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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술꾼들

peppuppy(깡쌤) 2016. 2. 7. 21:10

 

조선시대의 술꾼들

예전에도 험난하게술을 마셨던 술꾼들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백 번 금주령이 내려진다. 대부분 곡식을 아끼고자 시행되었다. “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열 사람이 굶는다는 이야기다. 상당수의 금주령은 상징적인 조처였다. 국상이 나거나 가뭄 등 천재지변이 심할 때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렸다. 형식적일 때도 있었다. 엄할 때도 있었다.

술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영조는 술꾼들을 찾아내려고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아무리 막아도 술을 마실 방법은 있다. 금주령을 무릅쓰고 명성을 휘날린 술꾼들도 적잖다
성종 때 문신 손순효는 술잔 늘이기로 유명하다. 늘 만취에 사고뭉치였지만 그의 재주를 아낀 성종이 특별히 술잔을 내려주며 이 술잔으로 하루 세 잔만 마시라고 했다. 어느 날 또 그가 만취상태로 나타났다. 성종이 왜 술을 정해준 것보다 많이 마시고 나타났느냐?”고 꾸짖었더니 얇고 크게 편 술잔을 보여주며 전하가 주신 잔에 조금도 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나

숙종 때 대제학 오도일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 재주와 풍치가 좋아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여러 번 음주사고를 쳤지만 숙종은 술꾼 오도일에게 관대했다. 작은 사고를 묵인하면 대형사고가 터진다. 기우제에서 술을 올리는 작주관(제사 때 술을 따르는 관리)을 맡았던 오도일이 술에 취해 음복주(飮福酒)를 발로 걷어차서 쏟았다. 이 불경죄로 숙종29(1703)214일 오도일은 전라도 장성으로 유배 갔고 6년 뒤 유배지에서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엔 본래 방탕하고 몸을 단속하지 못했는데 만년에는 더욱 방자하고 패악해 사람의 도리를 못햇다. 유배지에선 더욱 뜻을 잃고 슬퍼하여 오로지 술로 마음을 풀었는데 취하면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곤 했다. 젊어서는 자못 청백하다고 스스로 자부 했는데 만년에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 붙어살면서 날마다 술과 고기를 마련하게 하는 등 요구가 끝이 없어 크게 원망듣기도 했다. 종실 전성군 이혼은 행동이 개, 돼지 같아서 사람 축에 끼지 못했는데 오도일은 그 부()를 탐해 아들을 장가들게 하니 그 당파사람들도 더럽게 여겼다. 정성이 부족하고 기를 숭상하며 남을 업신여기길 좋아해 술 취하면 옆 사람한테 욕 짓거릴 하고 과격한 주장을 하곤 했다.”라고 기록 됐다.

호주가 오도일의 이름은 그로부터 몇 대를 건너서 다시 나타난다. 정조 때 오도일의 손자인 태증이 성균관 제술 시험에 합격해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만난다. 합격자들을 위한 질펀한 술자리다. 정조의 술자리 취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는다, ‘불취무귀(不醉無歸)’였다
피가 술보다 진한지, 술이 피보다 진한지는 알 수 없다. 손자 태증의 술도 할아버지를 닮았다. 기록에는 오태증의 집안이 대대로 술을 잘 마셨다. 태증이 이미 5잔을 마셨는데 전혀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정조는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잔을 더 권하라고 한다. 끝내 오태증이 술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자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손자인 태증이 취하여 쓰러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별감이 업고 나가라고 명한다. ‘조선왕조실록정조 1632일의 기록이다

또 중종 때의 좌의정 신용개는 관대하고 문장도 출중한데다 청요해 호인소릴 들었지만 언행일치가 별로였고 자기위주였다. 마음이 불편하면 대취하도록 음주하여 정신을 잃고 쓸어져 실려 가기 일쑤라 별 볼일 없는 재상소릴 들었다.

영조시대는 술꾼들의 암흑기였다. 중국 사신의 접대나 종묘 제사에도 술 대신 단술(감주)을 내놓게 했다. 금주령을 어긴 사람에게 조상의 제사에는 감주를 사용하고 너는 술을 퍼 마시느냐?”고 질책했다. 남병사 윤구연은 숙소에 두었던 술독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금주령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영조는 윤구연의 처형장인 남대문에 직접 나타난다. 영의정 신만을 비롯하여 삼정승이 윤구연을 구명하려다 동시에 파면된다. 윤구연에 대한 벌이 과하다고 했던 이들도 좌천되거나 벼슬을 잃었다.

금주령이 느슨해진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는 술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썼다(‘청장관전서’). 그는 시에서 술꾼들의 과장된 꿈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목부터 대단하다. “백년, 삼만 육천일, 반드시, 매일 3백 잔을 기울이다. 이 시의 마지막은 더 대단하다. “백천만겁 동안 그릇 굽는 곳의 흙이 되어, 영원히 술잔, 술병, 옹기가 되리라고 했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잔, 술병, 옹기처럼 일평생 술을 품고 살 수는 없다.

군신 간의 술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문신 이석은 효종 때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효종과 늦은 밤 술자리를 가진 이석은 한잔, 두잔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취했다. 효종은 젊은 별감을 시켜 이석을 부축하게 하고 해정주() 한 병을 따로 보냈다. 이석의 비석에 적힌 내용이다. 해정주는 술 깨는 술이다.

조선시대 술꾼들의 로망은 주덕송(酒德頌)’을 지은 진()나라 유영(劉伶)이다. 그는 늘 술병을 가지고 다니며 하인에게 삽을 메고 뒤따르게 했다. ‘내가 술을 마시다 죽으면 바로 땅에 묻어 달라는 뜻이었다. 유영은 한꺼번에 한 섬의 술을 마시고 다섯 말로 해정()’을 한다고 했다. 역시 해정술을 깨게 한다는 뜻이다. 한 섬은 두 가마니다. 그 많은 술을 마시고도 부족하여 다시 해장술로 다섯 말을 마신다니 가히 술꾼들의 로망이 될 만하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