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전염병 대응 리더십
세종의 전염병 대응 리더십
“로마는 운이 좋았다. 5현제 중 마지막 인물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를 쓴 제니퍼 라이트에 따르면 인류를 괴롭힌 전염병들은 최고지도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피해가 다르게 나타났다. 로마인들에게 너무나 끔찍했던 안토니우스 역병이 덮쳐왔을 때 아우렐리우스의 신속한 대응으로 로마는 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2위를 차지한 소아마비는(1위는 원자폭탄) 그 문제를 국가적 이슈로 부각시키고 퇴치운동을 전개한 32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덕분에 퇴치될 수 있었다(위의 책 302쪽).
세종 재위 9년째인 1427년 7월에 역질(疫疾)이 서울 인근에 발생했을 때도 그랬다. 의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역질이 크게 유행해 사망자가 매우 많았는데, 사람들은 녹번현(지금의 서울 홍은동과 녹번동 사이의 고개) 등지에 시체를 나무에 걸어놓기도 하고 구렁에 버리기도 했다. 시체가 드러나 비바람을 맞고 썩어 문드러져서 화기(和氣)를 현저히 손상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의 대응이 인상적이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놀라면서 즉시 한성부에 명하여 (시체를 땅에) 묻게” 했다. 이어서 예조에 매장하는 일을 엄중히 검사하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죽은 자 중에 장사지낼 친족이 없을 경우 어떻게 매장하는지를 옛 제도에서 자세히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했다(세종실록 9년 7월 9일).
여기를 보면 세종은 먼저 그 상황을 심각한 것으로 인지했다(“놀라면서”). 최고지도자가 전염병과 시체 방치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구성원들, 특히 일하는 공직자들이 그 사안을 중대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다음으로 세종은 그 자리에서 바로 관할 부서인 한성부로 하여금 “시체를 땅에 묻게” 했다. 시체가 나무에 걸려 있거나 움푹 파인 땅에 던져져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끔찍할뿐더러 비위생적일 것으로 판단하고 ‘즉시 조처’를 명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지도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조선 중기의 중종이 그랬고, 말기의 고종도 관에서 버려진 시신을 묻어주게 했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가 맨 처음 취한 조치 역시 역병 환자의 시체를 거리에서 치우게 한 것이었다(공동묘지 공간 확보 등의 법률 제정).
그런데 그다음의 조처, 즉 장례를 담당하는 부서(예조)로 하여금 ‘확인 행정’을 하게 한 것(“엄중 검사”)은 세종의 일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437년에 세종은 ‘감옥 안 의문사 방지 규정’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수감 중에 사망한 자에 대해서 죄명과 처음 가둔 날짜와 병에 걸린 일시와 치료한 약과 병 증세와 심문하면서 때린 매의 횟수와 죽은 일시를 상세히 기록해서” 형조에 올리되 왕 자신에게도 보고하라고 명했다(세종실록 19년 1월 23일). 법이나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지를 철저히 확인하는 것은 세종이 보인 일관된 태도였다.
마지막의 언급, 즉 과거의 사례(“고제”)를 조사해서 합리적인 매장 방법과 질병 예방책을 마련하라는 말은 집현전에 내린 지시였다. 과거에 있었던 전염병 대응 사례 중에서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을 두루 연구해 역질의 근본 원인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이 지시 이후로 집현전 학사들은 전염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책 ‘벽온방(피瘟方)’을 편찬했고 그 책을 백성들이 사용하던 말(俚語)로 풀이해서 널리 알렸다(중종실록 13년 4월 1일). 집현전 학사인 유효통이 편찬한 ‘향약집성방’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결실이다. 한마디로 세종은 전염병 창궐을 ‘위험한 기회’로 생각했고 이를 계기로 의학 서적을 간행하고 백성들의 의료지식을 높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그리고 세종이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세종이 당시 의료 인재들을 신명 나게 만든 것을 꼽는다. 세종시대에는 노중례와 유효통 등 여러 의료인물이 활약했는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은 놀라운 실험정신으로 세종을 “껄껄 웃게” 만든 황자후(黃子厚)다. 황자후는 1363년(공민왕12)에 태어났다. 그는 태종 이방원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것에 힘입어 동갑내기인 황희와 비슷한 시기에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올랐다. 태종은 네 살 위인 황자후를 “옛 친구(故舊)”라고 불렀다. 그는 성주목사를 거쳐 1413년(태종13)에는 호패법(戶牌法) 제정을 건의하기도 했으며, 왕명을 받아 경상도에 운하를 파는 것의 타당성을 조사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4년 윤9월 21).
이처럼 실무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추진력이 뛰어난 관료였던 황자후에게 태종이 주목한 것은 의료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태종은 황자후가 “약품 이치에 정통하다(精於藥理)”면서 그를 명나라에 파견 보냈다. 세종 초년인 1421년(세종3)에 황자후를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보내면서 태종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재를 많이 구해 가지고 오라”고 당부했다(세종실록 3년 10월 7일). 그런 황자후가 세종 재위 중반에 세종을 웃게 한 일화가 흥미롭다. 어느 날 세종은 “고독지술(蠱毒之術)의 효험이 실제로 있는가?”라고 황자후에게 물었다. ‘고독지술’이란 고독, 즉 뱀, 지네, 두꺼비 따위의 독을 환자에게 주입해 의식을 잃은 사이에 수술하는 치료술을 말한다. 그 고독지술이 마취의 효과가 있는지를 묻는 세종에게 황자후는 ‘효과가 없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가?”라고 재차 묻는 세종에게 황자후는 “신에게 중독시켜 실험해 보았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이 “껄껄 웃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독성 실험을 자기 몸에 시행하는 의사나, 그의 말을 듣고 감탄하는 왕의 모습은 왜 그 시대에 의료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한다. 특히 유효통의 ‘향약집성방’에 대해 황자후가 조목조목 비판하는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의료인들의 치밀함과 열린 자세를 실감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는 세종 사후에도 일정 기간 계속됐다. 갓 즉위한 문종이 지은 ‘악질(惡疾) 구료에 대한 글’이 그 예다. 문종은 그 글을 신하들에게 보이며 각자의 의견을 물었다. 문종에 따르면 당시 경기 교하(交河) 등지에 악병이 침투, 전염돼 그 세(勢)가 자못 커지고 있어서 만약 서울까지 번질 경우 천도(遷都) 논의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항간의 거론되는 전염병 치료 방안으로는 무당의 푸닥거리(피邪)나 불가의 수륙재(水陸齋)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효험이 있겠느냐는 게 문종의 질문이었다. 여러 신하의 의견을 들은 문종은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모든 전염병에는 하나의 일정한 이치(常理)가 있는데, 그것은 병의 초기에 환자를 격리시키면 전염병이 스스로 소멸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병에 걸린 사람을 빠짐없이 찾아내 인적(人跡)이 끊긴 섬에 들어가게 한 다음, 의복·양곡·약품 등을 넉넉히 줘 타인(他人)에게 더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 문종의 주장이었다. 무려 570여 년 전에 ‘감염자 격리’가 최고의 전염병 확산 방지책이었다는 생각이 놀랍다(문종실록 1년 9월 5일).
그러면 세종 9년의 역질은 어떻게 됐을까? 먼저 확인되는 것은 왕명을 내린 지 24일 만에 관리들을 처벌한 기록이다. 땅에 묻으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관리들을 엄벌한 것이다(세종실록 9년 7월 22일). 왕의 지시 25일 후에는 집현전의 연구보고서가 올라왔다. 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역병 사망자는 매장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 결과에 의거해 민간에 퍼져 있는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았다. 그래도 이상한 소문을 믿고 퍼뜨린 자는 엄벌에 처했다(세종실록 9년 8월 4일). 마지막으로 세종이 취한 조처는 담당부서인 예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매골승(埋骨僧) 권려 사목’을 만든 일이다. 오랫동안 시체 묻는 일을 익숙하게 해온 승려들에게 매장업무를 맡기고 인센티브를 주는 법을 마련한 것이다(세종실록 9년 9월 1일).
세종과 문종이 전염병에 대처하는 것을 읽다가 문득 소설 ‘페스트’가 떠올랐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져내는 것은 ‘신의 심판’을 들먹이는 종교쟁이들의 설교가 아니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알베르 카뮈에 따르면 구원의 길은 규정만 내세워 새로운 생각을 가로막는 관리들의 관행에 있지 않았다. 오로지 희망은 기본적인 위생조치들을 알려주고 또 반복해서 실행하는 성실한 의사들에게 있었다. 그 성실함은 스스로를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간주한 뛰어난 지도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비상한 각오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진실한 마음으로 ‘실제에 도움이 되는 정치’를 펼쳐나가는 성실한 정치가들이 더욱 아쉬운 요즘이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