만남을 가진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이 별은 없어요.”그런 그들의 만남은 사랑과 해후의 반복으로 이어지다 결국은 분단의 아픔처럼 백석은 북[北]에 자야는 남[南]에 남게 되었다.

 

백석 시인

백석 시인은 오랫동안 월북 시인이란 불명예로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1990년대 중 후반에 재북 시인으로 재평가되면서 교과서에도 실리는 시인이 되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서는 백석 시인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다 길상사의 자야 김영한 여사를 알게 되면서 백석 시인을 알게 되었다. 백석 시인의 잘 알려진 시로는 ‘나와나 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있다. 자야 김영한 여사는 백석이 그 시를 자야 본인을 위해서 쓴 시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백석은 어느 날 ‘바다’라는 시가 실린 여성지를 가지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 주며 “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종종 앉아 계셨다는 나무의자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이 쓰신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감명받아 무려 십여 년 동안 간곡히 부탁하여 결국 1987년 법정스님 이대 원각을 청정한 불 도량(불도를 닦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주기를 청하는 그녀의 값진 시주를 받아들였다. 그 당시 대원각의 값어치가 대략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녀가 법정스님에게 받은 것은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뿐이었다. 대단하다, 감탄스럽다, 존경스럽다 등으로 그녀의 큰 행적을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은 그저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기생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한때 동경의 문화학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수학한 모던한 엘리트 여성이며 몇 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작가로서 문학인이었고 백석이란 천재 시인과 3년이나 동거를 했을 만큼 또 다른 문학인을 알아볼 줄 아는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남달리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재미나게도 그 비슷한 시기에 천재 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서울로 올라와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다.

 

1 길상사 초입에 있는 약수를 떠 마시는 표주막

2 길상헌 뒤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길상화 공덕비

3 길상사 극락전에서 참배하는 보살들의 뒷모습이다.

 

김영한 여사가 죽기 전에 유언을 했는데, 본인이 죽으면 그 유해를 화장해서 한 겨울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헌 뒤뜰에 뿌려 달라고 하였다. 그녀를 길이는 작은 공덕비가 길상사의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서울 성곽 주변에는 나라를 세운 왕도 아니고 나라를 구한 영웅도 아니지만 힘들고 고된 우리들 삶처럼 오래되고 남루해져 잊힌 시 한 편 속에, 스쳐가는 길가에 그들의 이야기가, 작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 아쉽지만 길상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첫 구간인 백악산 구간을 떠나보자.

 

서울 성곽길의 시작을 백악산(북악산) 구간으로 정한 이유는 정도전이 처음 도성 성곽을 정비할 당시 백악산 정상에서 하늘천[天] 자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천자문의 97번째 되는 조상할 조 [弔] 자로 끝나기 때문에 이번 기행의 출발을 백악산 구간으로 정한 것이다. 혹 자는 도성의 정문은 숭례문(남대문)으로 거기서 순성(성곽을 따라 돌면서 도성 안팎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시작하는 게 옳다고 말한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 하지 않았나. 백악산 구간이 전 성곽길 구간 중에 제일 힘든 곳 이기도 해서 이런저런 의미로 백악산 구간을 첫 출발지로 정했다.

 

경복궁 역에서 버스 타고 자하문 고개역에 하차를 하면 바로 옆에 청계천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 이 근처라는 것을 알리는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이 있다. 길 건너편에는 어릴 적부터 백석 시인을 동경하던 윤동주 시인의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백악산 구간의 시작점이 되

창의문[彰義門]은 태조 5년 도성이 축성되면서 건립되었다. 개성에 있는 자하동처럼 아름다운 계곡이 다해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했다. 창의문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창의문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천장 아래 기다란 액자 같은 현판이 걸려 있다. 이현 판은 1623년 인조반정 때 참여했던 정사공신의 명단이 1등 공신부터 3등 공신까지 모두 52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창의문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출입하기 위한 기능으로서의 문 구실은 제대로 못했던 성문이다. 속설에 의하면 창의 문 밖 땅 모습이 지네처럼 생겨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라는 뜻으로 성문의 입구 부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아치 형문) 위에 천적인 닭을 닮은 봉황을 그린 것이라 한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탐방 신청서를 쓰고 신분증을 제출하면 출입증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가파른 백악산 구간이 시작된다.

 

백악산(북악산)은 경복궁 북쪽에 자리 잡은 산으로 백악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던 사당인 백악 신사가 있는 산이라고 하여 백악산이라 불렀다. 백악산의 원래 이름을 일제가 북악산으로 낮추어 불렀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북악산이란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즉, 조선시대 때에도 백악산이라는 이름은 북악산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4월 서울 백악산 일원을 국가지정 문화재원‘ 사적 및 명승 제10호’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에서도 밝혔듯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여러 고지도와 문헌 등의 서료에서 전하는 ‘백악’의 지명을 살리기 위한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도 이 글에서 백악산으로 지칭한다. 백악산 구간은 한때 군사 보호 지역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양 도성의 성곽이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다. 2007년 4월 5일 식목일을 기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전 유홍준 문화재청 청장이 재직 시 40년 만에 전면 개방되었다. 개방 초기 에는 1시간 단위로 기다려서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오후 3시 전에 가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다. 참여 정부가 서울 시민에게 주고 간 큰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여기에 일화가 있는데, 발단은 이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을 산책하다 발견한 숙정문과 그 일대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광경이 워낙 빼어났던지 그 풍경을 대통령 혼자 독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 일반인들에게 개방할 것을 문화 재청에 권고하게 되면서 개방이 되었다.

 

창의문에서 시작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은 탐방자들에게는 고뇌와 고통의 시간으로 무더운 계절을 탓하게 되고 한 손에 쥔 카메라마저 내동댕이치고 싶을 만큼 가파른 길이다. 그렇게 백악산 중턱쯤에 올랐을 때 잠시 숨고를 자리로 돌고래 쉼터를 만나게 된다. 벤치 옆으로 길게 누운 바위가 돌고래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잠시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고 또다시 천년의 시간처럼 느껴지며 오르고 올라 드디어 백악산 꼭대기의 백악마루에 무거운 발을 디딘다. 예전에 북한의 공중 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지키기 위해 포를 쏘는 발칸포 진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없으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백악 마루 정상의 기쁨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 1.12 사태 소나무를 보게 된다. 무장공비로 생포된 간첩 김신조 사건 때 15발이나 총을 맞은 족히 200년은 넘은 소나무이다. 이 사건 이후로 2007년 4월 5일까지 40년 동안 백악산 구간은 출입 금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개발을 억제해서 전깃불 하나 없던 상황이 게릴라 침투에 호조건을 제공했다고 판단하여 북한산 국립공원 지역을 해제해서 택지로 분양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평창동이다. 그 소나무를 지나 청운대에 도착 전 왼쪽의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성곽을 쌓은 책임자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성돌)이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공사 실명제와도 같다. 성곽을 거닐다 보면 이런 각자 성석이 종종 눈에 띄는데, 이런 성석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 성곽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이름 없는 조선 석 장인들의 노고가 아닐까.

 

각자 성석이 새겨진 성벽 맞은편은 청와대 뒷산에 푸른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청운대가 있다. 그 이름이 산 아래에 있는 청운동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백운대에서 힌트를 얻어지은 것이라고 한다. <태조실록>에서는 경복궁이 백악산에서 봤을 때 ‘임좌병향 하여 자리 잡았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경복궁은 백악산의 정남이 아니라 남동쪽으로 15도 방향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북악산 정상이 아니라 동쪽자락으로 좀 내려와서 보면 일직선으로 되는데, 그 자리가 청운대다. 하지만 백악산 구간은 사진 촬영이 자유롭지 못해서 청운대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필자도 그런 이유로 청운대에서 촬영을 하지 못하다가 다른 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에게 요청하여 군간부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어렵게 경복궁과 세종로가 보이는 광화문 일대를 촬영할 수 있었다. 청운대를 지나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성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 성곽 밖의 구간에서 높은 성벽의 형태를 체감하게 된다. 다시 암문(문루 없는 성문. 전시에 적을 기습 공격하거나 군수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적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비밀통로로 서울성곽에는 모두 8개의 암문이 있다.)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서 조금 걷다 보면 곡장(성곽 일부 구간의 돌출 모양을 원형으로 굽어지게 만든 시설)에올라갈 수 있다. 그곳에서 저 멀리 평창동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물론 이곳에서도 경복궁 방향으로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비굴한 노력에 의해서 군의 특별한 허락 아래 좌측의 풍경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의 세검정

 

서울성곽 백악산 구간을 탐방하며 카메라에 담아야 할 역사적 명소가 많지만 그 성곽 주변도 놓쳐서 안될 것이다. 그런 장소가 바로 성북동과 부암동이다. 백악산 구간은 창의문에서 혜화문 방향으로 가게 되면 힘들 수도 있다. 좀 더 쉽게 등반을 하려면 혜화문이나 성북동 일대에서 출발하여 숙정문을 넘어 창의문으로 가는 것도 추천한다. 창의문을 기준으로 성문 밖이 부암동에 해당된다. 부암동은 조용하고 한가로이 산책하듯 둘러보기에 좋은 장소이다.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아담한 한옥과 멋스러운 카페도 보게 된다. 주인이 없는듯한 전시관도 관람할 수 있고 이제는 보기 힘든 방앗간도 있다. 부암동에 ‘산모퉁이 카페’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 이어져 있는 성곽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백악산 구간에서의 불편한 촬영 금지는 부암동에서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마치 한 마리 용이 푸른 하늘로 승천하는듯한 백악산 구간 성곽을 마음껏 담을 수 있다. 성북동은 그 전통답게 많은 명승지가 분포해 있어 참 매력적인 동네다. 이번 기사의 주제인 길상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때 누에의 번성을 기원하던 선잠단지,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면서 일부러 북향집으로 지었던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시는 지용이요 소설은 태준이다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제 강점기 때 대표하는 소설가 이태준의 옛 집,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옛 집 등. 이렇듯 성북동은 근대의 문화와 흘러간 뼈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품고 있는 동네다. 사진 촬영에 좋은 장소는 오히려 성북동과 부암동에 많이 있으며 모든 곳이 서울 성곽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팍팍한 도심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난듯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이번 사진의 잡지 2호에서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나머지는 이 글은 읽은 독자들이 하나씩 직접 찾아 나서길 바란다. 여행은 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때 묻은 신발과 숨은 이야기를 담을 카메라와 함께 둘이 떠나는 것이 아닐까

                                     *글, 안재현

 

한양 도성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순성기(巡城紀)

 

여장은 성가퀴다. 비탈진 경사면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여인의 가르마처럼 지붕을 얹으면 그것이 여장(女墻)이다. 여장 아래에는 총안(銃眼)을 뚫어 적을 겨냥케 했는데, 가운데 총안은 아래로 비스듬히 뚫어 가까이 붙은 적을 쏘게 하니 근총안이요, 좌우의 두 총안은 방향을 수평으로 내 멀리서 몰려오는 적을 겨누게 하니 원총안이다.

여장은 여담이나 여첩(女堞), 타(垜) 등으로 불리며 수성전에서 적의 병기로부터 병사를 보호하고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술적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여장과 여장 사이는 끊어져 있는데 이를 타구(垜口)라고 하며, 우리나라 석성의 타구는 장구 모양으로 되어 있어 시야를 넓게 확보할 수 있는 과학적 구조이다. 따라서 하나의 타구는 총안 세 개로 구성되어 있고, 일정한 규칙에 의해 구축된 타구의 수로써 성벽의 연장을 계산할 수 있다.

 

여장은 또 태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지속적으로 건축과 보수가 이루어진 국가적 건설 사업의 기본 계측 단위였다. 하나의 여장은 일정한 공사 구간을 산정하는 기준이었다. 그것은 또한 물리적 단위를 넘어 해당 공사 구간을 담당한 관청이나 고을의 표지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실제로 돌을 나르고 괴고 깎은 백성들의 노역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600년 넘게 단속적(斷續的)으로 이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바로 한양 도성이며, 오늘날 서울시민은 물론 전 국민에게 고색창연한 왕조의 유산으로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긍지의 뿌리가 되고 있다. 한양 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도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며, 한국전쟁 때도 소멸의 화는 겪지 않았다. 또 야음을 틈타 창의문을 넘는 인조반정 군이나 청와대를 향해 진격하는 일단의 무장공비에게도 1차적으로 맞닥뜨린 방어벽은 여장 아래 시퍼렇게 독을 품은 세 개의 총안이었을 것이다.

 

청계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북악산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지만 서쪽에서는 창의문을 통과하게 된다. 청와대의 배산(背山)으로 입구에서 출입카드를 나눠주는 안내소를 통과하면 곧바로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계단이 나타난다. 거기서부터 해발 342미터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의 다른 이름) 표지석까지 쉬지 않고 오르막이다. 어지간히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이라도 한 번쯤 쉬지 않고는 내처 오르기 쉽지 않다.

봄날의 꽃핀 도성을 만끽하려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오르다 보면, 이런 비탈에서 보초를 서는 일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적으로서 총칼을 들고 넘어오는 일은 더욱 고역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정도전(1342-1398)이 왜 하필 이런 곳을 등에 두고 경복궁을 짓고 한양을 설계하고자 했는지 자연히 알 수 있다. 그만큼 북악산의 산세와 성벽의 기울기와 여장과 총안의 방어력은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양 도성의 강력한 방어력에도 불구하고 임진년에는 왜군의 침공으로 조선의 법궁 경복궁이 불탔으며, 병자년 호란 때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돌부리에 아홉 번이나 머리를 박는 치욕을 당했다. 또한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고, 민족상잔의 전쟁도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는 것은 화강암으로 똘똘 뭉쳐진 성벽이 아니다. 산세도 아니고 여장도 아니고 총안도 아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언제나 그 나라를 지켜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백악산’ 표지석을 정점으로 숙정문까지는 대체로 내리막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 끝에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은 다리가 후들거린다. 여장과 타구와 총안을 살피며 내려가는 길마다 진달래와 개나리와 벚꽃이 만개했다. 청운대(靑雲臺, 해발 293미터)에서 바라보는 성북동과 멀리 서울 동북쪽 시가지는 아득해서 아름답기까지 했다.

군데군데 병사들이 지켜 서서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전투복이 아니라 운동복 같은 차림으로, 적이 아니라 순성객을 살피는 그들도 잘 알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너와 내가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것을.

 

백악산 가파른 비탈마다 성돌을 쌓고 그 지붕을 여인네 가르마처럼 얹으니 그것은 여장(女墻)이다 한 여장 아래 총구 셋을 뚫어 적을 겨누게 했는데, 가운데 총구는 방향을 아래로 뚫어 가까이 붙은 적을 쏘게 하니 근총안이요 그 좌우는 총구를 수평으로 내어 먼 적을 겨냥케 하니 원총안이다. 태조 때부터 지금껏 쌓고 지키고 무너지고 쌓았으니 총구라면 적어도 셋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군사학이나 전투술은 아니며, 왜란과 호란 같은 외침은 물론이요 창의문 넘는 반정군이나 수십 명 무장공비마저 막아내지 못했으니 도성은 일종의 건축 미학이다. 아니다, 도성은 와사증을 고쳐낸 신경의학이요 중년의 건각을 만들어낸 피지컬 트레이너요 숨 쉴 때마다 피톤치드 누리게 하는 환경생태학이다 아니다, 도성은 무조건 옛것을 좋아하는 한 의고주의자의 알 수 없는 자부심이거나 근거 없는 그리움이거나 울분이거나 눈물이다

 

                               * 글 ; 시인 김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