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갑수의 꽃글

peppuppy(깡쌤) 2014. 8. 18. 15:19

이갑수의 꽃글

 

자귀나무

자귀나무의 잎은 쌍으로 나란히 달리는 깃꼴겹잎이고 해가 지면 수면(睡眠) 운동을 한다. 잎맥을 축으로 좌우의 잎들이 한 짝의 고무신처럼 서로 들러붙는 것이다. 해서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

정금나무

정금, 나직이 불러보면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 가시내 이름 같기도 하고 다시 정금, 중얼거리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박수근 그림의 바탕이 되는 회백색의 질감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한 무른 바위의 거친 표면을 아주 닮았다. 어릴 적 고향 뒷동산에서 뛰놀 때 부드럽게 휘어진 능선을 돌아들면 굵은 소금 같은 알갱이로 부서지는 다정한 바위들. 그 가까이에 주로 자라는 나무가 있었다. 정금나무였다.소 먹이러 갔을 때 후두둑 깜보랏빛으로 익은 열매는 늘 우리들 차지. 정금나무의 키는 내 머리통에 수박 하나를 얹은 것과 어금버금해서 겨드랑이에서 팔을 쭉 빼면 딱 따먹기 좋은 위치였다. 어느 땐 익기를 기다리지 못해 초록의 띵띵한 열매를 훑기도 했다. 깨물면 퍼지는 시금털털한 맛도 얼굴 한번 찡그리고 나면 뒷맛이 이내 좋았다..

꼬리진달래

전체적인 수형(樹形)은 진달래와 아주 흡사한데 꽃은 확연히 구별이 되는 나무. 흰 꽃이 가지 끝에 다닥다닥 뭉쳐 있고, 수술은 꽃잎보다 도드라지게 뾰쪽하다. 꼬리진달래였다.

 

이팝나무

가로수가 만개해 있었다. ‘입하(立夏)’ 무렵 꽃을 피운다고 그렇게 불린다는 나무. 흰 쌀밥이 쌓인 것 같아 이밥에서 유래했다는 나무. 이팝나무였다. 때맞추어 고맙게 핀 꽃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4갈래로 길쭉하게 갈라진 꽃잎 하나하나가 흐느끼듯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내 눈에는 꽃잎이 꼭 만장(輓章) 같은 이팝나무.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교목.

광릉요강꽃

함백산 중턱, 융단처럼 펼쳐진 녹색의 한 지점을 햇살이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그 햇살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꽃이 있을 줄이야! 하늘에서 막 떨어진 커다란 눈물방울 혹은 그 눈물을 받아내는 단지 같은 꽃. 부채처럼 벌린 잎을 후광으로 거느린 채 첩첩산중을 굽어보는 꽃 앞에서 세 번 큰절하고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 말고 달리 다른 동작을 취할 수가 없었다. 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잠깐이나마 한 방에 훅 가게 만든 꽃, 광릉요강꽃. 멸종위기1.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해당화

바다로 나간 뒤 돌아와야 할 이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인공은 죽고, 그 자리에서 자라나 붉은 꽃을 피웠다는 전설 속의 나무. 이미자의 노래보다 먼저 동화에서 그 나무를 알았다.

제비꽃

날렵한 제비하고 묵묵한 제비꽃은 산과 들에는 제비꽃이 호젓하게 피어난다. 무엇을 정성스럽게 싼 보자기 매듭 같은 저 작은 꽃들 앞에 엎드리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제비꽃은 종류가 아주 많다. 더구나 변이가 심해서 연륜이 제법 쌓인 식물애호가들도 제비꽃 앞에서는 쩔쩔매기 일쑤다. 그간 내 육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간 제비꽃은 다음과 같다. 금강제비꽃, 단풍제비꽃, 태백제비꽃, 왜제비꽃, 흰젖제비꽃, 화엄제비꽃, 호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왕제비꽃, 알록제비꽃, 고깔제비꽃, 뫼제비꽃, 졸방제비꽃, 낚시제비꽃, 서울제비꽃, 남산제비꽃. 이외에도 국가표준식물목록을 검색해보니 지금 호명하는 것에서 빠져 시무룩해하는 제비꽃이 무려 서른다섯 종. 그제 점심시간에 인왕산에 올랐다. 운동기구가 서 있는 약수터 벤치 뒤의 잔돌 틈에 흰 꽃이 피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제비꽃이었다. 그중에서도 잎이 코스모스의 그것처럼 잘고 깊게 갈라지는 남산제비꽃이 아닌가.

변산바람꽃

봄의 교향악을 울리듯 먼저 피는 꽃들이 있다. 희끗희끗한 잔설 틈에서 꽃샘추위를 이기며 바람에 맞서며 피어나는 꽃이다. 중지(中指)로 키를 가늠하면 내 손가락 사이 골짜기에 닿을락말락. 그 작은 꽃 앞에 엎드리는데 스웨덴 생각이 났다. 사연이 있다

2년 전 백두산 야생화 탐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일행 중에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로 아주 먼 나라에서 오신 분이 있었다. 사진은 물론 식물에 관한 지식도 전문가를 뺨칠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 멀리서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까? 식사 자리에서 슬쩍 물어보았더니 돌아오는 호탕한 말씀. “시댁이 경주 근처였는데 변산바람꽃을 보고 그만 홀딱 반해 버렸지요. 어쩌다 스웨덴에 눌러앉았지만 아직도 고국의 꽃소식에 늘 가슴이 설레지요. 변산바람꽃의 그 야들야들한 연보랏빛 수술 좀 보세요. 그 꽃이 그만 내 운명을 바꾸어버렸네요.” 사진을 찍고 일어나 꽃을 유심히 보았다. 바깥의 흰 5장은 실은 꽃받침잎이고 꽃잎은 그 안에 조그맣게 깔때기 모양으로 있다. 오밀조밀한 꽃 안의 세계에서 특히 작은 기관에 주목했다. 한 젊은 새댁의 인생을 바꾸게 한 변산바람꽃의 저 야들야들하고 꼬물꼬물한 수술! 미나리아재비과. 한국특산의 여러해살이풀.

복수초

복수(福壽).이른 봄이면 잎보다 먼저 노란 꽃잎이 피는 복수초는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이 땅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복()과 수()를 모두에게 공평히 나누어주겠다는 듯 전국의 방방곡곡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다. 흙으로 녹아 들어가는 낙엽을 뚫고 대궁을 밀어올리며 복수초는 피어 있었다. 가는 다리 위에 꽃 하나를 건사하며 하루를 견디다 이제 햇빛도 소슬해지니 복수초는 꽃잎을 오므리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 중. 노란 꽃잎을 세우며 그릇처럼 그러모으니 꽃잎 안에 모인 햇빛의 알갱이가 고두밥처럼 익어가는 듯했다. 우리가 새해 덕담을 아낌없이 나누듯 그 이름값을 그 어디 후미진 곳에서도 톡톡히 하고 있는 복수초.

앉은부채

앉은 부처로 들렸는데 확인해보니 앉은부채라 했다. 줄기도 없이 뿌리에서 곧장 큰 잎이 난다. 그 잎이 부채 같아서 제 이름을 얻은 야생화. 겨울 끝의 잔설을 좌대로 삼고 불염포로 열매를 감싸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그 불염포는 어깨로 흘러내리는 자주색의 가사장삼을 닮지 않았겠는가. 그 열매는 겨울을 이겨낸 짐승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먹이라지 않는가. 그러니 차라리 앉은 부처라 잘못 부르고도 싶은 앉은부채.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