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보물찾기
ㆍ숨기거나 사라진 보물 세계 곳곳 얼마나 되나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공예가 파베르제는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 황실을 위해 부활절 기념 달걀 공예품을 만들었다. 달걀은 1885년 알렉산드르 3세의 명령으로 처음 제작된 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까지 딱 50개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중 로열 대니시, 알렉산드르 3세 등 7개가 없어졌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올 초 “7개 값어치를 합하면 2억1000만달러(약 2492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호박 방’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유명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1701년부터 엄청난 양의 금과 호박을 들여 10년 동안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방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고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 독일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다. 이 방은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방화 등으로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널리 알려진 호박 방은 러시아가 25년 동안 공을 들여 2003년 예카테리나 궁전에 새로 마련한 것이다.

일본 에도 막부는 1866년 서방의 침략을 걱정해 일본 아카기 산 근처에 수t에 이르는 금괴를 숨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일본에서 이보다 더 유명한 보물은 야마시타 금괴다. 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5년 일본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약탈한 보화를 필리핀 어딘가에 숨겼다는 것이다. 1994년 민다나오 섬에서는 순도 90%짜리 금괴 약 2000t이 발견됐고 1996년에도 12.5㎏짜리 금괴가 무더기로 나왔다. 이걸 야마시타 금괴로 보는 사람들도 적잖다. 태평양 섬 타히티에는 1859년 페루의 피스코 교회에서 훔쳐온 무게 14t에 달하는 금괴 등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둑 4명이 목사를 속이고 훔친 뒤 붙잡혔지만 금괴의 소재는 미궁에 빠졌다.
1900년 전후 남아공에서는 2억5000만달러(약 2967억원)어치 금화가 사라졌다. 앵글로-보어 전쟁 때 네덜란드 후손으로 남아공에 거주하고 있는 보어인들이 당시 수도 프리토리아가 영국 군대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자 정부 기관, 은행, 탄광에 있는 금을 모아 어딘가에 숨겼다는 것이다. 이를 주도한 폴 크루거 대통령 이름을 본떠 ‘크루거의 실종된 금’이라고 불리고 있다.
캐나다 선박회사가 운영하는 SS 아일랜더는 1901년 8월15일 알래스카에서 밴쿠버로 항해하다가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배에는 2억5000만달러(약 2967억원)어치 금괴가 실린 것으로 전해졌지만 2012년 금이 없는 상태로 발견됐다. 그래도 몇몇 탐험가들은 탐험을 이어가고 있다.
1715년 7월30일 미국 플로리다 해안에서는 스페인 무역선 산 미구엘호가 2억달러(약 2373억원)어치 보물을 싣고 쿠바를 떠나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침몰했다. 탐험 정보 사이트 리스트버스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보물선 중 하나”라고 적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성에 보관된 아이리시 왕관 보석은 1907년 도난당했다. 사람들은 당시 소유주 아더 비카그스경이 1921년 암살되기 전 어딘가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왕관을 찾기 위해 포스터까지 작성해 배포하기도 했다.
인도 파티알라에는 293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1928년 파티알라를 다스리는 부핀데르 싱 대왕의 요구로 프랑스 카르티에가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보석 일부가 발견됐지만 428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드 비어스’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눈뜨고’ 당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3년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발생한 앤트워프 다이아몬드 도난사건이다. 1978년 미국 존 F 케네디 공항에서는 루프트한자 직원들이 화물 보관소에 들어가 현금과 보석을 훔쳐갔다.
월드컵 축구대회 초기 우승컵인 줄리메컵도 사라졌다. 1970년 세 번째로 우승한 브라질이 영구 보관하다가 1983년 없어졌다.
‘비통의 밤’ 보물은 1520년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아즈테카 왕국을 점령하면서 수도 테노치틀란에서 약탈한 것이다. 이후 코르테스는 아즈테카 군사에 밀려 ‘빈손’으로 도망쳤다가 이듬해 다시 그곳을 찾았지만 보물은 찾지 못했다. 비통의 밤은 코르테스가 아즈테카 신전에서 현지 사람들을 대거 말살시킨 1520년 6월30일 밤을 의미한다.
캐나다 동쪽 해안에는 오크랜드라는 섬이 있다. 1795년 놀러온 소년이 움푹 팬 곳에 보물이 숨겨졌다고 상상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팠고 27.4m 지점에서 석판이 나왔다. 석판에는 “40피트 아래에 200만파운드가 묻혀 있다”는 암호 문자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파다가 6명이 죽었고 이들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 “비밀을 풀려면 7명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전설도 있다.
보물이나 금괴가 실제로 발굴됐다는 소식도 종종 전해진다. 2010년 9월 미국 탐사업체 ‘오디세이 마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어뢰를 맞아 침몰한 영국 증기화물선을 발견했다. 이 업체는 2009년 도버해협에서 금화 4t이 선적된 영국 전함을 찾아내기도 했다. 이같이 보물을 쫓는 사람들을 보물사냥꾼(트레저 헌터)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사냥꾼은 지오바니 바티스타 벨초니(1778~1823)다. 이탈리아 모험가이자 발굴자인 그는 1816년부터 이집트 주재 영국총영사 소속으로 람세스 2세 거상 등을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1817년에는 세티 1세의 묘를 발견했고 이듬해에는 피라미드도 발굴했다. 어린 시절 <일리어드>를 애독하며 꿈을 키운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독일)은 1870년 힛살리크 언덕 발굴에 착수해 그곳이 호머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임을 입증했다.
멜 피셔(1922~1998·미국)는 1985년 미국 플로리다 앞바다에서 스페인 범선 ‘아토차의 성 마리아’를 찾아냈다. 1622년 태풍으로 침몰한 배에서는 금 40t, 은화 14만개 등 총 4억5000만달러(약 5341억원)어치의 보물도 함께 발견됐다. 미국 정부는 일부 소유권을 피셔에게 줬고 피셔는 박물관을 세웠다.
로버트 매키논(65·캐나다)은 1977년 거의 200년 전에 침몰한 프랑스 범선 ‘오귀스트’를 찾아냈다. 오귀스트는 1761년 프랑스 망명자와 각종 보물 및 유물을 싣고 몬트리올에서 프랑스로 가다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침몰했다. 매키논은 2년 동안 찾아낸 각종 유물과 보물을 자국 박물관에 기증했다.
마틴 베이얼(64·미국)은 1981년 영국 호화 유람선 ‘RMS 리퍼블릭’호를 발견했다. 이후 베이얼은 투자자를 모집해 1987년 본격적으로 보물찾기에 나섰다. 그러나 74일 동안 탐사 끝에 찾아낸 건 와인과 샴페인뿐이었다. 1909년 영국으로 가다가 침몰한 이 배는 무게 1만5400t, 길이 173.7m의 호화 유람선으로 ‘백만장자 배’로 불렸다.
과거 보물사냥꾼들은 육지의 고고학적 발굴에 치중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잠수 장비, 선박 제조 기술의 발달로 해저 탐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지역 탐사권, 해저 생태계 보호 등이 이슈가 되고 있다. 2012년 유네스코는 해저 문화재 보호를 위해 세계가 협력해야 한다며 ‘수중문화유산보호협약’을 채택했다.
미국 고고학자 제임스 싱클레어는 “잃어버린 보물을 찾고 싶은 건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라며 “학자가 중심이 된 공공분야와 자금력이 있는 사설 업체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