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디 럼
블러디 럼
서인도 제도는 아메리카를 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에 의해 붙여진 지명인데 1492년 발견된 이래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설탕의 공급지로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 백색 황금이라 불리던 설탕을 만들어낸 뒤에 남는 부산물이 당밀이다. 이것을 물에 풀어 자연 발효해 술을 만든 뒤 증류한 것이 럼인데, 당시에는 교환의 결제수단으로도 사용돼 도수가 높을수록 비싼 값어치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럼 증류원액과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술이 유명했는데, 2015년도까지 생산되며 널리 알려졌던 ‘캡틴 큐’가 바로 럼을 첨가한 술이다. 가짜 양주의 원료가 된다고 해서 2016년부터는 생산이 중단됐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처럼 이미 당화가 돼 있다 보니 알코올 발효만 진행되는데 라이트 럼은 2~4일, 헤비 럼은 20일까지 걸린다. 증류한 다음에 새 오크통의 안쪽을 그을리거나 와인을 담았던 오크통에 보관한다. 최소 숙성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빨리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8개월~2년 정도 숙성하고, 고급 럼은 3~10년 이상 숙성한다.
영국 해군은 물을 대신하기 위해 고온에서 변질되기 쉬운 맥주보다는 안전한 증류주를 보급품에 포함시키는데, 비싼 위스키나 브랜디보다 저렴한 럼이 적합했다. 당시 지휘관들은 럼에 물을 섞어 마시게 했는데, 그 비율은 지휘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에드워드 버넌 제독도 럼을 물로 희석해서 마시게 했는데 희석된 럼의 맛이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라임과 레몬을 넣어 마시게 해서 괴혈병 치료와 예방까지 됐다고 한다. 칵테일 가운데 럼에 레몬이나 라임을 섞어서 만든 ‘그로그’라는 게 있는데, 버넌 제독이 걸치던 망토인 그로그램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영국 해군의 배에 럼이 항상 실려 있게 된 이후 허레이쇼 넬슨이 럼을 상징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영국을 침략하려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이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제해권이 중요하다고 보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영국 해군을 제압하려고 했다. 1805년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은 연합함대를 격파하며 승리를 거뒀지만, 이 과정에서 빅토리호에 있던 넬슨은 전사하고 만다. 영국까지 넬슨의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패를 막기 위해 럼이 가득한 통에 시신을 넣어 운반했는데, 이때 넬슨의 피와 섞인 럼이 붉은빛을 띠어 붉은색의 럼을 ‘넬슨의 피’라는 별칭으로 부르거나 ‘블러디 럼’으로 부른다. 이와 관련된 오싹한 이야기가 있다. 영국으로 오는 도중에 목이 마른 병사들이 통에 있던 럼을 몰래 조금씩 훔쳐 마셔 도착해서 통을 열었을 때 럼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시신이 있는 통을 사령관실로 옮겨 무장경비병이 지켰기 때문에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영국을 지킨 넬슨의 노력으로 영국에 대한 공격을 포기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선언하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국과 교역을 하게 된다. 러시아를 혼내고자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에게 결국 몰락의 길을 가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1·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해군과 육군에 럼을 지급해 목마름이나 추위를 달래는 용도로 사용했고 겁먹은 병사에게는 무서움을 잊고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물론 급할 때에는 소독약 대용으로도 쓰였다.
술칼럼니스트 이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