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영혼의 집>의 한 장면.
메릴 스트리프와 글렌 클로스가 출연했다.
칠레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모계 4대의 가족사를 아옌데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로 녹여낸 작품이다.
“당신은 이 나라 최악의 기자임에 틀림이 없소.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사사건건 끼어들려고만 하지.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거짓말도 꽤 하는 것 같던데. 아마 기삿거리가 없으면 꾸며서라도 낼 걸. 차라리 소설이나 쓰는 게 더 낫지 않겠소? 문학에서는 그런 결점들이 장점이 되니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열일곱 살에 언론계에 뛰어들어 잡지의 기사와 텔레비전 방송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삼십대 초반의 기자 이사벨 아옌데는 1973년 파블로 네루다의 칠레 해안가 별장에 초대를 받았다. 건강 악화로 파리 대사 직책도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시를 쓰고 있었던 파블로 네루다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사벨 아옌데에게 면박을 줬다.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나는 절대로 그런 거는 안 하오.” 파블로 네루다는 이사벨 아옌데에게 차가운 일갈을 던지며 “차라리 소설”을 쓰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고언이 훗날 세계 문학사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될지 파블로 네루다는 알고 있었을까? 이사벨 아옌데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로 응답할 수 없었다. 소설을 쓰기까지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즈음 칠레에는 긴 암흑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정치적 동지였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가 일으킨 군부 쿠데타로 죽음을 맞았다. 파블로 네루다는 1973년 9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 아옌데의 삶도 온전치 못했다.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인 이사벨 아옌데는 언론 활동이 금지되고 군부 정권의 감시 대상이 되자 1975년에 결국 칠레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30대 초반 ‘최악의 기자’ 혹평받으며 ‘소설이나 쓰라’ 면박받아
위독한 할아버지에 작별 편지 보내다 뜻밖에 ‘글쓰기 재능’ 발견
그로부터 6년 후인 1981년 이사벨 아옌데는 망명지 베네수엘라에서 별 볼일 없는 마흔을 맞았다. “팔월이면 마흔이 되는데도 그때까지 이렇다 할 만한 걸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빈털터리에 가까웠다. “마흔 살이란 나이는 격정적인 삶을 살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였으며, 그나마 나에게 주어진 기한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이였다. 딱 하나 확실했던 건 내 삶이 그리 윤택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지겨울 거라는 거였다.” 남은 인생이 권태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든 무마해야 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겸손 이외에 대안은 없었다.
“1981년 그 새해, 다른 사람들은 샴페인을 터트리고 밖에서는 방금 시작된 새해를 알리는 불꽃놀이가 한참이었을 때, 나는 따분함을 이겨내고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처럼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계획’은 “채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1월8일에 산티아고에 계신 할아버지가 아주 위급하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그 소식으로 인해 얌전하게만 살아야겠다는 내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고, 나는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떤 약속은 숙명적으로 파기되기도 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망명지 베네수엘라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으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내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에게까지 남길 생각이니 마음 편하게 떠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작별 인사를 위해 쓰기 시작한 편지는 이사벨 아옌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글쓰기에 완전히 몰입하자, 이사벨 아옌데의 ‘격정’이 되살아났다. 삶은 “윤택”해졌다.
이사벨 아옌데는 외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다가 1930년대부터 1973년까지 험난했던 칠레의 역사를 한 집안의 이야기 안에 담아냈다. 모계 4대의 가족사를 이사벨 아옌데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로 녹여낸 <영혼의 집>은 주인공 니베아, 클라라, 블랑카, 알바가 칠레 근대사를 관통하면서 겪어야 했던 처절한 사건들을 가감 없이 기록하면서도 억압적인 현실을 돌파해가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영혼의 집>으로 이사벨 아옌데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작가이자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한 페미니즘 작가로 급부상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사벨 아옌데에게 <영혼의 집>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 자신도 “그 책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단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영혼의 집>을 발표한 이후로 이사벨 아옌데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의 진짜 재능이 뭔지,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20년 이상 언론, 단편 이야기, 연극, 텔레비전 대본, 수백 통의 편지들과 같은 문학 주변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이미 “아홉 살 때 셰익스피어 전집에 폭 빠져들었”던 이사벨 아옌데는 그 이후로도 줄곧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내 자신의 삶이라도 되듯, 내가 그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라도 되듯 애절”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에게조차 숨겨왔다. “객관적이지도 못하고 사사건건 끼어들려고” 했던 “최악의 기자”는 사실 소설가로서 최고의 덕목을 일찌감치 갖추고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사벨 아옌데는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택에서 집필 중인 이사벨 아옌데의 모습. 민음사 제공
‘영혼의 집’ 발표가 인생의 전환점 되자 “내 목숨 구해줘” 고백도
‘결점’을 ‘장점’으로 바꿔…“마음 속에 등불 켜듯 씩씩하게 썼다”
이사벨 아옌데는 <영혼의 집> 집필 이후부터 봇물 터지듯 글을 썼다. 자신의 작품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흥미로웠고, 다양한 문화권의 독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 또한 보람찼다. 그날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신작 <영원한 계획> 출판 기념회 행사를 하고 있었다. 1991년 이사벨 아옌데는 딸 파울라가 포르피린증(대사장애의 일종)으로 의식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99세의 외할아버지에게 “제대로 작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편지를 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서른도 안된 딸이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대여섯개나 되는 튜브와 기계들에 연결되어 침대에 누워” 있게 되자 이사벨 아옌데는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통에 휩싸인다. 이번에도 이사벨 아옌데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네가 내 과거를 갖도록 해라.” 그 편지는 이사벨 아옌데의 자서전이자 그녀의 가족연대기였고, 동시에 칠레 현대사였다. 이사벨 아옌데는 유년 시절의 성폭력 피해와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온갖 부당한 차별, 군부 독재를 피해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망명객의 울분과 좌절, 이혼을 결정하기까지의 갈등과 재혼 과정에서의 혼란 그리고 마침내 되찾은 자유와 열정, 사랑 등을 딸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의식불명의 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이사벨 아옌데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의미를 자신과 딸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보고자 했다.
끝내 기적은 펼쳐지지 않았다. 1992년 12월6일, 쓰러진 지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아 파울라는 사망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4년에 <파울라-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출간되었다. 죽은 딸을 살려낼 수는 없었지만, 이사벨 아옌데는 딸의 뜻을 이어 나갔다.
빈민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파울라를 기억하며, 이사벨 아옌데는 재단 설립을 추진한다. 1996년 출범 이후 지금까지 이사벨 아옌데 재단은 저개발 국가의 여성들이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사벨 아옌데는 삶을 개척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나갔다.
1999년 <운명의 딸>과 2000년 <세피아 빛 초상>을 발표하며 이사벨 아옌데는 모계 6대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를 완성시켰다. 작품마다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이사벨 아옌데는 “마음속에 등불 하나가 켜져 있는 듯 기운이 넘쳐 씩씩하게” 소설을 썼다. 그녀에게 <영혼의 집>은 용기의 원천이었다.
이사벨 아옌데는 새로운 작품의 구상이 끝나면 반드시 1월8일에 맞춰 집필을 시작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는 <영혼의 집>을 쓰기 시작했던 날을 그렇게 기념하며 자기 삶에 예의를 갖춘다. 또한 이사벨 아옌데는 항상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무척 조심”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이 “정말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 이미 한차례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소설이나” 쓰라고 했던 파블로 네루다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소설을 쓰자 그녀의 ‘결점들’은 모두 ‘장점’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글 쓰는 여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 필자 장영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