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ppuppy(깡쌤) 2015. 7. 15. 16:19

빨치산

1939초 정운창의 할아버지 돌아가심.-반내골 정씨 가문 소문난 양반부자. 5대독자인 아버지는 집안 재산 다 팔아먹어버림, 첫째 정운철,둘째 정운창, 셋째딸 정운희. 형이랑 반내골에 신설된 간이학교다님.

1941.봄 졸업. 형은 이본탄광으로 돈벌러감. '태평양 전쟁'발발. 어린 소년도 부역에 동원됨.

1943.6. 형 귀국. 정운창 16세에 구례읍 중앙국민학교 5학년으로 편입. 담임 박희택이 공부 열심히 시킴.-이리농림학교(중학교) 합격했으나 징병면제를 위해 철도종사원시험봄.

1945.4.3. 구례구역 철도원으로 부임.

1945.5.3. 구례군당 아지트 피습사건 발발. 군책,도당 오르그 검거됨. 군당수습위해 전남도당서 '오금일' 투입함.

1945.8.17. <건국준비위원회>건립.

1945.10. 아놀드 군정장관이 미군정만 합법정부라고 선포함.-미군정과 건준위의 잦은 싸움과 마찰

1946.3.1. 3.1절 기념식 시가행진. 공출반대, 미군정타도시위.

1946.4. 건준위 해산되고 미군정 들어섬. 인민위원회 탄압극심. 남한은 미국 잉여농산물 시장으로 됨.

1946초 정운창 결혼함- 집안의 압박으로 남평 문씨와 혼례올림, 화순토호집안. 그러나 마음붙히지 못하고 집 나와서 술먹으며 방황. 구례구역앞 양복점 친구 이상근(경성일보기자)이 사상서적 건냄. 광주친구 이상필이 좌익관련 얘기로 부추김.

1946봄. 정태중([해방일보]구례지국장)이 정운창에게 해방일보 신문배포 맡김.

1946.9. 전국적 총파업시작됨.

1946.9.24. 철도조노 일제히 파업돌입.

1946.10. 친구 조용식, 권상수와 이북으로 공부하러 가고 싶어서 서울로 떠남. 민주독립당 거물들이 기거하는 고택에서 중앙당조직부장 신진우(구례의자출신, 구례건준위초대위원장)만남-개성의 고정주소개 편지써줌→개성도착,한청단장 암살사건으로 고정주 체포되어 다시 서울로→정운창만 구례직장으로 복귀.

1947.1.6. 정운창은 <민주청년동맹>가입- 비합법 좌익동지들 왕래보위하는 임무맡음.

1947.4. <남조선노동당>정식입당. 새이름 - 『유혁운』 받음

1948.4.28 구례군내 각면의 우익인사 5명 살해되는 사건 발생.- 장성수(전남도당 오르그,구례군책)와 유혁운(문척면오르그) 등 6명 문척면비밀아지트에서 회의 중에 발각, 붙잡혀감.

1948.5.3. 구례경찰서 취조실서 모진고문당하나 입다뭄

1948.5.10 유혁운 취조담당형사 '임성택'(아버지와 문척친구인 임종철 조카)으로 바뀜. 직접찾아온 아버지의 회유에도 모두 입다뭄, 치안재판 후 구류29일 벌금5000원 선고, 그러나 기간 계속 연장됨.

1948.8.17. 봉성산 봉덕정 마당 벚꽃나무에 묶여 총살위협당하나 증거불충분으로 4달만에 풀려서 당으로 복귀.

1948.10.19밤11시 <여순사건> 발발.

1948.10.20. 여수14연대 반란소식들음. -군당지시로 유혁운 문척면 인민위원장되어 문척면당 조직함.

1948.10.23새벽 여수14연대 구례읍도착. 유혁운은 합법기구 조직원 긴급소집.유격투쟁대비 물량확보준비. 토지조사사업착수, 반숙작업

1948.10.25 계엄군(12연대,경찰)이 구례 다시 장악. 구례군당 지시로 유혁운은 군당오르그 임명. 모든 조직 지하로 개편후 입산함.

1948.11.13낮4시 박종하(구례군 유격대장), 박중래가 반내골에 숨어있던 유혁운(문척면책)찾아와 14연대도착예정 알림.

밤11시. 백운산잔류병력 규합한 지창수와 병력200명 반내골 도착.

1948.11.9밤10시.김지회부대500명 구례읍 동,북쪽 공격(구례읍2차공격),지창수부대200여명 구례읍 중앙국민학교공격(12연대주둔)

1948.11.21~23 계엄군, 섬진강변 양정모래밭에서 반란군 시체 불태움.

1948.11월말 군산주둔12연대(백인귀연대장)→남원→구례산동면→구례읍진입도중에 산동-용방사이의 배티재에서 김지회부대 매복에 걸려 60여명 사망후 남원으로 패주. 무기노획 대성과 →이후, 구례지역은 국군 대토벌로 피바다됨.

1948.11.27오전11시 계엄군 반내골마을 포위, 모든가옥 불지름. 유혁운아버지 사살 되고 집의 개(네눈이)만 꼬리흔듬. 오후, 유혁운은 심재봉동지와 보초서다가 아버지묘앞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와 누이 발견. 세포책 김용채 스파이되어 반내골 아지트공격. 마종재사살됨. 서태석과 죽마리 접선갔다가 계엄군의 비밀공격 목격 후 문척면당 아지트 옮김.

1948.12월중순.오전10시,많은눈.아지트건너편 웃성자골에서 큰 전투소리들림-박석우(전남도당 선전부장.담양출신.명치대 졸)와 일행4명 자폭. 유혁운은 안지동 누님집에서 어머니 보고옴.

1948.12.25. 군당소환장-27일까지 군당집합. 조직책 김성균과.

1948.12.26밤 총소리에 섬진강 얼음속으로 뛰어듬→용두소→토지면강언덕→문수계곡 웃대내마을→문수계곡→질매재→피아골삼거리에서 접선.

1948.12.27오전10시 피아골 구례군당 아지트도착.(유격대,지도부,조직부,선전부,민청..등). 구례군당위원장 박대수만남(박종화집안,광주농고졸,군청농업기수,해방직후활동). 유혁운은 구례군당 선전부 출판지도원 임명됨. 군당기관지 「앞으로」. 선전부에서 친구 조용식만남. 김성균 문척오르그임명.

[구례군당]

구례군당 위원장 - 박대수
구례군 유격대장 - 박종하
선전부장 - 박귀성
선전부원 유혁운,조용식.잡역 노동지.식사 곽영금


1949.1월말 토벌대의 지리산공격, 선전부 비트 떠나 통막에서 피신중 불이나서 눈속에 숨어 있다가 돌아옴.

1949.2.25 구례군당 아지트로 모두 다시 모임. 반당분자 공개처형.

1949.3.10즈음 군당아지트에 이현상과 여수14연대 지창수,홍순석,김지회,이진범 등 800여명 도착. 피아골 외곡으로 모두 보급투쟁나감. 선전부 한지공장서 종이2덩이 조달해옴.

1949.2.28~3.20 3.1절 기념투쟁-지리산 일주 순회투쟁. 이현상, 김지회, 홍순석 일행은 화개장터 공격→악양, 청암→남원 산내면 금판정마을

1949.2.15.

1949.3.20경 금판정 술도가 주인의 고발로 홍순석, 김지회 사살, 조경순포함 일행들 상당수 생포되고 흩허짐→14연대의 산내면전투 실패.

1949.3월중순 『백운산특각』 설치-오금일 파견

1949.3.24 군당책 박대수가 유혁운에게 백운산특수지구당(특각)으고 가라고 지시.

1949.3.25 유혁운 특각으로 출발

1949.3.27 특각도착, 특각조직완성. 이현상의 승인위해 오금일 지리산으로 떠나고 4월에 돌아옴.



[백운산 특각]

특각 위원장 - 오금일
특각 부위원장 - 박대수
특각 유격대장 - 박종하
특각조직과장 - 김채윤
특각 선전선동과장 - 조용식
특각 인민위원회 과장(인위과장) - 정귀석
특각 비서과장 - 유혁운




1949.4.20 백운산특각 활동개시.유혁운은 5개시군당으로 지시문,유격대활동결과보고서 등 당활동의 모든 문건 손질,전달로 바쁜나날보냄.

1949.4월말 특각 최초 투쟁- 강사령부대(박종화부대.20여명 ) 황전면 승주군 삽재 투쟁,대승리→소고기파티,오락회.

1949.5월말 강사령부대 투쟁- 광양군 진상면 20연대 중화기중대 습격. 대승리.



[박종화]

구례군 간전면 효곡출신.
180센치. 당당한 체구. 유난히 까맣고 큰눈 매력적. 승부욕 .어릴때부터 싸움꾼. 참새잡는 솜씨 수준급.
일제때 간문보통학교6년때 퇴학 후 일본 해군 입대 -최초 보통학교 동맹휴학사건 주도.
1945.술집서 일본헌병 한무리와 해군장교 싸움에서 장교살해 후 탈영 후 야쿠자됐다는 소문.
1945.8.15해방 후 여름에 고향돌아옴, 깡패짓 함.
1946 말. 조선공산당 조직활동. 차츰 변해감.
1948.5.10단선 반대투쟁 때 반동숙청나섬
1948.5월 구례군 좌익25명과 지리산 입산후 유격훈련받음
1948.8 전북 임실, 순창 파견-연판장투쟁 수행→전투지휘자로써 탁월한지도력 인정받음.
(성격: 정많고 시샘많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리숙하고 순진함.-유혁운의 파카 만년필을 자신의 미제야광손목시계와 주서없이 교환함)
1948.구례군 유격대 사령관
1949.백운산 특각 사령관(강사령관 부대)
1949.9.16 투쟁 이후. 이현상 부대 사령관, 참모장


1949.6월초 군당 '확대간부회의 사건'발생-군당의 70~80%간전면 출신, 간전출신 우대, 박대수군책 관료주의적 부패모습, 박대수 특각 이동 후 신오동군책의 더 악랄한 관료주의적 태도에 군당원의 군당지도부 비판사건. 특각의 진상조사반원 투입 후 소환,자기비판 함.

1949.6월중순 곡성 사로당계열'장중환'외 15명 백운산 떠돌다가 특각에 와서 공개적 자기비판 후 남로당 정식가입.



▶ 사로당(사회노동당)-여운형·백남운·강진 등이 중심되어 1946.10월 결성한 남한의 좌익정당. 1946.8월초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남로당으로의 당논의에 있어서 조선공산당 내부에서 박헌영중심 지도체제에 반발하여 내분이 일어남· 결국 조선공산당 대회파, 조선인민당 31인파, 남조선신민당 반(反)간부파 등이 토의를 거쳐 사회노동당 결성. 이후 남로당과의 합당문제를 둘러싸고 안밖과의 갈등아래 1947.2.27 당해체. 탈당 다수세력은 여운형 중심의 '근로인민당' 결성.



1949.6.25 김채윤 곡성군당책 임명, 유혁운 곡성군당 조직부장 임명, 장중환 외 15명도 곡성감.(곡성은 거의 야산, 7개면 오곡,죽곡,석곡,삼기,고달,입면,곡성에 지하조직구축)

1949.8월중순 곡성군당으로 백운산특각 지시내려옴-8.15기념투쟁(곡성결찰서 습격지시)

1949.8.14 박종하 대신 김환명,김흥복 인솔하의 강사령부대 45명이 곡성도착.

1949.8.15밤 곡성경찰서습격. 경찰서의 완강한 저항→금융조합금고열기실패, 고작 형사1명(윤형사)생포했으나 풀어줌(훗날, 유혁운 병보석때 윤형사 구례로찾아와 생명은인이라며 그의 손을 잡고 고마워함). 곡성군당은 게소되는 토벌작전에 시달리다가 '백아산'으로 군당을 옮겨서 곡성군의 조직사업 수행.



1949.9.16 빨치산 연락취약해 9.9기념투쟁지시 늦게 도착, 특각지시로 곡성군당 9.16결투시작. 곡성군당 전 성원 고작 30여명. 도로파괴,전신주절단, 삐라살포,벽보쓰기 등 목표량의 50%밖에 달성. 전남도당은, 박종화부대(60여명)가 광양군 서국민학교의 15연대본부 습격, 역대 최고의 전과거둠. →광양군 봉강면 봉강골짜기인 백운산 중턱까지 전리품 운반→봉강면 입구에서 또 한차례 격돌 후 퇴각

1949.9.17 9.16결투 후 전남도당 박종화외 60여명은 2개조로 나뉘어 빠져나옴. ①박종화 외 35명,17밤 자정 백운산→반내골→구례구역을 오른편으로 보면서→18일 아침, 곡성 봉두산 도착 후 3일간 잠복. ② 김환명(14연대출신,순천태생)외 25명,17일 새벽 백운산 도실봉장악 후, 4개의 위치(정챙이골~땅골능선,승주군 황전면 방향의 달뜨기재, 광양군 상봉쪽, 광양군 옥룡면과 봉강면 사이능선)에 5인조 소조 각각배치하여 15연대 1개사단의 1천여명과 격돌, 속임수로 속인후 여유롭게 빠져나감, 밤10시 땅골쪽 골짜기 따라 백운산을 빠져나옴 ▶9.16결투의 전리품으로 전남유격대 전체 완전무장, 나머지는 구례, 광양, 곡성군 유격대에도 나눠주었고, 이 승리로 박종화부대는 이현상부대로 소환되면서 이현상부대도 완전무장하게되면서 본격적인 유격부대의 투쟁 시작됨.

1949.11 9.16결투로 국군의 보복적인 토벌작전 공세강화. 당시, 전남도당 상황-여순사건 직후 입산자의 10%미만만 생존,인원 손실큼.보급투쟁의 악화, 중앙당과 선이 끊겨 완전고립상태 직면. 전남도당본부 장흥군 유치산에서 백운산으로 이동계획.

1949.11.23 5개월 사이 백운산특각 변화 많았음. 특각의 박종화부대 이현상부대로 소환, 백운산 특수지구당 해체되면서 전남도당소속의 '암성 대지구당'의 지도를 받는 '육성지구당'으로 재편됨. 곡성군당의 유혁운은 조직부장일을 김채윤 곡성군당조직책에게 인계 후 백운산으로 가서 '암성지구당' 정보과장으로 임명됨. 유혁운의 임무 ① 전남도당 40여명 백운산으로 이동시키기. 유치산→조계산~용계산 중간지점의 비트→백운산도착②전남도당본부요원들에게 백운산 주변 지리가르치기

1949.12월초 전남도당 조직부장 김병추(유혁운과 사돈간.일제때 고등계순사,별명-각시순사.민족주의자,일제예비검속령때 구례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 보호해줌)를 입산후 처음봄. 도당책 전인수가 중앙당과의 연결을 위해 유혁운에게 전남쪽 지하조직망 구축 지시내림.

다음날, 바로 떠남. 순창군 풍산면 순정부락 조영감집, 남원군 대강면 생솔리의 조직 점검, 공작금으로 약품,신발,종이,잉크 등등 구해옴.

1949.12.25일쯤 유혁운, 중앙당 연락책 소성대를 중앙당에 접선시키기위해 순창 조영감집까지 함께 감 → 조영감은 소성대를 전주까지 데려다줌

1950.1.5 접선하러 간 소성대 돌아옴-중앙당 완전파괴, 접선불가능 소식.



한국전쟁전 -[전남도당]

전남도당 위원장- 전인수
전남도당 부위원장- 박찬봉
전남도당 조직부장- 김병추
전남도당 유격대장- 최현(50.11월 전사)→김선우



1950.1월초 도당책 트에서 전인수, 김병추와 술자리에서서울출신 이성애동지 소개받음, 유혁운은 그녀와 서울로 중앙당 접선위해 떠나기로 지시받음.

1950.1.12 이성애와 순창 조영감집으로 감,새옷으로 위장 후→남원읍에서 하루 자고→사흘만에 서울 도착

1950.1.15 서울역 도착, 금천교 너머 용진여관 특실서 신혼부부처럼 위장하여 매일 선대기작업 착수. 비합 이후 중앙당 모든 선이 다 끊겨버림.

1950.1.23 아무런 성과없이 유혁운, 이성애는 백운산 도당트로 돌아옴.

1950.1월말 도당부책 박참봉과 소성대를 경기도당을 통해서 중앙당에 연결하기로 함.→유혁운은 박참봉,소성대를 순창 조영감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박종화부대가 백아산으로 갔다는 소식듣고 찾아감 (당시 지리산에 토벌대공격 집중됨, 지리산에 7연대 50여명만 남기고 모두 떠남, '5연대'는 이영희 연대장과 최규복정치위원 인솔하에 담양 추월산→ 쌍치 가마골 진출, '3연대'는 박종하지휘 아래 곡성 동악산 시시암골→옥과→백아산 입산) 밤에 모두함께 즐거운 오락회 열림

다음날, 두갈래로 나뉘어 헤어짐. 박종화외 1대대는 무등산 광주 공격투쟁(투쟁후 화순,장흥 돌아 보성거처 백운산행), 김흥복외 2대대는 유혁운과 곧장 백운산행.

▶1950년 1월의 백운산의 상황 - 백운산의 주요 고지와 보급로의 중요루트 모두에 국군이 상주하여 보금투쟁이 불가능한 상황. 산주변 마을 모두 소개되고 큰마을 들은 식량을 경찰지서에 맏기고 타먹음. 입산한 가족들은 경찰지서 주변에 삥둘러 잠자게 함. 이로인해 전담도당은 조직의 확대 불가능. 교란투쟁불가능,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는 상태, 2달동안 어쩌다 죽 한모금 먹고 버티는 생활의 연속.



1950.4월 「콩한말의 최후의 만찬」 - 1월1부터 굶주림으로 버티던 끝에 도당 핵심간부만 제외하고 전원 보급투쟁 시도. 목표지역- 광양군 진상면 야지마을. 여사령(장성수)지휘하에 무장대원46명, 비무장 기관원30명은 국국주둔지를 피해서 백운산능선을 멀리돌아서 구례간전 제기암골짜기 지나 간전면당과 합류하여 보급투쟁시작. 도당 대원들 쌀과 콩 보급투쟁 성공 후, 백운산 전방고지100m전에 휴식하며 식사하던 중 토벌대의 대공격시작! 대원들 대부분 처참하게 전사. 유혁운은 해질녁 널린 시체들 사이의 콩과 밥을 주워먹고 가까스로 바구리봉 향하던 중에 구례출신 박정숙동지가 오빠박춘산의시체안고 우는 것 발견. 박정하(박종하친형)시체도 발견. 박정숙데리고 가까스로 백운산 한재골 전남도당트에 도착했으나 이미 다 흩어지고 전멸한 상태. 다시 구례 반내골갔으나 문척면당도이미 파괴. 오산 마루턱에 앉아 고민후 구성리 마을에서 식량 구한 후, 곡성군당원 만나서 군당트(김채운 이하 5명만 살아남음)로 감. 곡성군당원 5명과 남원군 금지면의 한 부락에서 보급투쟁 성공하여 곡성에서 며칠 쉼.

연락원1명과 유혁운,박정숙은 백아산 도당분트로 가는 도중에 산기-석곡 사이 국도에서 박정숙 사살. 분트에서 조용식만남. 당시 살아남은 도당 기관원70명중 25명만 생존. 중앙당과의 선회복이 급선무.

1950.4월말 박참봉, 소성대의 서울파견 준비위해 유혁운과 함께 순창 조영감 집으로 감.

1950.5월말 철저한 준비후 5월말에 두사람을 서울로 출발시키고, 유혁운 도당으로 발길돌림- 곡성 통명산 지나다가 전남도당 보급투쟁나왔다가 취나물 뜯어먹고 모두 거품문채 쓰러진걸 발견. 생쌀로 간신히 살아난 후 전원 보급투쟁 섬진강건너 곡성 고달면 뒤쪽의 천마산 →남원군 송동면 어느마을 공격. 대성공! 지리에 밝았던 유혁운이 퇴로안내. 안전한 야지와 야산으로 경로 결정. 송동면→섬진강따라→통명산도착, 식량 1/2비장함→곡성 죽곡면 보성강 건넘→봉두산→백운산도당트도착. 밤사이 120리걸음.3일만에 보급투쟁 대성공으로 유혁운 영웅대접.




1950.6.21 박참봉과 소성대 서울로 떠난 후 조영감은 경찰서 잡혀가 고문끝에 자백. 박참봉,소성대는 전북도경에서 체포됨

1950.6.27 도당본부 야산으로 옮기자는 유혁운의 제안으로 봉두산으로 옮김. 구례읍출신 최석태가 비촌마을 친구에게 정보수집차 갔다가 한국전쟁 발발 소식 듣고 옴.모두 행군하여 곡성 태안사 넘어가는 매너미재 부근에서 짐을 풀고, 마을주민과 접촉하여 전쟁확인.

1950.6.30 유혁운 광주지구당 부책 임명.김채윤 광주지구당책-광산,광주,화순,곡성군당 돌며 옛당원들 재모집하여 간부육성사업착수.

1950.7.8 전남도당회의열림.도당간부들 전인수(도당책)감금 후 각 지구당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토대회함. 김선우의 간곡한부탁에도 불구 전인수처형됨.

1950.7월중순 광주에서 북쪽방향으로 아득히 포성소리 들려옴. 7월20일쯤 포성소리 매우 가까워짐.

1950.7.22 인민군이 장성 갈재를 넘었다는 소식. 정보수집조 파견-화순군 북면·이서면, 곡성군 석곡면 경찰지서들이 이미 텅비어버림.모두들 하산준비 마치고 마지막 오락회열림.

1950.7.23아침 백여명이 광주를 향해 백아산을 떠남. 화순군 동면도착, 화순 동면의 탄광방문-환영회와 점심식사후 탄광노동자 150여명이 대열에 추가합류.밤12시지나서 광주도착.

1950.7.24새벽 전남도당책 김선우의 호출로 도당간부 모여있는 무등여관으로 감. 유혁운, 광주시당 조직부장 임명.그러나 또 변경,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으로 승격.(조직부장 김병추의 간곡한 요청)

1950.7.25 광주 금남로에 있는 광주지방법원과 고등법원청사를 전남도당 사무실로 정하고 도당조직부 일로 눈코뜰새없이 바빠짐

1950.8월초 「로동신문」과 소련「프라우다」신문 기자들로부터, 광주형무소에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가입자 700여명의 학살사건기사 보게됨.전쟁전선은 낙동강에 멈춘채 국군의 반격 시작됨.광주시내도 미군비행기폭격 잦아지면서 도당 사무실을 구동의 개인집으로 옮김.

1950.8.7 중앙당에서 새로운 사람들 임명되어 내려옴.도당전체 인사이동 시작. 전남도당위원장 김선우→박영발,부위원장 박참봉→김선우,조직부장 김병추→박참봉,도당인민위원회 수매부장 김병추. ⇒이북출신들이 실무자로 거의 선정되면서 남쪽 실정에 어두운점들이 우려됨.



한국전쟁 후 -[전남도당]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
전남도당 조직부장- 박참봉
도당인민위원회수매부장-김병추
조직부부장- 염형기
선전선동부장 -선동기
노동부장- 오금일
간부부장- 정귀석
농림부장- 이방휴
경리부장- 김오동
기요과장-이○균
당증과장-김원배 ※도당 기관지-「전남로동신문」






1950.8.9오전10시 김일성수상 전선시찰왔다가 광주방문-유혁운은 김선우 추천으로 김일성 접대담당.점심식사 후 무등산수박 큰것2개 대접.

1950.8.11즈음 도당 조직위원회 긴급소집 후 이어 도당 전 성원 긴급소집령- 박영발, 김일성수상의 지적 4가지 지시.

①'주권은 인민에게로' 당 기본정책 실천 ②'토지는 밭갈이하는 자에게로'-토지개혁 ③전쟁피해 복구사업부족으로 전선의 인민군 기동력저하 지적. ④남로당 당적 중앙당으로 바꾸지 않는 것 지적-변절자 정화사업 부실

1950.8.12 유혁운 대신, 중앙당 승인으로 김재연이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으로 내려옴.김재연에게 인수인계 도중에 경리장부지출 문제로 다투고 나옴. 박영발 호출-유혁운은,김병진(전 노령지구 유격대제2사령관),황봉옥(전 장흥유치 지구당부책) 과 10월1일 모스크바로 유학결정. 유혁운은 그때까지 노동부의 오금일 비서로 일함.

1950.8.15 유일남(전남도당 여맹조직부장)등3명은 1차로 중앙당학교로 유학감. 유혁운은 오금일과 각 생산직장의 직업동맹을 조직하러감. 방직공장의 약300여명의 여성노동자가 일제히 환영.

1950.8월중순 장성군당위원장 김병억(해방전에 군사간부,유혁운과 동갑친구) 유혁운에게 그의 고모인 김춘옥(장성군여맹위원장)을 소개시켜줌. 유혁운에게 첫 사랑의 설레임 시작.

1950.8.23 수십대의 대편대가 나타나 광주를 불바다로 만듬. 비행기공습 날이갈수록 심해짐. 낙동강전선 한달째 대치중.

1950.8.30 도당세서 유혁운에게 새로운 특수임무-광양군의 주권기관 선거사업과 토지개혁사업 종합검열반원 시킴.

1950.9.1 내무부의 자전거로 달려서 →옥과면당에 들렀다가 조영감 사망소식들음. 경찰과 내통하여 도당부책 일행을 체포당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됨-불합리하다는 죄책감. →곡성군당 들러서 옛동지들 만남→구례구역 도착: 철도직원시절 하숙했던 강남여관에 들름. 잠시 흠모했었던 여관집 딸이 이제 시집가서 아이안고 있는 모습봄.→여관옆집 친구였던 박해석만나 봉덕마을에서 그의 아내 하동댁과 다함께 밤새워 이야기꽃피움.

1950.9.3. 유장영(구례구역 내무서장)으로부터 그의 가족 무사소식듣고 며칠후 11일날 밤에 신성장여관에서 가족과 만날 약속하고 광양으로 감. 광양군당 위원장 이봉옥(백운산특각때 유혁운과 동지)이 반갑게 맞이.

1950.9.4 광양8개면을 돌며 선거사업과 토지개혁사업 감사시작. 각 리·면의 인민위원장 성분검열에는 별문제 없으나, 노동능력에따른 토지 무상분배 원칙에 다양한 문제 있었음.

1950.9.11 일주일에 걸친 검열 다마치고 구례구역으로 옴. 그의 가족와 구례유지들이 다 모여 금의 환양하듯 축하하였으나 달갑지 않은 느낌. 어머니와의 짧은 재회마치고 다시 광주로 귀환.

1950.9.12 박영발의 호출-광양군 검열칭찬 후 또 특별과업 지시. 광산군당 검열과 영산강철교복구사업 감사 임무내림. (당시 그곳의 상태: 쉰넘은 위원장 고봉석의 당사업 무지무능력함, 이북출신 부위원장과 내무서장의 술과 여자에 취해사는 향락적 작태와 근무 안일함, 철교복구현장의 20명 인부들의 게으름으로 엉망인 상태)→유혁운 감사로 파견되어 모든 상태를 광주에 보고한 후 긴급 도조직위원회 소집회에서 광산군위원장에게 엄중 경고내리고, 내무서장 출당처분 후 구속·형사처벌, 부위원장 출당 후 북으로 이송처리함.

1950.9월 중순 유혁운은 광산군당이 정상화될때까지 군당지도 임무받고 새부위원장과 새내무서장을 대동하고 송정리로 감. 다음날 다시 '각시군당위원장회의'참석위해 고봉석과 광주감. 도당에서 무안군당 위원장 정상열(백운산특각의 연락과 근무,기본출신) 만나서 9.15인천상륙작전 소식듣고 근심함. 다음날 각시군당윈원장회의에서 모든 당조직은 단시일내에 지하조직으로 개편하라는 지시내림. 광산으로 간 유혁운은 조직 개편하면서 광산군당위원장 고봉석의 교체 건의서를 도당에 올리고 그는 다시 도당 노동부로 올라옴.

1950.9.27 28일에 열릴 시군당위원장휘의 위해 모임. 구례출신 10여명이 광주여고 근처의 박대수집에 모여서 유혁운이 구해온 백마위스키 한상자에 휘파람을 불면서 빨치산시정노래를 부르며 밤새 쓸쓸한 축제 벌어짐. 이날밤 늦게 '비상소집' 이 울리고 모두에게 후퇴명령 내림. 내무서는 먼저 이 소식이 전달되어 무기 모두다 가지고 먼저 후퇴한 상태였음. 박영발위원장은 극비로 후퇴를 가장하여 지하당 재건을 위해 잠적.- 당시 최고지도자인 김선우 부위원장이 상부지시 전달함- 모든 기관단체의 노약자와 사상성 약한자는 춘천으로 후퇴 시키고 남은 기관원 모두는 무등산이나 백아산으로 후퇴하여 인민군 경비대를 흡후하여 무당부대 확보한뒤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라는 지시 내림.

1950.9.28오전10시경 유혁운 권총 한자루가지고 기관요원 150여명 인솔하여 백아산 수리마을로 후퇴명령.-계림동-산수동-조선대 남쪽편 능선넘어-증심사-무등산 큰재.

1950.9.29오전10시경 백아산 아래 수리마을 도착.각 외곽기관의 하부원까지 모든 동조자들이 수리마을로 모여듬.

※당시, 박영발-지하조직 담당, 김선우-빨치산전투 담당

1950.9.30아침 김선우 지시-구례,광양 등 동부6군출신 기관원 100여명 차출하여 백운산으로, 또 백운산 주변 동지들을 규합하여 백운산 지구당과 백운산 유격대 사령부 조직, 편성 임무내림. (백운산 지구당 책임-정귀석 간부부장. 잭운산유격대 사령관-여수 유몽윤).

유혁운은 동부6군출신 기관원140명,장흥 해안 경비하던 인민군40명과 행진함-국성 죽곡면 남양부락,보성강 건너 동계마을.

1950.10.1 합류한 인민군40명-중좌2명, 소좌2명, 팔로군출신3명을 포함하여 장교14명(-무장군이 부족했던 관계로 함께 있도록 유도). 이날 밤, 마을주민들과 인민군들이 함꼐 어울려 즐겁게 성대한 오락회 염.

1950.10월초 유혁운 백운산 도착, 대원들은 정챙이골에, 그는 광양군당과 선을 대기위해 광양옥룡골로 가서 정귀석,유몽윤과 만나 백운산 지구당 결성과 훈련방법, 월동대책,투쟁방향 계획 세움. 함께 백운산으로 왔던 인민군들은 지리산으로 가버림.

1950.11.11 유혁운은 전남도당으로 향함. 그사이 도당은 화순군 북면 갈경이로 옮김. 중공군 참전 소식으로 모두 들뜨고 밝음. 도당 전면적인 체재 개편함.



[전남도당]
[전남도당 유격대 총사령부]

전남도당 위원장-박영발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인처
전남도당 조직부장- 박참봉
도당인민위원회수매부장-김병추
조직부부장- 염형기
선전선동부장 -선동기
노동부장- 오금일
간부부장- 정귀석
농림부장- 이방휴
경리부장- 김오동
기요과장-이○균
당증과장-김원배

※도당 기관지-「전남로동신문」
사령관 - 김선우 (비서;이복순)
부사령관 -오금일
총3개연대 -1연대, 5연대,7연대
총사령부 출판부장-조용식.
※총사령부-기관지<빨치산>



▶이내 곧, 도당부 전체를 백운산으로 옮길 예정.



1950.11.13 김선우의 적극적인 추천과 박영발의 신뢰로 유혁운은 다시 명령을 받는다. 전남도당과 유격대 총사령부가 6개월간 백운산에서 지낼 1000여명의 식량 보급투쟁 임무받음.

-식량 비축장소 : 곡성 '봉두산'.(이곳은 섬진강을 끼면서 순천 황전면과 월등면, 곡성 죽곡면과 목사동면, 구례읍의 3개군 합동공격외에는 토벌대가 공격해오기 어려운 지형조건임.)

-식량비축방법: 볏 가마니를 한 곳에 50가마 이하씩 저장, 볏가마니를 옆으로 세워 쟁이고 산죽, 새때기풀로 위장함.

-식량수집병력 : 무장50명, 비무장50명 →10명씩 1조, 조별로 비밀지킴.

1950.11.13 마을들판의 추수가 시작됨.

1950.11.18 계획서 검토, 승인 완료. 인원 충원- 식량보급투쟁 부대 명칭 「별동부대」.

밤10시경 '별동부대'는 빨간지폐 (6.25때 한국은행지폐)를 한 짐씩 지고 백아산에서 빠져나감.

1950.11.20 아침, 유혁운은 별동부대와 함께 곡성 봉두산 태안사에 도착 후 지리익히기 교육을 시키고, 식량수집지역을 순회한 후 사업시작.

-당시 곡성의 상황: 유엔군은 전방으로 가고 겨우 경찰병력만 남은 상태. 봉두산 주변 8개면을 샅샅이 돌아 2500가마니 쌀을 모아서, 백아산 백운산 방향으로 소달구지에 실어 보냈다가 야심한 밤에 모두 다시 봉두산에 비장함.

1950.11.25 '별동대'는 이렇게 백운산 전남도당의 동계 식량을 비장하고 도당으로 모두 무사히 돌아옴. 이 식량으로 ~1951년까지 먹음.

1950.11.23 박영발의 호출(부위원장 김인철.김선우 동석)-유혁운 곡성군당위원장 임무맡음. 곧장 곡성 솔티재 넘어 염곡마을의 곡성군당 거점 도착. 곡성군부위원장 전해순, 유격대장 강상원과 대원 50여명과 위원장 조영길(구례 빈농출신, 구빨치)의 송별연 열고 밤12시 넘어 떠나감.



한국전쟁 중(50.11.23~) -[곡성군당]

곡성군당 위원장- 조영길→유혁운 *곡성군당유격대장- 강상원
곡성군당 부위원장- 전해순
곡성군당 조직부장- 한일현
선전부장 -김윤옥


1950.11.24오전7시 염곡마을 앞 들판에 300여명의 성원이 도열한 가운데 유혁운 취임. 첫아침밥상에 소갈비 보고 버럭! 평조직원과 동등하게 요구함.. 간부회의 소집-그동안의 반동 숙청 문제, 현물세 징수 문제, 조직사업문제 파악, 그가 직접11개 읍면을 돌며 실정파악.

1950.11.28밤 간부회의 소집 → 이후 사업방향 제시 ⑴적은 중립으로,중립은 우군으로, 많은 지하조직개편,입산자도 잘 검토후 하산시키기 ⑵현물세 징수 중지-월동식량 전량 현금구매 ⑶산악생활대비 철저한 월동준비사업 ⑷1개마을1세포운동-한마을에 한사람이상 정보원확보 ⑸군당 인사개편 단행.

1950.11.29새벽5시 유혁운이 직접 유격대 상황 모두 둘러본후 급실망.전간부 비상소집-보초근무해이성원인지적, 대책지시사항내림-①조직부장 한일현-간부부사업 겸하면서,간부부터말단까지 조직관리철저히,사상과 동향 정확히 보고할 것 ②선전부장 김윤옥-지속적 당 정치교양사업 실시, 전 성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시키기 ③각부 부부장 이하 유격대 소대장이하-전원 보초임무 수행, 간부들은 30분마다 보초지도 검열하기 ④각 부서별로 자아비판회 개회-오늘의 사태 토론하기 ⑤매일 간부회의 개최-그날그날의 사업점검.

이날 아침에, 선전부장 김윤옥 호출 → 학습교재작성,매일2시간씩 학습교양하도록 지시.

▶김윤옥-함경북도출신, 어부였다가 해방후 당에 입당, 전후 중앙당에서 파견나옴.40대

아침식사 후 염곡마을 지형 탐색조사-전시대비

1950.12 경찰들이 염곡마을 해방구까지 들이닥치고, 주민들을 적색분자 색출위해 끌고가 위협.-곡성 동악산 지구, 죽곡 목사동지구 설치, 곡성-옥과의 오랜 지역감정을 고려한 인사이동 단행. 유혁운은 중앙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양병하' 만남 → 문화부 대장으로 승진

1950.12월말 동계 토벌작전 개시됨. -총300여명의 곡성군당 성원들은 해방구를 잃고 백아산으로 향한다. 백아산 기슭 화순 방석포마을 → 보름재넘어 평지마을에 군당을 잡고,2km떨어진 양지마을에 유격대 자리잡음 (당시, 이미 북쪽1km 강의동마을에 540부대, 남쪽 갈경이마을에 총사 자리함), 평지마을에서 오락회열림, 화순탄광 때문인지 환순마을사람들 매우 우호적임, 한동안 편안한 시간을 보내게 됨.

1951.2월중순 유혁운은 전남도당에 들렀다가 노령지구사령관으로 가 있는 김병억을 만남. 1950년 여름에 장성에서 김병억의 고모인 김춘옥을 처음 소개받고서 서로 사랑에 빠졌고 그동안 서로 편지로 왕래함. 그런데 그의 고모 김춘옥이 지금 장성에서 처지가 힘드니 유혁운이 있는 곡성으로 그녀를 추천하도록 김병억은 유혁운을 도당으로 등떠밈. 전남도당 여맹부위원장 임복현 이 김춘옥을 곡성으로 배치시킴.

▶임복현-시댁이 구례. 경찰이 된 남편과 이혼 후 원북, 강동정치학원수료 후 내려옴.

▶김춘옥 - 장성에서 술도가를 운영했던 유명한 양반가문의 딸. 50년 여름에 유혁운을 처음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져 서신왕래 하게됨. 1950년 9.28후퇴 때 오빠 두명과 함께 입산. 집안이 풍비박산 남. 만2년의 산생활 후 1952년8월19일에 유혁운의 지하조직 사업을 도와주는 역할을 위해 하산명령받고, 둘이 내려갔다가 둘다 체포됨. 화순경찰서에서 자수 후 풀려남. 그사이 형제자매들 명문집으로 출가함. 모두 공직자. 외갓집도 부자. 부모는 전주에, 둘째언니 광주에 삼. 그녀는 유혁운을 계속 면회하러 오다가 1955년봄을 마지막으로 시집감.



1951.3.20일경오전11시 백아산상공에 미군비행기3대 저공비행시작. 골짜기마다 샅샅이 뒤지고 30여분후 돌아감. 이에 공세 대비하여 산으로 옮길 태세 갖춤.

1951.3.22아침 전남도당지도원 도착→미군「재귀열」세균살포 소식전해짐.

당일에 군당기관 환자4명발생. 급속히 확산되어 다음날 700여명 환자발생. 이 당시, 화순.백아산 주변 입산자들은 투쟁인민이 1000여명 - 주로 백아산 상봉아래 원봉고랑에 (지형이 좋고 평평함) 모여 있었고, 당기관의 유격대는 매봉 고지나 삼각고지에 아지트 마련. 재귀열 환자 700여명을 백아산 원봉 고랑에 옮겨둠.

1951.3.23밤 24일부터 대대적인 백아산 토벌작전 소식. 총사 긴급작전 지시→비무장단체는 밤12시 이내 백아산 빠져나가고, 곡성군 유격대와 540부대는 방어전 참여. 유혁운은 곡성군 기관 60명씩 3개조 나눠(전해순 부위원장조, 한일현 조직부장조, 유혁운 군당위원장조)떠남. 권총1개카빈2자루로 조130여명을 이끌고 통명산으로 빠져나옴. 주능선을 피해서 보성강이 보이는 야산발치에 잠복.

1951.3.24새벽6시 백아산 폭격소리 온종일 요란, 온 능선이 불바다가 됨. 오후1시에 잠잠해짐. 오후 5시경에 유혁운과 일행들은 야산에서 능선비탈 돌아 통명산 삼각지 도착함. 유혁운 일행은 총사 7연대의 2명과 박대수 사령관을 만나게되는데 불행한 소식 전해짐 - 총사7연대(박대수)가 전날에 백아산작전에 참가했다가 오늘 통명산 삼각지쪽으로 오는길에 민간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총사7연대의 참모장에게 자꾸 자수를 권고해서 총살시켜버렸다는 것.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민간인들은 곡성기관의 동지들이었다는 것. 유혁운 번개같은 분노 치밈. 총사 사령관 박대수 책임 추궁. 돌무덤 만들고 묵념올림.

이날밤, 총사 7연대 곡성읍으로 보금투쟁감→ 이로인해 통명산,봉두산으로 보복침입 위험으로 곡성군당 자리옮김. 삼기면으로 간 정찰대와 토벌대가 교티재(통명산~동악산 교차지점)에서 광주로 빠져나간다는 정보수집, 이에 차일봉 방향으로 옮김.

-평지마을 잿더미 됨. 백아산 원봉 고랑에 있던 재귀열 환자 700여명 토벌대가 모두 사살시킴.

-곡성군당 환자트는 의무요원 심복순이 혼자 애쓰는 것을 발견. 간호원 모두 재귀열병. 인력 충원 지시내림.

1951.3.25새벽4시 유혁운 도당 긴급회의 다녀온 후 재귀열병 걸림. 석곡지서 면사무소에서 구한 '파마산'이라는 주사약 맞고 10시간 동안 혼수상태로 쓰러짐. 밤8시에서야 일어남. 재귀열 후유증으로 급격한 식탐증세에 고통스러워함.

1951.4.15일경 총사 의무과장 박충근에게 진찰맏음. 거의 완치됨. 이정례비서가 완치소식을 전해서 박영발위원장이 흐뭇한 미소 지어보임.

▶ 1950.12월 ~51년.봄까지 도,군당들은 백아산에 모여있었음.

1951.5.20 곡성군당 모두 통명산 말골 골짜기로 다시 돌아옴. 큰 전투없이 봄이 다 지나감.

1951.여름 소련, UN에서 한국전 휴전제의 소식 들려옴. 백전백승 남부군의 화려한 소문남. 유혁운과 김춘옥 연애 소문도 군당에 다 퍼짐→전남도당 총사에 들른날 김선우 총사령관에게 직접 고백함. 김춘옥은 노령지구 여맹지도원으로 배치됨. 연락원 통해서 편지 주고받음.

1951.7월 중순 곡성군당 유격대는 3일간 원거리 보급투쟁 나간 후 어느날 유혁운은 새벽2시에 불길한 징조의 꿈을 꿈.

1951.7.23새벽4시 꿈꾼 직후 당장 군당트를 옮기기로 지시내림. 전체대열 출발 10분후 적의 총소리 500m거리내에서 터짐. 행군도중에 군당 유격대 합류, 통점재쪽에서 300~400명 국군 공격해옴. 강상원 사령관이 전투 제안→고지에 6명 배치. 나머지 모두 전투투입. 대대적인 승리거둠.

(곡성군당의 마지막이 될수도 있었던 이날의 사건을 이후 1969년도 4.19혁명 후 광주교도소에서 유혁운은 51년 이날 당시의 곡성 경찰서장이었던 '구서칠'을 만나게되는데, 꿈 덕분에 살아난 당시의 얘기가 두고두고 회자된다)

51년 여름, 유격대장 강상원(당시25세)은 소소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오던 날, 태안사에서 경찰에세 총살된다.

1951.8월초 곡성군 농맹위원장 김재봉이 유혁운 면담신청- 수도사단 정찰대 상사로 있는 제자(박상용)의 정보에 의하면 수도사단이 지리산 토벌작전을 세우고 있으며 이미 정찰을 했다고 함. 이에 도당과 총사에 정보를 전달하고, 긴급 각시군당회의에서 유혁운엑 휴전회담 전망과 대공세에 대한 대책 연구 지시내림.

-그날밤, 광주지구당 긴급보고→ 곡성으로 수많은 병력 이동 중.

-다음날 새벽4시, 삼기쪽 차일봉에서 총성시작, 얼마 후 매봉과 삼각고지 제외한 전지역 토벌대가 장악. 오후12시까지 교체전투 계속.

-당시, 백아산에 도당, 총사, 540부대, 곡성군당, 광산군당 등 모여있었고, 비무장 대원 1000여명 넘는 상태였음. 삼각고지~갈경이로 빠지는 속능선에 비무장 요원 대피중.

-오후1시쯤. 비행기 3대가 네이팜탄 투하. 고지의 대원 전원 몰살됨. 죽을 각오로 다시 총격전, 얼마후 토벌대 물러감. 동지들의 시체를 끌어모아 놓고 어열함. 시체 매장후 눈물의 저녁식사. 헬쑥하게 지쳐버린 박영발은 유혁운에게 겨울 대공세 대책 연구를 물음.



▶ 【대책 1.】 기관유지, 정비강화 필요- 기관인원 1/3로 감축. 전성원을 3등급으로 분류하기.

- A등급: 정예부대, 막스레닌주의 완전무장된 기본출신

→최대한의 기동력 발휘, 적의 시선을 산으로 집중시키기.1인당 1개씩 트 소유. 기동성 유지

- B등급: 막스레닌주의 무장, 인텔리,소시민, 사회적 생활기반있는자

→ 한두달 특별교육 후 각자 임무를 주어 위장자수나 지하로 잠입

- C등급: 의식화 덜되고 약한 당성, 병약한 사람들 → 투항해서 하산.

【대책 2. 】 겨울용 식량 개인단위로 철저히 확보, 비장하기.

【대책 3. 】각 면당도 2~3명 기관원만 두고 전원 민가침투하여 겨울나기.



1951.8.11 총사7연대 박대수연대장 평당원으로 강등. 조용식이 연대장으로 부임. 7연대의 요청으로 유혁운과 곡성군당은 통명산, 봉두산, 동악산에서 보급투쟁 협동 → 곡성군당과 7연대는 남원군 금지면을 보급투쟁 대상지로 선정.

1951.8.14새벽 보급투쟁 대성공으로 돌아옴. 황소 한마리로 함께. 이날밤 전군적으로 8.15해방 기념투쟁 시작.

1951.8.15 8.15기념행사. 온종일 노래, 춤, 오락회 진행. 유혁운 다음날부터 박영발에게 보고했던 월동 대책 실행시작.

1951.8월하순 도당 긴급호출- 박영발위원장이 이현상 만나기위해 지리산으로 가야하므로 유혁운에게 통명산에 비트와 십여명의 식량, 지리산 루트 정찰 지시. 일주일 후 완료.- 박영발 일행 출발 이틀후 섬진강이 보이는 곰방산 중턱 비트 도착. 박영발의 몸이 안좋아 2일간 머물게 됨. 박영발이 그에게 원동 대책 수정에 대해 지시함 → C급성원이 전체의 1/2이라서 투항, 자수는 사기저하위험과 투쟁의 정당성 부정 우려로 C급을 지리산으로 파송시켜 겨울나기로 했으며, 2000여명의 1일분 식량과 안전책임 지시.

1951.9.1 지리산 파송시작..7연대와 협동지시. - 유혁운은 박영발을 구례군당까지 안내후 다시 돌아와 지리산 파송작전 준비.

1951.9.3~20일까지 통명산은 파송인파로 북적거림.

151.9.10일경 7연대는 총사의 호출로 지리산으로 떠남.

1951.9.15일 김선우사령관의 긴급호출로 유혁운총사로 감-지리산~백아산 사이를 해방구로 만들기 위해 곡성군 해방 계획. 「곡성군해방작전」 지시- 적들이 전방의 전투부대까지 소환해서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중인 시기에 너무 무모한 작전이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어쩔수 없이 실천으로 옮김.



【곡성군 해방작전 투쟁위원회 사업내용】

①총사1개연대 1개대대와 곡성경찰서 4Km이내 모든 지형 조물 파악
②2000명의 이틀간 식량확보
③보급투쟁 외 일체 투쟁 중지




1951.9.26 남원군 금지면~대강면 사이의 야산인 고리봉에 하루 잠복.
1951.9.27밤8시경 어느 큰 마을에 도착, 100여명이 쌀을 짊어지고 황소 2마리와 함께 되로로 돌아감.

1951.9.29새벽 남부군400여명, 총사7연대 100명, 차일평정치위원, 이진범 제1부사령이 통명산으로 옴. 말골 골짜기가 왁짜지껄해짐. 그 속에서 유혁운은 김흥복(81사단장)을 만남 → 박종하의 '8월중순 가회전투'에서의 전사소식을 들음. 그리고 양봉순(부대 대대장)과 박정애(소대장)도 만남. 2년여의 세월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그들의 모습보며 가슴이 찡해짐. 점심식사 후 작전회의 소집되고 거기서 논의된 결정사항들



곡성군 해방작전


기관명칭 : <9.28 1주년 복수투쟁위원회>
위원장- 곡성군당위원장 유혁운
부위원장 - 전남도당 유격대 부사령관 오금일,
남부군 정치위원 차일평
위원-이진범. 김흥복. 전해순. 문춘. 남태중



공격지- 곡성경찰서, 오곡지서, 곡성역, 땅고개경찰 토치카3개소

차단로- 곡성과 남원 금지 사이에서 남전사. 서전사 차단.
교티재에서 광주, 순천 방향 차단.
구례와 순천의 전라선 철도,국도 차단



참여부대 - 남부군81사단, 92사단, 전남도당 유격대, 곡성유격대
전투개시 시간- 1951.9.30일 새벽1시까지 니내부근 접근, 오후11시부터 개시






1951.9.29밤9시~ 사기진작을 위해 오락회열린 후 전 부대 출정, 곡성읍 부근까지 대치.

1951.10.1새벽0:30 명산 저수지 앞 150고지 도착. → 오후1시10분, 경찰서 정문 앞쪽에서 총소리 시작, 작전 개시. → 오후4시경 , 토벌군의 끝없는 병력증가 속에 후퇴지시. 명산저수지 지나 쌍구마을에 도착하니 퇴각한 총사 보급부대와 군당성원은 벌써 오락회 열림. 지리에 능한 몇 사람을 81사단에 배속시켜 명산재 양쪽 고지를 장악하여 적을 경계함. 조용해지고 날이 서서히 어두워짐. → 밤11시경 전병력 집결. 결과보고. - 전사자 19명, 부상자 33명, 선이 끊긴 사람10여명, 적 사살 17명. 무기와 실탄 약간 확보. 보급투쟁한 성과밖에, 결코 승리한 싸움은 아니었음. 이날 밤 중으로 총사병력 백아산으로 돌아감.

1951.10.2 통명산에서 종일토록 남은 곡성군기관과 남부군은 방어전 벌림. 지리산 방면인 동쪽으로 군병력이 계속 증강됨- 섬진강에서 남부군을 차단하여 대토벌작전을 개시하려는 속셈을 알아차리고, 모두 백아산으로 빠져서 총사와 합류.

1951.10.3오전7시 곡성,화순지역의 국방군,경찰이 합세하여 대응전, 빨치산들의 방어전이 만만치않자 섬진강 병력까지 옮겨옴→이에, 남부군만 곧장 통명산 거처 섬진강 건너 구례 서산까지 밀어붙여 지리산으로 들어감. 국군병력은 결국 닭쫓던 개꼴됨.

1951.10.5 전투는 소강되고, 모든 기관 접선됨→곡성 해방작전은 실패, 군사기위축. 마을 인민들의 반응 더 나빠짐.

1951.10월말 악전고투하며 10월말까지 파송작전 완료. 곡성군당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조직 재건을 위한 2진을 구성하여 지리산으로 보냄. 곡성군당에 남은 인원은 유격대 20명, 군당47명, 각면당25명 등 총92명

1951.11.5일경 곡성 해방전투에서 부상당해서 곡성군당 환자트에 있었던 양봉순은, 다 완치되었던 이날, 비무장 대원만 대기하고 있던 차에 경찰에게 포위당함. 이때 양봉순이 권총을 낚아채어 선두에 서서 이끌어서, 고지점령 후 3명 사살하고 M1총 3정과 실탄을 노획하여 위기를 넘김.



▶1951.11월말~1952.2월까지 수도사단의 제1차 동계 대공세 시작 - 전남도당 역사상 가장 처참히 당함.

→전남도당은 200여명을 지리산으로 파송한 뒤에도 1000여명이 남았으나 동계대공세 후 300면만 남음. 여수.순천,담양 등 몇개 군은 완전 전멸한다.



1951.11.28 국방군 토벌대는 통명산 고지에 호를 파서 천막을 치고 장기 주둔 태세로 동계공세 시작. 이에 각 면당,군당의 각 부처들는 부별로 잠복, 유격대는 강상원 후임인 전해순 지휘하에 봉두산, 통명산, 동악산, 삼산, 백아산 5개 산을 도며 게릴라전으로 교란작전 지시. 유혁운은 10명만 인솔 → 봉두산으로 빠짐(봉두산은 겹겹 능선사이의 골짜기가 많다.) 1차공세 10일동안은 잘 버팀.

1951.12.15 비상선을 통해서 전 군당이 모임-희생자0명. 군당전원 봉두산으로 옮기기로 함. 100여명은 죽곡면 상한마을 바로 앞에 트를 짓고 며칠 묵음. 도당 연락과 한동무 통해 유혁운은 김춘옥의 레뽀 받음.

1951.12.20일경 통명산 대대적인 수색작전 실시. 통명산 주변이 고향인 기요과장 전영철, 고성기를 파견. 봉두산 트에서 이동 →얼마후 바로 그 트에서 총성울림 →적들이 봉두산 주능선만 타고 사라짐. 퍼붓는 눈속에 잠복하다가 해가져서 텐트치고 잠을 청함.

1951.12.26일경 통명산, 동악산 전투 불빛 사라지고, 토벌대들은 곡성에서 남원 쪽으로 옮겨감. 유혁운과 동지들은 트에서 나와 곰방산 능선을 걸어 통명산 주능성으로 행군. 걷는 중에 국방군 한 병사가 편지와 함께 포탄,수류탄,의복,군화,양말,기관총 실탄,내의1벌,담배3갑을 상자에 넣은채 두고간 것을 발견→곡성군당은 상당수 무장 확보할 수 있게됨.

1952.1.15 흩어진 인원이 다모임- 전해순, 김윤옥 전사.

1952.2.4(설날) 토벌대 다시 통명산, 봉두산 수색시작.→이에 곡성군당원들과 구례 반내골로 향함. 승주군의 한 마을에서 설 음식들을 후하게 구하고 소1마리를 끌고옴.

1952.2.6 새벽에 반내골 도착. 아침식사 넉넉히 한뒤 백운산 삼학골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 비트 마련하여 며칠간 쉬면서 오락회도 하고 사기를 회복.

1952.2.14오전10시쯤 반내골에서 총성 요란. 고지 점령위해 하얀 눈밭을 달음박질하여 내달려 고지 도착. 뒤쪽 계족산 상봉에도, 위쪽 능선에도 모두 토벌대가 장악. 아래쪽의 큰바위를 미끄러져 내려가서 뛰어내리다가 유혁운과 곡성군 여맹위원장 박정덕이 발목을 삠. 그는 접골하고 냉찜질하였고 그녀는 일단 숨겨 놓음. 오후5시가 지나면서 총소리 잠잠해짐. 어제의 삼학골 깊은곳의 비트로 돌아감.

1952.2.15새벽1시 봉두산의 토벌대가 빠졌다는 소식에, 박정덕을 바위굴 속에 숨기고 1주일분 식량과 물을 놓고 일단 반내골을 떠나옴. 이날 저녁 8시경, 유혁운은 문척 구성마을에 사는 고모할머니 댁으로가서 식량을 구아혀, 섬진강가를 타고 죽마리를 지나 동해마을에 도착. 거기서 유혁운은 민청 위원장 한기현을 만나게 되고 그의 제안으로 무장부대6명을 주막집 근처에 잠복시킨후 주막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주막안에서 나오던 경찰과 마주침. 총격전에 모두 사살되고 단 1명의 경찰만 총상을 입고 도망감.

▶한기현 : 곡성출신.3형제 모두 중학교를 마친 인텔리 중 막내. 유혁운이 특별히 아끼던 동지였으며,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



1952.2월중순 그 사이 통명산은 운동장처럼 반질반질해짐. 전화선이 온 길에 널려있고 폐허가 됨. 곡성군당 동지들30여명 희생. 총 63명 남음.

1952.2.29 전남도당과 선이 닿음→ 유혁운의 담당 임무 변경됨 .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 됨.유혁운은 만 1년 3개월간의 곡성 생활을 마치고 통명산을 벗어나 백운산으로 감.

1952.3월초 동계대공세 끝난후 보름간 각군의 생존자 파악.→ 광양76명,곡성63명, 구례40명, 순천12명, 여수3명, 고흥13명, 승주3명 생존함. 전남도당부는 도당의 기동성을 확대하기위해 도당을 동부-서부로 개편함. 조직부에 부부장 2명씩 선정하여 동·서부에 각각 배치함.

①동부 : 박영발 책임 .(6개군 구례, 광양, 여수. 순천, 고흥, 곡성 지역), 백운산에 비트를 둠.

②서부 : 김선우 책임. 백아산에 비트를 둠.



1952.3월중순 유혁운은 서부 전남 지도부가 있는 백아산에 피해상황 파악하러 감. 김선우 만남 (곡성해방전투 이후 첫 만남) . 총사도 피해규모가 큼. 400여명이던 부대가 70~80명 생존함. 유혁운은 김춘옥이 곡성군당에 와있다는 소식들음. → 유혁운은 곧바로 곡성군당으로 달려가서 김춘옥을 만남. 우여곡절의 죽을 고생으로 많이 거칠어진 모습에 맘이 아픔.

김춘옥은 그동안, 노령지구 가마골에서 수도사단의 공세로 포위되어 분산되는 바람에 혼자되었고, 보름째 꿂으면서 그녀는 유혁운이 있는 곡성땅에서 죽기위해서 걷고 또 걷는데, 백아산 수산재에서 곡성가는 길에서 쓰러졌고 마침 전남도당 총사에 발견되어서 살아나게됨.

1952.3월중순이후 며칠후 유혁운은 혼자 승주군 주암면 광천리의 친척집으로 정보를 캐내기위해서 감. 박노인으로 부터 완전히 돌아서버린 인민들의 상태 소식만 듣고 옴.

1952.3월말경 유혁운은 동부전남 지도부가 있는 백운산으로 복귀 → 간부회의에서 빨치산에대한 인민들의 부정적인 반응얘기 듣고 심각하게 느낌.- 사업방향 고민하게됨.



▶당시, 전남도당의 동부와 서부

전남도당 동부 지도부
전남도당 서부 지도부
위원장 : 박영발
부위원장 : 박갑출
조직부장 : 염형기
조직부부장 : 유혁운
선전부장 : 유운형



1952.4.10일 경 곡성 봉두산의 도당 연락과 분트가 적의 기습으로 전멸됨. - 동·서부 연락루트 차단. 유혁운에게 새로운 연락루트 확보 지시.

1952.4.16 진달래꽃 필무렵이 가장 고통스러운 춘궁기. 유혁운은 대원7명과 황전면 소재지와 가까운 어느집에서 한달 먹을 식량 도둑질하여 봉두산으로 감. 1주일간 온 산을 헤집고 나닌 후 백운산. 백아산을 연결하는 루트를 찾은 다음 연락선 제1선, 제2선 확보 후 백운산으로 돌아옴.

1952.4.25일경 박영발의 지시로 유혁운은, 봉두산 연락과 분트를 도당 조직부 분트로 겸하여 봉두산의 지하조직 사업을 맡음. 조직부원으로 차출한 2명과 함께 그는 단촐한 봉두산 분트생활 시작.

지하조직사업 착수→ 승주군 황전면 황혁주. 좌익활동을 잠시한 후 고향에서 주막집 차림. 반갑게 맞이하며 마을 입구 '박씨집'을 소개 → 외부 소식통과 물자 확보하는 정기적인 정보선 역할 해줌.

이 무렵, 도당기관지 『로동신문』이 종이가 떨어져 발행 못하고 있었음- 이에 유혁운은 대원2명과 오곡면 용정리 한지공장 잠입, 한지2동(약4000장)을 구해옴.

1952.5월말 전남도당의 식량문제 심각 →유혁운 보급투쟁 임무 맡음. 남태중 부대와 협의. 도당간부들은 제외하고 도당 성원 전부 끼니 거른채 강행군하여 새벽녘 봉두산 도착. 봉두산 연락과 분트에 비축해놓은 쌀10되쯤으로 생쌀 나눠 씹으며, 삼산에 도착. 모후산을 서쪽에 두고 삼산 능선에서 '승주군 주암들판'(보성강을 끼고있는 부유한 촌)을 바라봄. 빨치산이 한번도 들어가보지않은 지역이라 마을주민들은 매우 호의적. 20분내에 마을에서 보급투쟁을 완료하고 다시 행군함. 다음날 저녁에 전남도당 성원모두 백운산 도당에 도착. 그들이 내려놓은10가마니가 넘는 쌀을 보고 부위원장 박갑출과 조직부장 염형기가 유혁운을 얼싸안고 기뻐함. 박영발도 큰 칭찬과 신뢰를 보이면서, 이에 봉두산 연락분트의 지하조직 관리에 정성 쏟으라고 함. 박영발은 그에게 지폐뭉치를 주며 총사에 필요한 약품을 구입하도록 지시함. 유혁운은 지하조직원 대도시로 보내서 페니실린, 니라마이트, 머규로크롬, 붕대, 솜, 주사기 등 다량을 구입해옴.

1952.6월 도당에서 고철이 유혁운을 찾아와서 앞으로의 활동방향, 가정환경, 친척관계를 구체적으로 묻고 돌아감.

▶고철 : 본명 이근수. 이북 출신. 이북에서 정보관계일을 함. 한국전쟁때 광주서 전남도당 보위부장 역임. 1953년9월 섬진강에서 사망.



1952.6월중순 백운산 도당의 박영발 위원장의 호출로 유혁운 달려감. - 고철이 지하사업 담당하게됨. 유혁운은 “지하침투 제1호”로 결정됨.

1952.7.20 유혁운은 지하조직 사업 동지로 '김춘옥'을 추천. 그녀도 동의함. 이후, 김춘옥의 위장자수를 도와줄, 화순의 조노인(호- 야포)이 화순서장을 데리고 8월19일 오후12시에 유혁운의 외숙인 '고재선'의 집으로 오기로 정함.

1952.8.1 김춘옥은 봉두산 분트로 배치됨. 야포노인을 통해 광주에 있는 그녀의 둘째 언니가 그녀가 자수할때 대책을 해주기로함

1952.8.8 유혁운은 김춘옥과 연락원1명과 백운산 자락 반내골에 와서 대기함. 거기서 유혁운은 어머니를 만남. 50년8월이후 처음으로 만남. 그리고 유혁운은 안전한 아지트에서 고철에게 지하사업 교육을 받음. 지하 잠입할 경우 비상연락망 체계9*6, 제1선- 봉두산 분트의 박씨집. 제2선- 문척의 유혁운 친척집. 제3선- 구례구역에서 순천 쪽으로 500m지점에 있는 철교밑 천정에 레포를 붙히기로 함.

1952.8.11 유혁운이 문척의 고모할머니집으로 보급투쟁가서 큰 수박 4덩이를 구함. 월평~금평 사60 큰길로해서 반내골 아지트로 복귀. 큰길에서 총맨 사람 두명과 대화도 나눔. 그중 친구 김정식도 있었음.

1952.8.18오후5시 유혁운과 김춘옥은 반내골 아지트에서 출발. 가는 길에 폭우가 쏟아져 논에 홍수가 나고 강도 불어나서 함께 도강함.

1952.8.19새벽5시경 외숙 고재선집에 도착. 유혁운은 그녀를 두고 빠져나가야 했으나 날이 완전히 밝아버려서 고민하던 중에 막골에서 잠복하던 경찰들이 철수하다가 고재선집에 들림. 유혁운은 안방에 숨음. 고재선이 그들에게 해장국 내어줌. 원래는 12시에 경찰들이 김춘옥을 데려간 후 밤이 되면 유혁운은 떠나기로 외숙이랑 입을 맞췄으나, 외숙이 약속을 어기고 그를 공개해버림. 외숙은 김춘옥과 같이 자수시켜서 목숨을 건지게 하기위해서였음. 낮12시가되자 고재선은 야포노인과 화순경찰서장과 유혁운의 친구인 신홍고와 함꼐 집으로 옴. 모두 발각됨. 신홍고는 친구였던 김병추-전남도당 조직부장의 소식을 위해 달려옴.



▶김병추는 9.28후 총사 참모장을 하다가 지도사업차 장흥 유치에 나가서 전사함. 신홍고와 김병추는 경찰교습소동기. 구례경찰서의 경무계에서 함께 근무하였는데, 6.25당시 신홍고가 순천 내무서에 수감되었을때 김병추가 앞으로 경찰짓 하지말라며 신홍고를 몰래 풀어줌.



결국, 유혁운은 김춘옥과 함께 발각되어 위장자수를 하게됨. 그것은 유혁운이 결코 원하던 길이 아니었으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그렇게 흘러가게 됨.유혁운은 김춘옥을 결혼할사이라고 말함. 그리고 얼마간 화순경찰서에 머물게 됨. 얼마후 김춘옥은 언니를 따라 전주의 부모님집으로 감.



1952.10.10 고철이 조노인에게 쪽지를 건냈고, 야포 조노인이 유혁운을 찾아와서 줌. 그는 바로 답장을 보냈고, 위장자수 사실을 알리고 이제 지하사업을 제1선을 통해 연락하겠다는 내용을 보냄. 어느덧 시간이 무료하게 지나가고 11월이 됨.

1952.11월 유혁운은 구례에 다니러 감. 외갓댁의 어머니와 막내동생을 만난 후에 유혁운은 비상연락망 제1선을 봉두산 분트아래 황전면의 박씨를 만나서 구체적인 자신의 처지를 도당에 전달함.

며칠후, 박씨가 찾아와 김영재(6.25중에 광주시 인민위원장 역임) 동무의 도민증 위조를 부탁함. 친구 신홍고가 대신 만들어 줌.

▶1952년말. 전남도 사찰과장실에 적혀있던 도표에 의하면, 전남전지역 생존 빨치 약570명. 유혁운은 광주시 구동에 공작성냥화학공장에 취직함. 사장이 예전에 김춘옥 언니집의 서기였던 사람. 유혁운은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사장조카인 추병태와 친하게 지냄. 추병태는 순천국민학교 교사. 여순가건시 적극 가담 후 무기징역. 마표형무소수감. 6.25때 나옴.



1953.1월 유혁운은 박씨와 정기적으로 만남. 그는 김춘옥의 부모님께 인사를 했으나 모두 냉담. 김춘옥은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부모 아래에서 점점 변해감. 유혁운은 혼자 자립할 길을 찾으려고 애씀. 경찰감시가 매우 심해짐.

1953.3월말 감시경찰 박종록(도경 형사계장)이 말하기를, 지하사업 나온 김용원과 유운형을 임복현(女)이 고문과 시달림 끝에 다 고백해버림. 유혁운에 대한 감시 날로 더 심해져 감.

1953.3월말 박씨가 추병태를 통해 유혁운에게 레포 건네줌. 레포는 약도그림과 성냥공장사장 김호중에게 전하는 편지였음. 그는 사장에게 레포를 전한 후 3일후에 다시 만나서 사장으로 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음. 그는 도당으로 보냄. 신홍고가 서울 철도경찰대 후생과에 취직한 소식을 들음. 유혁운은 53년 여름을 성냥공장에서 일만하면서 보냄.

1953.7.27 빨치산 문제는 완전히 제외된 채로 남북 휴전협정이 체결됨. 날로 더 심해진 경찰의 협박속에 연락선도 끊겨서, 유혁운은 광주를 탈출하기로 함. 당시 유혁운은 자수자이자 제2국민병 기피자 신분이었는데, 광주 전역에 국민병 기피자 색출이 실시되고 있었음. 옆집의 김문호(헌병상사)의 도움으로 대전에 도착함. → 김춘옥이 마련한 '한강도강증'으로 유혁운은 서울에 도착하여 서부역 근처에 병참부대 입고계에 취직함.(5개사단 부식공급하는 부서)

1953.9월초. 유혁운은 신홍고 만남. 그는 10월초에 부산 후생주임으로 발령받아 내려감. 일본가는 루트 확보하면 신홍고가 그에게 편지 보내주기로 약속함. 서울도 군대기피자 수색임검 실시되었고, 부대가 속초로 이전하여 그는 여관방 신세가 됨.

1953.10.6 신홍고의 편지 도착. 11월6일을 기해 철도경찰대 폐지 정보알려줌. 그는10월15일까지 구례거쳐서 부산에 도착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김춘옥을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향함.

1953.10.7 대전의 김춘옥집에 감.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김춘옥에게 유혁운은 실망하였고 마지막을 예감하면서 헤어짐. → 구례에 도착후 제1선인 박씨와 연락 시도. 그러나 봉두산 분트책 김오동이 토벌대 203부대 기습으로 피살되어서 연락선이 파괴됨. → 그는 제2선 문척면의 친척집에 도착. 다행이 김선우의 지시문3통을 받음. 레포를 받으면 도당으로 들러라는 내용이었음.



▶유혁운이 떠나있는 동안 전남도당의 유격대는 전체가 70여명으로 줄었고 남태중사령관이 53년 여름공세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면서 뿔뿔이 흩어짐. 그리고 옛날 조용식이 7연대장을 할때 그의 연락병이던 소년 인민군 출신 김병극이 백운산부대라 하여 잔류인원 30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1953년 가을 유혁운은 다시 도당의 연락을 다시 기다리고 있는데, 구례군 여맹위원장을 하다가 자수하여 지하조직 활동을 하고 있는 조말순이 유혁운을 찾아옴. 도당과의 연락선이 복잡해서 좀더 기다리라는 말이었음. 그녀는 권상수를 만나서 자신의 위장자수를 얘기함. (권상수, 양경한, 오재원 3명이 활동중.)김선우로부터 마지막 연락옴 → 양경한 의심. 그 세사람과 연락 끊고 떠나라는 지시. 유혁운이 구례를 떠나려던 밤10시 열차를 기다리던 중, 권상수의 배신으로 유혁운은 경찰에게 잡혀 구례경찰서 끌려감.

1954.1월초 유혁운은 순천검찰청으로 송치됨. 순천 검찰 지청장 김왕규 검사와 신경전 벌어짐. 사형 언도

1954.1월 박영발, 뱀사골 반야봉아래 비트에서 권총 자결(수정=54년2월21일)

1954.2.27 김선우, 백운산 비트에 숨어있다가 조직부부장 박춘석의 배신으로 경찰과 대치하다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 자폭.(수정=54년4월5일)

1954 김선우자폭직후 오금일, 통명산에서 부상당해 포로로 잡혔으나 연행직전 자결함

1954.4.24 유혁운 광주형무소로 이송. 곡괭이자루 매질50대 선고 후 중앙2사 12방.

1954.12.30 유혁운, 대법원에서 무기형 확정→ 기결사로 옮겨짐.

1955.봄 누님과 유혁운 아내가 면회옴. 그녀에게 떠나가라고 함.

1955.봄끝자락 김춘옥이 면회옴. 유혁운의 결혼사실 때문에 그녀의 부모님이 유혁운을 반대한다고 함. 김춘옥과 완전히 이별함.

1955. 그해 봄 전남 마지막 빨치산 '김병극' 광주형무소로 옴

1956.여름 유혁운 출역나감. 멍석,어망짜는 제4공장 →고공공장으로 이전. 고공공장에서 남부군정치위원 출신 이봉갑, 전북 김제 군당위원장 유영쇠 등등 대여섯명이 급식규정 준수 주장하며 '단식농성'함. 투쟁성공함. 그러나 단식 선동죄로 금치2개월, 어둠의 독방에서 뒷수갑 찬채로 감금됨.

1956.가을 평생 못잊을 동지, 김규호 만남.



▶ 김규호: 탁월한 이론가, 실천가. 전남 강진 출생. 일본으로 가출. 경도제대 졸업. 서울대 철학과 교수역임. 46년 국대안반대투쟁시 월북. 김일성대학 교수역임. 6.25한국전쟁 직후 대일지하당조직책. 일본에서 52년체포됨.



1957.봄 좌익수들 전향문제 크게 붉어짐.

1957.7.4 유혁운은 전향서를 작성함. 1,400여명의 좌익수들 중 100여명이 전향거부함.



[출처]  정운창의 빨치산 .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