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과 네팔 기행 글 변해춘 사진 김상현 최정규
7월 31일 첫날 (인천 ~ 베이징)
여행,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기에 마음도 바빠 온다. 여유를 부리며 출발해도 될 텐데, 꼭 새벽부터 떠나야만 하는 부산함은 그 꿈을 실현하고픈 성급한 갈망이 내면에 꿈틀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서울에 도착해 그 많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어슬렁거리며 길거리를 헤매다가 결국은 인천으로 향했으니 말이다.
약속시간보다 늦은 시각에 나타난 인솔자, 만만디의 중국 비행기 등등, 이런 것들이 기다림의 흥분에서 현실세계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
원래의 도착시간보다 2시간 반이 지난 11시 30분경에 북경공항에 도착해서 버스로 북경 화륜반점으로 향했다. (중국은 호텔을 반점, 화장실을 세수간이라 부른다.)
차창으로 비 몇 방울을 흩뿌리며 북경의 밤이 인사한다. 자금성, 만리장성이 고개를 들며 눈앞에 다가온다.
북경엔 1300만에 유동인구 200만, 그중 자전거 인구가 800만이란다. 교통체증 때문에 자전거가 편리하며 호구당 1~3대를 가지고 있단다. 중국 사람들은 8이란 숫자를 선호하는데 그것은 돈을 잘 번다는 숫자이기 때문이란다. 경제구조는 조롱박형. 더구나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화교들의 경제는 엄청나지 않는가.
8월 1일 둘째 날 (베이징 ~ 티벳 라싸)
티벳의 수도 라싸로 가는 날이다. 또 만만디! 09: 30 출발예정이 11시가 되어서야 하늘을 난다고 하니, 많은 이들이 부산하다. 아스피린을 구입하기 위해, 신라면을 구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모른다는 것, 이것만큼 사람을 순진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행여나 고소증세로 여행을 포기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준비한 아스피린마저 부족해 이리저리 물결치듯 약국을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 애당초 준비하지 않은 우리도 인솔자의 고산증 위력 강의에 한풀 꺾여 그 물결에 합류해서 10개들이 한통을 구입했다. 또 어떤 이는 신라면 한 상자를 구입해서 짐덩이가 커지고…. 이렇게 우리는 뭔가를 구입하지 않으면 완벽한 여행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은 허공에 띄운 채 빙빙 돌았다.
오후 3시 35분 라싸 공항에 도착, 해발 3650m의 고도! 일사천리로 아스피린을 먹어대고 밖으로 나오자 현지가이드가 목에 걸어주는 명주 같은 하얀 천. 티벳 여행의 시발점이다. 나풀거리는 하얀 천을 목에 두르고 미지의 티벳을 그리며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밀밭과 보리밭의 한들거림, 쪽빛의 푸른 강물, 거대한 민둥산, 강 옆으로 서있는 수양버들의 부드러운 나뭇가지, 고원의 생소한 식물들- 눈이 시리도록 평화롭다. 이렇게 새로운 풍경에 허우적거리며 1시간 20분을 달리자 라싸에 도착했다.
2시간 30분의 자유 시간! 고도 적응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걷지 말고, 뛰지 말고, 물을 많이 마시고, 무거운 물건을 들면 안 되고, 누누이 강조했던 인솔자의 당부. 다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호기심이 발동한 정규와 난 ‘고산증’이란 단어조차 망각한 채 마트로 향했다. ‘위안’으로 구입해본다는 것, 새롭기만 하다. 빵 두 개에 1위안, 청포도 큰 한 송이에 5위안, 과자 한 봉지에 3위안, 물론 천차만별이지만 너무도 싸 구매욕이 솟구친다. 큰 컵에 담긴 우리 신라면 4위안…. (1위안은 우리 돈 127원이다)
우리의 돈 가치가 중국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언젠가 일본에서 구매욕을 상실한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라싸공항 라싸공항 몇 방울의 비가 내린다. 그것도 잠깐만 흩뿌린다. 이곳 사람들은 비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우리처럼 질기게 오는 비가 아니라 잠깐 내비치는 비는 지나가는 손님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8월 2일 셋째 날(라싸)
오늘 하루는 라싸 관광이다. 이른 아침부터 노인들의 순례길이 이어진다. 대부분 명도와 채도가 낮은 어둡고 탁한 색의 옷으로 단장하고 묵언속에 걷고 있다.
음지와 양지의 뚜렷한 온도차. 뜨거운 햇발아래 서면 금방이라도 타들어 갈 것 같은 정열의 불꽃같은 태양열 아래 저 어둠침침한 옷차림은 그 열기를 한없이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서 맑은 영혼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까. 어떤 이는 마니차를 돌리며 발 가는대로 걷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야말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들 같다. 이른 아침인데도 하루를 마감하고 수평선 너머로 지는 황홀한 석양빛이 아니라 컴컴한 구름에 가렸다가 홀연히 나타난 달빛 같은 고고한 존재로 비치는 것은 저 탁한 옷 때문일까.
라마교 성지 모나스크 입구에 내려 순례객들에 휩싸여 흥분된 마음으로 서서히 걸어 올라갔다. 이곳은 대부분 노인들이 찾는 순례지이다. 일없는 노인들이 아침부터 이곳을 찾아 오체투지를 하며 신앙심을 키운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마셔가며 먹어가며 쉬엄쉬엄 몸을 부린다. 앙상하게 마른 온 몸을 던져 성지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는 노인들이 경건하다 못해 안쓰럽다. 몇 시간을 저렇게 하는 것일까. 종교의 힘이란 참으로 위대하다. 티벳은 백퍼센트 라마불교다.
라마 불교는 세 가지 순례길이 있다.
하나, 모나스크 순례길
둘, 마니륜을 돌리며
셋, 조캉사원의 법당을 돌면서
이곳 모나스크에는 1300년 동안 돌을 쌓아 만든 마니석도 있고, 바위절벽에 부자들은 불상을 조각하고 가난한 자들은 그 위에 덧칠함으로서 거창한 성지를 만들어 신앙심에 동참한다. 그래서 불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체적이 된다. 젊은이들은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순례길에 나선다.
라마불교의 총본산이라 할 조캉사원! 주변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정문 앞엔 오체투지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봐도 봐도 새로운 오체투지, 모나스크에서 오랫동안 넋을 잃고 빠져들었음에도 이곳 조캉사원 앞에서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 스님 한분도 합류해서 오체투지에 열심이다.
오체투지법을 간단히 설명해보자. 먼저 부처님 앞에 곧바로 선다 → 이마 위에서 합장한다. → 턱 아래에서 합장한다. → 가슴 앞에서 합장한다. →꿇어 엎드린다. → 손바닥을 약간 앞쪽 지면에 대고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진다. → 신체를 완전히 지면에 내 던지고 양손을 곧바로 앞으로 편다.
이러한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매 동작마다 경문을 외는데 경문을 모르는 사람은 ‘옴마니밧메훔’이라고 왼다. 이 말은 티벳어로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것이며 ‘연꽃 속의 아름다운 보배 구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조캉사원 안은 순례객들로 발을 디딜 수가 없다. 야크 기름을 사서 촛불을 태우고, 돈을 바치고, 경전을 외며 차례대로 법당을 돈다. 그 사람들 속에 끼어 법당을 돈다면 아마 하루도 부족할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 조캉사원의 순례에 나서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쩌다 한가한 법당을 만나면 쭈뼛거리며 들여다볼 뿐, 인산인해에 빠져 겉만 돌뿐이다.
기독교의 성지 순례도 이럴까. 갑자기 톨스토이의 ‘두 노인’이 생각난다. 과연 성지에 접어드는 것만이 중요할까? 결과보다 과정도 중요하리라.
법당 안과 밖, 여기저기 돈이 나뒹굴고 또한 구걸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위로 오르니 어느 한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다들 긴 막대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아 바닥을 치며 돈다. 경전인지 노래인지 큰소리로 부르며 돌아가며 돌과 흙으로 된 바닥을 다지고 있다.
뒤늦게 올라온 정규가 마니차를 돌려봤느냐고 묻는다. 언젠가 우리나라 TV 프로그램 ‘지구탐험대’에서 이곳의 마니차를 소개했단다. 밀물처럼 쏟아지는 인파에 밀려 그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가 없어 마니차를 놓칠 뻔 했다. 우린 잽싸게 밑으로 내려가 마니차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순례의 한 방법이다.
티벳을 가장 티벳답게 만드는 라사의 상징물이며 달라이라마가 거주하던 성 포탈라궁을 오른다. 들어가는 길목의 복잡한 관문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산소가 부족한 고도에서 발 빠른 가이드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놀려보지만 역부족이다.
겨울궁전으로 티벳의 최초 통일왕조를 세웠던 송첸 감포왕이 왕비로 맞게 된 문성공주를 위해 7세기에 지은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17세기 제 5대 달라이라마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약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본관 건물은 13층 높이로 1000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사 시내 어디를 가더라도 이곳을 볼 수 있으며 이 궁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이곳은 역대 달라이라마가 살았던 곳으로 티벳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이다. 궁전 내에는 불상, 벽화, 경전 등의 진귀한 물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궁 주변에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복도와 같은 ‘순례의 길’이 있다. 지금도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밧메훔’을 외치는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다.
벽의 색에 따라 홍궁과 백궁으로 나뉘는데 역대 달라이 라마의 등신불과 법당을 모신 홍궁은 대부분 개방되어 있지만, 현재 행정동으로 사용되는 백궁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인원초과로 두 팀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관람할 수가 없다. 한 팀은 노브린카로 향하고 우리 순천팀은 포탈라궁으로. 짧은 시간에 두 팀이 번갈아가며 두 곳을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탈라궁엔 역대 달라이라마의 영탑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 업적이 가장 많은 5대 달라이라마의 영탑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업적에 따라 영탑 크기가 다르다니, 어느 세계나 차별은 있는 모양이다. 6대 달라이라마 영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신을 찾지 못해 영탑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 라마는 태양으로 비유된다. 겔루크파의 한 제자로, 종교적·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현재 14대까지 환생했으며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하여 망명정권을 수립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여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포탈라궁 바닥은 돌을 깔아놓은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아까 조캉사원 3층에서 보았던 노래 부르며 바닥을 다지고 있던 그 모습. 그런 식으로 돌과 흙을 다져 만든 것이라지 않는가. 대단하다. 얼마나 찧어댔기에 이렇게 반질반질한 바닥으로 거듭났을까. 하긴 피라미드와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인간의 힘은 위대하다고 할 수 밖에….
두 팀이 서로 바꾸어 우린 노브린카 사원으로 갔다. 이곳은 달라이라마의 여름 별장이다. 수목이 우거지고 우리의 ‘비원’같은 곳. 꽃이 만발하고 작은 호수가 있고, 우린 벤치에 앉아 모처럼 여유를 부린다. 먹거리는 어느 곳에서나 화기애애한 원천. 그늘에 앉아 나누는 담소는 결코 여행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것. 배낭여행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이겠지. 언어만 통한다면 제발 이런 기회를 한없이 가져볼 텐데. 이것은 나의 변명에 불과할 뿐, 내가 저항하려 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아마 용기일거야.
한 걷기 애호가가 이런 말을 했다지. “우리가 저항하려 한 것은 삶과 풍경의 파편화였다.”
지친 하루를 마감하고 티벳의 음식을 앞에 놓고 민속음악과 민속무용에 심신을 달랜다. 향이 진한 음식들, 해골로 장식된 양고기, 새로운 것들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지만 음식만큼은 예외다. 세월이 묻은 만큼 혀끝을 달콤하게 해주는 우리의 먹거리, 미치도록 그립다. 중국음식의 느끼함, 김치가 아른거리고 고추장, 된장으로 싸먹는 푸성귀, 엄마 품처럼 다가온다.
8월 3일 넷째 날 (라싸 - 바송초 - 링즈)
오체투지의 그 생생한 경험을 뒤로하고 링즈길에 올랐다. 드디어 티벳고원의 지프 트래킹이 시작된 날이다.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체조를 끝낸 후 다들 모였다. 네 명씩 8개조로 나뉘어 조장이 대표로 지프를 뽑는다. 우리 팀은 가장 나이어린 정규를 내보냈다. 젊은 혈기로 가장 새 차를 뽑아보라고. 3호차다. 양경연 선생님 내외는 박수를 치고 환영한다. 알고보니 가장 낙후된 차가 아닌가. 난 그것도 모르고 덩달아 좋아했으니. 창문 한 짝은 열리지도 않고 모든 것들이 시금털털해 과연 울퉁불퉁한 비포장의 2천km가 넘는 그 길을 제대로 관통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또한 기사들 중 가장 말이 없는 남자. 농담 한마디 던질 줄 모르는, 웃음기마저 없는 무뚝뚝한 사나이. 이 사람과 11일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
2, 3일이 지나자 다들 차내 식구들과 정이 담뿍 들고 한 번쯤 제비뽑기를 다시하자며 갈망했던 우리도 기사와의 정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5000m의 고도를 지나 바송초로 가는 길. 원시림이 긴긴 세월의 실타래를 하얗게 매달고 신비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연과 인간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나무가 우거지고 물이 철철 흐르는 곳에는 여지없이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나이 들어 이런 곳에 산다면….
집집마다 장작더미의 울타리. 옛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아마 도시사람들은 연탄을 듬뿍 들여놓으면 혹독한 겨울의 추위가 무섭지 않았던 것처럼, 시골 사람들에겐 장작을 패서 더미를 만들어 놓으면 한시름 놓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역시 이곳은 수목이 풍부해 땔감으로 장작을 사용한 모양이다. 동물을 가두는 나무 울타리도 철사줄로 엮어 만든 우리의 산속 정취와는 사뭇 달라 정겹다.
경전을 쓴 헝겊들, 높은 언덕에는 어느 곳이나 휘날린다 경전을 쓴 헝겊들, 높은 언덕에는 어느 곳이나 휘날린다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는 사월 초파일 절에 연등을 달아놓은 듯 어김없이 경전을 쓴 형형색색의 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서낭당을 연상케 한다. 기사들이 티벳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들 또한 그곳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천을 사서 그곳에 매달고 통과한다고 한다. 여덟 명의 기사가 모두 중국인이어서 천을 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달려 바송초(초는 호수를 뜻함)로 가는 대로에 느닷없는 매표소가 있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우린 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정차시켜놓고 모두 내려 주위를 구경하고 있는데 여러 대의 차량이 아무 거침없이 그곳을 통과하지 않는가. 다들 공안 차량들이다. 중국에서는 공무원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특히 경찰, 군인들의 위세가 그렇다. 교통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기세등등하게 무법자처럼 딱 버티고 서면 그 차를 비켜가기 위해 길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일쑤다. 권력을 이용해 교통을 혼잡 속으로 몰아넣는 주범들이 바로 경찰들이다. 모든 차들은 그 앞에서 꼼짝없이 비켜줘야만 하니까. 가난한 나라일수록 권력의 힘은 대단한가.
바송초 가운데는 절이 있다. 육지와 그 절을 연결해주는 다리는 뗏목이다. 뗏목을 걸어 들어가는 맛이 별미다. 어떤 것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꼭 튼튼한 교량만을 생각하는 고착된 사고가 빗나가는 순간이다. 둥둥 떠 있는 뗏목의 다리, 한층 바송초를 빛내준다. 티벳에서 큰 호수에 끼지는 못하지만 운치 있는 이 다리 하나로 내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 될 것이다.
8월 4일 5일째 (링즈 - 루나링하이 - 뽀미)
링즈를 떠나 굽이진 퍼런 강물을 따라 계속된 길을 달려 써질라(라는 산이라는 뜻)4000미터를 넘는다. 만년설이 녹아 흘러가는 강물은 유난히 옥색이다. 그 옆으론 쭉쭉 뻗은 고산목이 우거져 강원도 대관령을 넘는 기분이다. 이런 길은 걸어서 자연에 몸을 내맡긴다면 금상첨화 텐데. 조그만 차창으로 비치는 조각난 풍경이 못내 아쉽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1호차가 서고 나머지 차들도 차례차례 서는데 우리 기사는 그곳을 스쳐 마구 달린다. 그곳이 난자바와봉이 가장 잘 바라보이는 곳이란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는 무표정한 인솔자의 말에 서운함은 덜했지만, 재미있는 것은 인솔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곳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난자바와봉 전망대인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인솔자의 무성의가 매일같이 진행된다면 여행의 참맛을 반감시키겠지.
Lulang forest sea(루랑시엔 전망대)를 눈앞에 두고 우린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성 녹차 밭을 연상시킨다. 저 아래로 펼쳐진 숲,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원주민들은 사진을 찍기 위한 소품들을 가지고 나와 집적댄다. 경치가 좋은 곳엔 여지없이 귀찮게 구는 아이들이 있다. 습관처럼 손을 벌려 구걸을 한다. 아름다운 정경에 먹칠을 하는 이런 행위들은 혹 여행객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아닐지.
우린 항상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도 모른다. 우리의 잣대로 그 사람들의 행불행을 점치는가도. 그리곤 선심을 쓰듯 몇 푼을 던진다.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의 맑은 영혼을 서서히 죽이는지도 모르겠다.
뽀미로 들어서기 전, 조그만 마을에서 우린 점심을 했다. 그 지방은 버섯으로 유명하단다. 우린 부엌으로 들어가 물에 담겨 있는 여러 종류의 버섯에서 대충 어림잡아 몇 개를 반찬으로 주문했다. 우리와는 달리 접시마다 가격을 매긴다. 밥도 나무로 만든 말처럼 생긴 조그만 통에 10위안을 받는다. 아마 밥 한통이면 7, 8명은 충분히 먹을 것이다. 향을 빼서 주문해 모처럼 씻은 후의 접시처럼 깨끗하게 비울 수가 있었다.
송이버섯을 팔러온 아이들이 있었다. 곧바로 흥정에 들어갔다. 가격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폼이 어린이답지 않다. 상인들의 후예답게 솜씨가 능숙하다. 포항 선생님이 30위안에 낙찰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돈을 내는 순간 갑자기 50위안을 주란다. 나무래도 소용없다. 여유 있게 관망하더니 출발을 서두르자 또다시 협상을 걸어온다. 결국 30위안에 내놓는다. 비닐봉투 가득 우리 돈으로 4천원도 안 되는 자연 송이버섯, 무척 싸다. 하지만 그 애들은 넉넉히 받아간 셈이다.
뽀미로 가는 길은 어느 곳에나 집 한 채만 지으면 훌륭한 별장이 된다. 내내 포장이던 도로가 가장 험악한 곳에 이르자 비포장으로 돌변한다.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에 몸을 맡기고 비경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특히 ‘하늘아래 가장 위험한 곳’이란 뜻을 가진 바이롱텐시엔을 지날 때는 나무 다리위로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야만 했다.
엄청 긴 나무다리를 지날 때는 트럭 한 대만이 그 다리위에 올라 우리의 걸음 속도로 지나가야 한다. 나머지 트럭들은 지친 병사들 마냥 넋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그곳 관리직원의 배려로 우리 지프 8대를 먼저 가도록 해주었다. 다리위에서 아까 보지 못한 만년설을 바라보며 티벳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가는 길은 내내 계절이 여러 번 바뀐다. 우박이 내리고 무지개가 피고 하더니 하늘의 먹구름이 갑자기 소나기를 퍼붓는다.
길거리엔 소나 돼지, 말들이 나와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산책을 하듯이 어슬렁대는데 사정없이 눌러대는 클랙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네들끼리 나와서 노닐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곳의 모든 울타리들은 원시림을 켜서 만든 안팎이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운치 있는 자연 그대로이다. 너른 언덕이나 들판에는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있고, 그 안에 풀을 뜯는 야크나 소, 말들은 한가한 전원의 한 폭 그림처럼 다가와 우리를 평화속으로 이끈다.
뽀미에 들어서는데 하늘의 먹구름이 굵은 소나기가 되어 심란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방배정이 끝나고 밖을 내다보니 금세 하늘은 푸르고 쌍무지개를 피워놓았다. 티벳에서는 몇 방울의 비만 뿌려도 무지개를 만든다. 여러 번 놀래키던 그 무지개다리를 건너 우주 저 끝까지 가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칠흑 같은 밤하늘엔 반달이 자상한 어머니처럼 포근한 미소를 짓고 그 옆엔 옹기종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빛을 발하며 별들이 속삭인다.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밤새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는 밤을 지새는 이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8월 5일 6일째(뽀미 - 미도시앙 - 란우후)
산사 같은 숙소의 낙숫물소리와 함께 눈을 뜬 이른 아침 팀들과 다양한 리듬체조를 했다. 시장에 가서 풍성한 먹거리들, 야채, 과일, 송이버섯, 각종 특산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럽고 입맛을 돋운다. 토마토를 저울에 달아 하루치 분량을 사고, 붉은 자두 한 봉지와 1위안으로 오이 세 개를 샀다.
잘 닦인 아스팔트길을 지나자 40킬로미터의 비포장도로가 절벽에 흙으로 살짝 뒤덮인 큰 바위들로 가득하고 입김만 살짝 불어도 머리위로 굴러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바위들도 비경에 빠진 나의 혼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는데 사방의 비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중앙에 운동장 같은 공터가 있다. 가는 길에 식당이 없어 대충 점심을 해결하고자 이곳에 멈추었다.
그런데 숫산양의 사랑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뿔을 내리치며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힘겨루기는 어느 세계나 존재하는 복잡 미묘한 삼각관계다. 패자는 반드시 있는 법. 흰 제비꼬리턱수염이 슬프디슬픈 울음소리로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눈요기꺼리가 끝이 났다.
란우후에 도착했다. 란우후는 이 지방의 조그만 호수다. 옆 너른 들판엔 여러 개의 천막들과, 민속 악기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바로 장족 중에 캉바족들이다. 1년에 한차례씩 모여 민속축제가 열리는데 이번이 3회째란다. 운 좋게 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캉바족 남자들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동여매고 다닌다. 싸움도 잘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단다. 또한 자존심도 매우 세다. 우리의 동참을 허락해주었고 또한 시간을 내서 어울림을 만들어준 보답으로 작은 사례금을 전달했는데 단호히 거절한다.
강강수월래처럼 원을 그리며 민속춤을 추는데 우리도 한몫 끼어 춤을 추었다. 서로의 색다른 모습에 신기해하며 춤과 음악은 한층 무르익고 금세 친해지는 것을 보면 종족은 달라도 마음만은 똑같은 모양이다.
저 멀리 지평선 끝으로 아득히 호수가 보이고 에델바이스와 노오란 야생화가 널려있는 푸른 들판에서 사람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야릇한 포즈를 취해보고 싶다며 승마를 타고 푸른 들판을 누벼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두 여선생님의 씨름판이 벌어지고 군데군데 나뒹구는 소똥에도 축제는 무르익어 모처럼의 체험이 마음을 달뜨게 했다.
바쁜 것만이 많이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소소한 흥겨움은 결국 느림에서 얻어진 결과이리라. 캉바족의 삶, 인간성,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은 똑 같다.
칠흑 같은 밤, 거의 꽉 찬 둥근 달과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바라보는 숙소의 마당에는 흑돼지 바베큐 파티가 벌어졌다. 낮에 한참을 어울렸던 캉바족과 함께.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캉바족의 토속술이 몇 순배 돌고 한쪽에선 소주가 좋다며 흘끔거리며 마셔대고 다들 분위기에 취해 타오르는 장작불의 열기만큼 흥분되어 갔다.
두 번째 만남은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고, 한바탕 캉바족 민속축제가 열리고, 우리의 화답도 이어졌다. 끼 있는 우리 팀의 여자들은 여러 가락에 맞춰 막춤을 흔들어대고 신기한 그 모습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을지라도 축제 한마당만큼은 인종도 국가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정규는 모처럼 영어를 잘하는 동갑쟁이 군인 장교를 만나 신이 났다. 벌써 메일주소를 주고받고, 이런 것들은 춤과 노래가 있었기에 교류가 쉽게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유난히 까만 고원의 밤, 축제 한마당으로 달구어진 몸은 잔잔한 호수처럼 깊은 잠에 빠져든다.
8월 6일 7일째 (란우후 - 난자바와봉 - 링즈)
여행은 새로운 것을 꿈꾼다. 오늘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코스다.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 달라져간다 할지라도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산과 숲, 이것들은 그다지 변화가 없다.. 엊그제 지나갔던 그 길을 되돌아오는 것만큼 따분한 게 있을까.
오직 난자바와봉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 번 지나갔던 배경은 시선을 시들하게 만든다. 큰 기대는 걸지 않았지만 난자바와봉의 전망대에 서서 구름에 가린 그 이름을 애타게 불러본다. ‘한 번만 제 모습을 보여 달라고.’
티벳은 이른 아침에 모든 산들이 옷을 벗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어쩌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으레 머리를 돌려 사방을 둘러본다. 하나도 가리지 않은 발가벗고 서있는 그 자태. 하지만 게으름이 그런 기회를 여러 번 주지 않았다.
심술궂은 구름만을 탓하며 산으로 오른다. 야생화 천지다. 고원의 자잘한 야생화들! 강인한 생명력으로 꼿꼿하게 고개 내민 각양각색의 야생화들만큼 나또한 질긴 인내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8월 7일 8일째 (링즈 - 랑시엔)
리듬체조로 몸을 풀고 두 번째 똑같은 호텔의 문을 나선다. 루랑시엔 전망대를 다시 지나 두껍게 쌓인 분진의 도로를 한없이 달린다. 코가 맵다. 문을 열지 않아도 안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먼지! 위력이 대단하다. 금방이라도 진폐증에 걸릴 것만 같다. 탄광촌을 달리는 기분이다. 차 한 대라도 지나치면 한참을 풀풀거리며 날리는 안개 같은 짙은 어둠속을 헤매게 된다. 길 옆 벼랑에 겨우 미미한 흙으로 뒤덮여 매달려있는 거대한 바위들, 길 아래론 소나기 한 번만 쫙 내려도 휩쓸려버릴 것 같은 절벽, 요철의 노면위에 마구 몸을 흔들어대는 지프가 그저 무시무시하다.
미링시엔에 도착했다. 흩어져 각자 점심을 해결한다. 가는 곳마다 있는 호떡집! 하나씩 사서 입에 문다. 팥이 들어있는 찐빵 같은 호떡. 맛이 새롭다. 아마 티벳에서 모든 호떡은 다 맛보지 않을까.
시장구경을 갔다. 어렸을 때 먹지 않았던 여자, 신생아 머리통만한 수박, 팔 길이의 긴 오이, 자잘한 홍옥처럼 빨간 사과, 개복숭아, 똘감만한 배, 그야말로 우리네 5일장 풍경이다. 무공해 같은 식품들. 껍질째 잘근잘근 씹어보고 싶다.
티벳 고유의상을 만드는 의상실에 들어갔다. 제법 예쁜 웃옷이 걸려있는데 가격을 물었더니 팔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거친 후에야 ‘팔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의사 소통이 안 된다는 것, 이렇게 힘들 줄이야. ‘바디랭귀지면 다 통한다.’ 순전히 거짓말이다.
밥 먹는 시간을 많이 허비하다가 외국인인 우리 때문에 그곳 경찰들의 검문을 받았다. 미링시엔을 거처가도 좋다는 허가증이 없다고 트집을 잡는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뿌리인가. 비자 발급이면 되었지 무슨 가는 곳마다 허가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현지가이드가 다시 링즈로 되돌아갔다. 그곳 기관에서 허가증을 받아오기 위해서다. 나중에 그 허가증을 제출하기로 하고 우린 앞서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사구가 펼쳐져 있다. 3150m의 이름 없는 사구! 1시간 도보 트래킹을 한단다.
인솔자가 겁을 준다. 언젠가 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갔다가 4시간을 헤맨 사람이 있었다고. 사구 걷기도 한창 열을 올려 설명한다. 지그재그로 걸어야 한단다. 다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접근한다. 발을 옮겼는데 아무렇지 않다. 지그재그로 가지 않아도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도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는다. 새로운 경험은 상대에게 넘어가기 쉽다. 겁먹은 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다.
반장이 앞장서고 일행들이 뒤따른다. 부산에서 사업을 한다는 반장은 행여나 미아가 될까봐 걱정스러운 듯 찻길이 보이는 편편한 모래언덕만을 따라 걷는다.
암만 보아도 별 것이 아닌데 줄지어 따라가는 것이 우스워 난 대전의 젊은 부부교사에게 다가가 가운데 높은 모래 언덕을 걸어보자고 제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장님을 따라가야죠.’ 한다. 참으로 착한 학생 같다.
정규와 둘이서 중앙의 가장 높은 모래언덕으로 올라갔다. 미아가 되기는커녕 협소한 뒷동산이지 않는가! 미리 겁먹고 줄지어 걸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 저런 것 아니었나 싶었다. 타인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결코 아니다.
서울 교감선생님께서 발자국 없는 사구의 아름다운 무늬를 사진에 담아주겠단다. 멀리 돌아 카메라 앞에 섰다. 바람이 만들어낸 무늬들이 정말 아름답다. 모래 언덕에 누워 바라보는 푸른 하늘이 더욱 싱그럽다.
깊숙한 곳에는 해골이 누워있다. 정규는 전공을 살려 두개골을 손으로 붙잡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도와주었다. 수장했을 거라고 하는데 그 형태로 보아 조장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티벳은 거의가 조장을 하는데 어린이나 병자들은 매장을 한단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도보를 하고 키 작은 나무 그늘 속으로 모두들 들어가 담소에 빠졌다. 기사들은 약간의 틈만 생겨도 카드놀이를 한다. 현지 가이드가 되돌아왔다. 같이 갔던 1호차의 두 아가씨에게 사구트래킹을 시켜준다며 그렇잖아도 지루한 기다림을 더욱 지루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기사들은 비포장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번 돈을 카드로 허비하고, 우린 그들의 얼굴 표정으로 누가 많이 잃었는지 점쳤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가장 좋은 것이 그것일까. 우리나라 기사들도 좋아하는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에는 가족들의 아픔이 클 것 같다. 참으로 단순한 삶이다.
몇 백 년 쌓인 것 같은 두터운 먼지층을 지나 둥근달이 산마루에 걸려 있을 즈음 랑시엔에 도착했다. 주위는 온통 어둠이 묻어나고 산의 실루엣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산마루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달빛이 아늑함을 더해 추석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호텔 옆에는 ‘매력 가라오케’라는 간판이 걸린 노래방이 있다. 핏대를 올리며 불러대는 노랫소리가 잔잔한 달빛에 감도는 여운을 날려버려 못내 서운하다. 중국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불러대는 노랫소리는 처음이다. 언젠가 장가계에 갔을 때 물가에서 소음을 날리며 굿판을 벌리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 깨끗한 물이 수없이 흘러가는 그 많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는 모습을 난 중국에서 본 일이 없다. ‘우리도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얼마나 애타게 원했던가!
오늘 밤은 네 사람이 잠을 자야한단다. 3층 특실로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 낙후에도 정규와의 잠자리가 편할 것 같아 다른 호텔을 원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1층 직원들의 후진 방으로 서울 교수님댁과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공동 화장실에 공동 목욕탕.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란하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에 머리는 겨우 감았는데, 온종일 뒤집어 쓴 먼지는 씻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동안 꿈꾸어왔던 배낭여행. ‘잠자리는 문제없어.’ 누누이 읊조렸던 그동안의 나의 여행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화장실은 들어서자마자 배출욕구가 사라지고 1주일째 변비가 계속된다. 덤블링을 하면 좋을 것 같은 침대, 하염없이 울어대는 늑대 울음소리, 납량특집으로 까맣게 밤을 지새운다.
소리 없는 저 해맑은 달빛은 이 마음을 알기나 할까.
8월 8일 9일째 ( 랑시엔 - 산나)
8시 출발한다더니 10시가 가까워서야 출발했다. 오늘도 엄청난 먼지밭을 달려야 한다. 켜켜이 쌓인 먼지층. 밤이면 목에서 코에서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까만 가래에 섞인 먼지! 이곳 사람들은 먼지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차가 지나가도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우린 먼지를 피해 저 멀리 오는 자동차만 보아도 미리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넋 놓고 먼지구덩이에서 바라보는 호기심의 똘망똘망한 눈들. 아이들은 어김없이 손을 흔들어준다. 시골로 들어갈수록 순진한 아이들, 그야말로 이 아이들이 내겐 자연이다.
물이 촬촬 흘러내리는 냇물 저편 언덕에 여러 봉우리들이 솟아있는 바위산이 구름을 머금고 있다. 금강산의 만물상 한쪽을 떼어다 놓은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서유기 촬영지란다. 바위에서 손오공이 통통통 뛰어다니는 곳. 바로 그곳이다.
노상방뇨는 이젠 습관처럼 되었다. 어디든 엉덩이만 감출만한 곳이 있으면 한쪽에선 일을 보고 그 옆에선 사진을 찍고 스스럼없이 되어갔다.
먼지를 일으키며 한참을 달리다가 면소재지정도의 조그만 마을로 접어들었다. ‘치아차’란 곳이다. 소수민족 중에 회족이 많이 사는 곳이란다.
어느 집 마당가에 앉아 빵과 양배추, 사과로 배고픔을 달랜다. 정규는 꼬마애들과 공놀이를 하더니 축구 묘기를 선보인다. 얼마나 공을 가지고 놀았으면 저런 다양한 묘기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새삼스럽기만 하다. 초등학교 때 축구만 하고 살았다더니.
또 시장구경에 나섰다. 홍옥처럼 빨간 사과, 얼마나 작은지 한입 베어 물면 그만일 그 사과를 4위안어치 샀다. 정규는 노란 캔에 든 드링크가 마시고 싶어 안달이다. 기사가 매일같이 먹었단다. 난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그 애 눈에는 자주 보였던 모양이다. 사람은 관심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한 걸까. 결국 6위안 주라는 걸 5위안으로 깎아 한 개 샀다. 박카스 맛이다. 돌아가며 일행들이 맛만 보았다. 다시는 사먹지 않겠단다.
이 녀석 호기심은 항상 채워줘야 한다. 어렸을 적 피워보고 싶어 안달이던 담배를 물려준 적이 있었다. 한 모금 빨아보더니 그 후로 다시는 입에 대지 않는다.
술은 세 살 때 얼굴이 빨개지도록 먹였는데 휘청거리며 걷는 폼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아직껏 술을 잘 마시는 것 보면 그때 크게 혼나지는 않은 것 같다.
뭔가를 해본다는 것. 실은 별것 아닌 것들을 우린 얼마나 자제하도록 배워왔던가. 스스로 해보도록 하는 교육. 그것이 바로 섬머힐 학교의 프로그램일 것이다.
정규가 어딘가에 맛있는 튀김이 있다고 조른다. 3위안어치를 샀는데 까만 비닐봉투로 가득하다. 여러 사람이 나눠먹고도 남아 결국은 지프 뒤에서 나뒹굴다 버려졌을 것이다.
5684m의 무단라 봉우리! 흙먼지 풀풀 날리는 지그재그의 좁은 도로를 오른다. 대형트럭들이 나타나면 사자 앞에 고양이 같은 신세가 되어 비켜서야 한다. 큰 트럭들이 그 도로를 따라 줄지어 필수품들을 운반하는 걸 보면 길이 이것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지름길인지 잘 모르겠다. 중국어는 맹탕이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라크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체리향기’의 그 지루한 길이 연상된다.
무단라 봉우리와 같은 높이의 눈앞에 만년설이 있다. 발에 힘주어 한 번만 툭 튀어 오르면 그곳에 닿을 것 같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데 의외로 심장이 무거워진다. 가만히 있는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한참을 오른 것처럼 숨이 찬다. 이것이 바로 고산증이다.
이곳에서 도보 트래킹을 한다더니 1호차가 말없이 떠나버린다. 정말로 입 무거운 사람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자. 이것도 여행의 한 귀퉁이에 넣어두자.
그 서운함을 달래며 자이언트캐년에 도착했다. 미국의 그랜드캐년보다 더 멋있다며 야단들이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경관. 해식애. 인간이 이토록 거창하게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먼지구덩이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진다.
여기저기에서 집을 짓느라 부산하다. 돌집과 흙집들. 그리고 시멘트집. 주민들 모두가 나서서 집을 짓는다. 마을마다 똑같은 집이 들어선다. 공산당시절 개성 없이 살아온 결과일까.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짓는다는데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부랴부랴 팬션처럼 짓는 모양이다. 어쩜 중국의 이주대책은 아닐는지.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이 지었다는 돌집. 나도 언젠가 그런 집을 꼭 지어보고 싶었지. 도로공사도 한창이다. 대부분의 비포장이 포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이곳에 오면 지금처럼 고생은 덜하겠지만 운치 있는 관광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덜컹거리는 지프에 엉덩이가 아파오지만 그만큼 서서히 자연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잘 닦인 아스팔트 위를 씽씽 날리며 보는 자연은 싱그럽긴 하겠지만, 자연이 깊숙이 내게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관에 들어섰다. 찌앙모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시간을 때운다. 야크유에 로즈마리를 섞어 만든 차다. 가이드가 공사 중인 도로를 지나가도 될 것인가를 확인하러 갔기 때문이다.
중국 기사들은 시간보다 돈이 우선한다. 엄청난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꼭 지름길을 고집해 기름 값을 절약하려고 든다. 우린 그때마다 몇 시간씩을 길바닥에 깔아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낮에 와서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지 않는가.
티벳은 온통 당구 붐이다. 길거리마다 놓여있는 미니 당구대. 정규에게 당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포켓볼이란다. 몇 개 집어넣었는데 참으로 흐뭇하다. 비록 정규에게 참패를 당했을지라도. 뭔가를 배운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즐겁다.
4시간의 무료함이 끝나고 드디어 산나의 숙소에 들었다. 다행이 낮의 지루함을 보상이라도 받듯 이제까지의 숙소 중에 가장 좋다. 기분이 달아오르는 걸 보니 잠자리가 중요한가 보다. 노곤함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물에 녹아내린다.
8월 9일 10일째 (산나 - 카로라 - 장체 - 시가체)
어제 관람하지 못했던 융부라캉으로 향했다. 옛 궁전인데 지금은 포탈라궁으로 옮기고 이젠 약간의 관광객을 맞고 있을 뿐이다. 성은 별 것이 아니지만 주변에 펼쳐진 들판이 황금물결을 이루어 옛 영화를 되살려준다.
걸으면 20분도 안 될 그곳을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말을 타고 오른다. 난 모처럼 맞은 걷기가 신이나 말똥을 피해가며 부지런히 오른다.
어디가나 휘날리는 헝겊들. 꼭 우리네 점집 같은 분위기가 이곳에도 어김없이 펼쳐진다. 향냄새가 진동하고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고. 똑같은 풍경이다. 뒤 언덕자락엔 경전을 쓴 헝겊들이 얼룩덜룩 휘날린다.
대부분의 가정은 대나무나 여러 나무를 옥상에 묶어 그 끝에 헝겊을 매달아 울긋불긋 지붕위에서 펄럭이고 있다. 이것이 티벳의 마을 풍경이다.
티벳에서 세 번째 안에 든다는 에메랄드빛 얌드록쵸로 가고 있다. 갑자기 차가 멈추더니 기사들이 데모를 한다. 인솔자가 얌드록쵸를 빼먹으려고 한 것이다. 거리수로 계산되어 지급받는 기사들은 당연히 싫을 것이고, 우린 에메랄드빛 호수에 달뜬 기분이 망가지는 순간이다.
계획을 수행하는 것은 인솔자의 몫이다. 외국에 나가서 자주 보는 우리의 여행 풍경이 지금 벌어지려고 한다. 완전한 여행 문화의 정착을 언제쯤 기대해볼까.
언젠가 여행은 뒷전이고 그 황금 같은 시간에 반나절을 침대에 누워 전신 마사지를 한 적이 있다. 이런 관행은 일정한 수준의 월급을 준다면 없어질까. 마사지실에서 난 한 번도 백인들을 본적이 없다. 유일하게 한국관광객들만이 집단으로 몰려들어 굿판을 벌린다.
그게 싫어 이번엔 옵션과 쇼핑이 없는 이곳을 택했다. 그랬더니 편파적인 인솔자의 행위로 또다시 먹구름을 끼얹는 것이 아닌가. 언어소통만 가능하다면 홀로여행을 떠날 텐데.
이래저래 오늘도 길바닥에 2시간을 깔았다. 결국 얌드록쵸로 향할 것을. 찝찝한 가운데 얌드록쵸의 푸른빛이 마음을 파고든다. ‘그래, 훨훨 날려버리자. 너로 인해 내 여행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 자연은 푸르고 내 꿈도 푸르지 않는가. 저 얌드록쵸만큼.
이곳을 지나 카로라 빙하로 가는 길은 무릉도원처럼 아름답다는데 공사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이젠 그의 말도 신빙성이 없다. 어쩌겠는가. 늑대소년 말을 믿을 수밖에.
시가체는 티벳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이곳의 명물 타쉬룬포사원으로 들어섰다. 입장시간이 끝나버렸다. ‘얌드록쵸를 생략했더라면 입장할 수 있었겠지만.’ 인솔자의 말에 잠깐 동요가 인다. 그런 모습에 정규는 그만 기가 질린단다. 교사들의 순진함에 넋이 나갈 지경이란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그 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접하는 것이 아닌가. 실은 다음날이 예정인 타쉬룬포 사원을 보기위한 것이 꼭 얌드록쵸를 생략해야 가능한 일인가.
인격이란 하루아침에 다듬어지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형성되지도 않는다. 사고는 자신의 인격범위 안에서 노는 것이 아닐까.
결국 시가체의 명소 풍물시장으로 향했다. 각종 물건들이 즐비해 꽤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거기서 만난 한국인 젊은 여대생. 얼마나 반가운지 한참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단체 배낭을 왔단다. 저 푸른 하늘처럼 높게만 보인다.
8월 10일 11일째 (시가체 - 츄오라 - 라쯔 - 지아추라 - 뉴팅그리)
시가체의 명소 타쉬룬포사원을 들렀다.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첸라마를 모셔두는 사원인데 89년 입적한 10대 판첸라마의 미이라가 안치되어 있단다. 티베트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는 겔루크파인데, 이 파의 두 제자가 판첸라마와 달라이라마다.
현재 판첸라마는 11대까지 환생했다. 이들은 입적 후 환생자를 찾아내고 나이 많은 쪽이 돌아가며 스승이 된다. 달로 비유되는 판첸 라마는 중국 정부와 북인도 망명정부가 각각 임명해 두 명인데, 현재 각각 베이징과 북인도에서 공부하고 있다.
중국의 1/8이나 되는 땅덩어리 티벳! 막대한 지하자원과 수력발전 자원, 풍부한 산림과 끝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하루빨리 독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무엇보다 티벳인의 정신과 전통문화 그리고 언어가 사라질까봐 걱정스럽다.
티베트인들은 불교 지도자들이 떠나버린 사찰에서도 쉴새없이 마니륜을 돌리며 티베트 불교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환생을 믿는 이들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불전에는 야크버터를 공손히 떠서 바친다. 그래서 어느 티베트 사찰에건 버터를 연료삼아 타들어가는 매캐한 초냄새가 코를 찌른다.
티베트인에게는 생활이 불교이고, 불교가 생활이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사람들은 순례자들 틈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사원의 뒤편 햇볕이 잘 드는 언덕에는 탱화를 말리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1년에 한차례 말린다는데 금년은 7월에 3일 동안 말렸다고 한다. 그때 이곳을 들린다면 볼만하겠다. 거대한 탱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이때 말고 또 있겠는가.
법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머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종이 매달려 있다. 들어가면서 그 종을 치고 들어가면 된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께 ‘나 여기 왔어요.’ 라고 알리는 거란다. 호기심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다들 신이 나서 한 번씩 울려본다.
법당 안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오려는데 많은 티벳인들이 두 스님이 앉아있는 앞으로 가서 내리치는 막대로 머리를 맞는다. 난 그냥 나오다가 어쩐지 서운해 다시 되돌아가 스님에게 머리를 맞았다. 어떤 의식인지도 모르는 채. 카톨릭의 의식과 비슷한 것일까.
문턱을 막 넘어 밖으로 나오려는데 한 여인이 비좁은 시멘트 바닥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법당 앞에서도, 달라이라마 앞에서도, 판첸라마 앞에서도 어디서든 서슴없이 한다. 우리 눈에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사원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조장터가 보고 싶다. 한비야의 책에서도 TV에서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는 것만큼 실감이 나겠는가.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티벳은 지금도 80%가 넘게 3일장으로 조장을 한단다. 땅이 좁아서가 아니라 민둥산의 땔감 부족으로 부적합한 화장과 토양의 특성상 시신이 썩는데 100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독수리한테 먹임으로서 그들의 영혼이 하늘로 승천토록 하는 나름대로의 장례풍습을 고수한 것이란다.
시체를 엎어놓고 등뼈를 가른 후에 내장을 꺼내고 나머지를 도막낸 후 연기를 피우면 독수리들이 내려와 먹어치운단다. 내장은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라서 다 먹고 난 후에 마지막에 준단다. 물론 이 작업은 천한 신분의 돔덴이 한다.
여기서 재밌는 애피소드 한마디! ‘오직 못된 짓을 많이 했으면 새들도 먹지 않을까.’
조장터는 지방마다 있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이 조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단다. 사진도 찍을 수가 없고. 이것은 어떤 권력가의 조장에 몰려든 관광객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언쟁이 빚어져 그 후 정부정책으로 변화된 것이란다. 이렇듯 빠른 변화는 힘 있는 자에게서 온다.
장체로 가는 길은 한참을 아스파트 위를 달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냇물을 타고 흐르는 구불구불한 푹 패인 흙길로 접어든다. 말안장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가 아프다. 냇가에는 개들이 몰려 야크를 뜯어먹느라 한창이다. 생사를 걸고 엉겨 붙어 있는 양이 싱싱한 고깃덩어리임에 틀림없다.
험악한 흙길을 먼지를 뒤집어쓰며 돌진하는데 옆으로 솟아있는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띈다. 스쳐가듯 지나가버린 아쉬움으로 대로의 아스팔트길을 한 바퀴 돌자 바로 전 아쉬워했던 그 건물이 눈앞에 우뚝 솟아있다. 바이쥐사(白居寺)이다. 이곳은 1418년에 창건되었는데 그 당시엔 샤카파에 속했으나 요즘은 여러 종파의 스님들이 공존하며 지내는 절로 유명하단다. 우리도 본받을만한 점이다.
이곳은 조각과 벽화로 유명하다. 사원은 세 나라의 불교양식을 합해서 건축했다. 아래는 티벳, 중앙은 중국, 상단부는 네팔 건축물이다.
사원은 빙빙 돌며 법당이 있는데 한 칸 한 칸 돌면서 위로 올라야 한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의 조각들이 대단하다. 그 불상을 벽의 중심에 배치하고 그 주변을 다른 그림들로 완벽하게 그려나갔다. 특히 우리나라 불상으로 치자면 불상 뒤에 후광을 나타내는 광배의 다양한 조각들의 뛰어난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똑같은 조각과 그림은 하나도 없다. 이곳의 조각과 벽화는 포탈라궁을 장식한 예술가들의 스승들 작품이라고 한다. 천하의 일품으로 세계불교미술사에서 손꼽는 명화들이다.
히말라야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뉴팅그리로 가기위해 고도를 오른다. 들판이 아름답다. 메밀밭이 강원도의 봉평처럼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지는 노란 유채꽃과 분홍 메밀꽃의 평원,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드넓은 평원에 온몸을 던져보고 싶다. 저절로 힘이 난다. 씽씽 날아버리는 1호차가 밉다. 자연에 취할 줄 하는 멋스러운 사람이 여행 전문가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농가를 지나는데 마당가에 설치된 접시안테나처럼 생긴 둥그런 반사판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 설치된 집열판이다. 태양열을 모아서 불씨를 만들고 물을 끓인다. 참으로 지혜로운 광경이다. 성냥이 없으면 그야말로 깜깜한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우리의 옛 정경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또한 시장 풍경은 어떤가? 하나같이 막대저울에 물건을 올려 가리키는 눈금에 단가를 곱해 계산한다. 대충 어림잡아 값을 매기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자연처럼 느슨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 생활 속 풍경들이 실로 과학적이지 않는가. 비록 얼굴 피부가 벗겨지고 빨갛게 타올라 원시인의 표정임에도 개성상인들만큼 뛰어나고 정확한 상술을 가진 것이다.
히말라야 쪽으로 접근할수록 산들이 민둥산이다. 원시림에 파묻혀 살고 있는 마을들은 장작을 패서 울타리를 멋스럽게 만들었더니만, 이곳은 온 천지가 야크똥이다. 야크똥에 볏짚을 썰어 넣어 반죽을 해서 담벼락에 호떡처럼 덕지덕지 붙여놓았다. 겨울철에 하나씩 떼서 연료로 쓴단다. 티벳에서 야크만큼 쓸모 있는 동물이 또 있을까.
아, 이날 파격적인 사건 하나. 차들이 아스팔트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차를 세운다. 중국의 고위공무원이 잠시 후면 그곳을 통과하기 때문이란다. 우린 차에서 내려 볼일도 보고 재잘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상상하면서. 30분가량의 기다림 끝에 차들이 다가온다. 우린 어느 차에 가장 높은 이가 타고 있을까 알아맞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손을 흔들고 차안 사람들은 답례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줄지어 서서 관통하는 그 고위간부들을 황홀하게 해주는 꼴이 되었다.
뉴팅그리로 가는 길은 도로공사로 복잡하다. 한밤중인데도 공사를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예전 우리의 부역처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일을 하는 것 같다. 실업대책의 일환일까. 우리처럼 한 회사가 수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정부의 지원금을 골고루 혜택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중국의 정책인지도 모르겠다. 집 짓는 것도 그렇고.
그렇잖아도 느린 우리 기사는 길을 잘못 들어 달이 중천에 떠 있을 때에야 뉴팅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약도 되어있지 않은 호텔. 황당한 사건이 터졌다. 나무로 뚜껑을 만들어 그것을 옆으로 들어내고 일봐야 하는 수거식 변소. 씻을 곳이 없어 방안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참으로 한심한 밤이다. 서울의 카메라맨 교감선생님은 방이 없어 기사들 방에서 자야만 했고. 정규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며 우리 방에서 같이 자자고 한다. 그래서 셋이 함께 자는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교감선생님 왈, ‘영원히 은혜 잊지 못할 것이다.’
8월 11일 12일째 (뉴팅그리 -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 오울드팅그리)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아침햇살이 유난히 밝다. 좋은 징조가 있으리라. 꿈을 안고 달린다. 에베레스트 게이트 앞에 섰다. 다들 수속을 밟고 그곳을 지나가는데 도대체 우린 왜 여기서도 기다려야 하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간다.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건만. 여권을 손에 가득 쥔 채 팀장이 달려온다. 속 넓은 김상현씨가 드디어 화가 났다.
한 명씩 여권으로 수속을 밟고 꿈의 땅으로 들어서기 위해 부산하다. 구불구불 돌아 기욜라 언덕에 올랐다. 마칼루, 록체, 에베레스트, 초유, 시샤팡마가 한 줄로 펼쳐진다. 약간의 구름을 휘감고 있는 봉우리들. 이곳에서 가장 최대의 날이란다. 운수 좋은 날이다. 1차팀은 비가 와서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던 봉우리들. 거대한 만년설에 취해 흥분된다. 영원히 각인될 추억들을 사진에 담고.
에베레스트 중턱을 지나 낮은 곳으로 차를 몬다. 밀밭이 펼쳐지고 넓은 강가에 원주민 여자들이 여유롭게 앉아 그림 속 풍경을 자아낸다.
에베레스트 북벽 베이스캠프를 눈앞에 두고 우린 모두 2인승 마차에 올랐다. 다 검은 말인데 우리 것만 흰 말이다. 비쩍 마른 하얀 말, 누런 콧물이 고개를 내밀고, 한 번도 닦지 않은 것 같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잘도 웃어주는 마부. 신이 난 모양이다. 끄떡하면 뒤를 돌아보며 웃고, 주위 경관을 설명해주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제발 돌아보지 말았으면.’ 아무리 마음을 다져도 더러운 그 사내가 징그럽다. 그래도 귀고리도 하고 머리도 땋아 올리고 제법 멋을 부렸다.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이들도 있다. 특히 서양인들은 많이 걷는다. 예쁜 아가씨가 가족들과 함께 걸으며 정규에게 말을 건다. 같이 걷자고. 금세 혹하는 정규. 이런 기회가 또 있겠느냐며 후딱 내려선다. 한편으로 서운하다. 세상에, 티벳을 왜 왔는가. 이곳을 보러 오지 않았는가. 이번 여행에 이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는가. 혼자 중얼거리며 한참을 욕을 해댄다. ‘지가 생각이 있다면 다른 마차라도 타고 오겠지.’ 한편으로 안위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렇게 그 여자애가 좋단 말인가. 결국은 정규 자리에 중국인 여대생을 태웠다. 비가 온다. 서서히 우박으로 변한다. 가까운 것 같더니 한참을 달려도 베이스캠프가 나오지 않는다. 걱정이다. 여기까지 와서 못보고 갈까봐 마음은 정규한테 가있다. 그 녀석, 이 엄마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참으로 얄밉다.
베이스캠프에 올랐다. 숨이 찬다. 갑자기 환영이라도 하듯이 쌀 한 톨보다 더 큰 우박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벌벌 떨며 언제 또 오겠냐 싶어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지금쯤 정규는 어디 오고 있을까. 야속하게도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갑자기 양경연 선생님이 정규 왔다며 큰소리로 외친다. 그 순간의 기쁨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 그 프랑스애의 마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늦어질까 봐 그것을 타고 온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정규는 마부노릇을 하며 말을 잘 구슬려가며 제법 흉내를 낸다. 변덕스런날씨에 으스스 떨리건만 얇은 옷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금방이라도 달려 올라가고 싶다 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의 반대편을 볼 수 있는 올드팅그리로 가기 위해 지프에 올랐다. 조금 가다가 옆길로 샌다. 오지의 학교를 방문하기 위해서일까. 그렇잖아도 좋지 않은 길인데 더구나 최악의 산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에 출발한 두 대의 차가 냇물을 건너더니 기다린다. 우리 기사의 서투른 운전 솜씨가 과연 건너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냇물을 건너려는 순간 속도를 낮추더니 그만 냇물 중앙에 서버린다. 돌멩이에 걸려 움직이질 않는다. 여러 번 시도를 해보건만 요지부동이다. 견인하기 위해 매단 로프마저 끊겨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기사들 모두 동원되어 힘을 합한다.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은 사람은 유일하게 한국의 인솔자. 여전히 미운 짓만 한다.
돌멩이를 집어넣고 바닥을 다진 후에야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들이대는 흰머리의 서울 캠코더 아저씨! 우린 그 선생님을 ‘재난 아저씨’라고 부른다. 나머지 차들이 냇물을 가볍게 건너고 산위로 차를 몬다. 그런데 돌아가며 차바퀴가 시궁창에 박혀버린다. 며칠 전 엄청 내린 비 때문인지 길이 질컥거린다. 그때마다 기사들과 남자들이 동원되고. 자기의 차가 빠져도 캠코더만을 들이대는 재난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이 돌로 메우고 부산을 떨어도 무반응인 채 들이댈 뿐이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모처럼 대낮에 오울드팅그리에 도착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던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희망을 접어가고 있었다. 주변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다가와 합세를 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차바퀴는 끊임없이 빠져 산속엔 짙은 어둠이 내렸다. 평화롭게 노닐던 야크들도 집을 찾아 떠나고 마을의 젊은이들도 하나둘 사라진 칠흑 같은 산속은 고통과 분노, 한숨으로 점철되고 있었다. 결국 마을에서 얻어온 삽과 괭이로 모든 기사들이 동원되어 겨우 마지막 차바퀴를 꺼내 어둠의 질주를 할 것처럼 길을 되돌아가더니 다시 다른 쪽의 산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고집스런 중국의 기사들. 돌아가면 2시간이 더 걸리고, 지름길로 가면 40분이면 갈 수 있다고 접어든 이 길에 8시간을 보내고도 모자라 또 산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더니 또 바퀴를 시궁창에 빠뜨린다.
분노는 극에 달하고 서서히 몸도 지쳐가기 시작한다. 차 한 대로 대충 아픈 사람들을 태워 떠나는데 그곳에 멀쩡한 사람도 탔다.
결국 지름길이라던 그 산길을 포기한 채 멀리 돌아 오울드팅그리에 힘들게 도착했다. 새벽 5시가 넘어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베이스캠프에서 단 몇 분 지나 우린 하룻밤을 어둠속에 끙끙 앓으며 보내버린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하루였다. 우린 엉망인 게스트하우스에 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고 그날의 일정은 정오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8월 12일 13일째 (오울드팅그리 - 라룽라 - 탕라 - 니알람)
10시에 모닝콜을 한다고 했는데 눈이 일찍 떠진다. 한쪽에 핏발이 섰다. 제일 먼저 건강을 체크해주는 곳, 바로 나의 눈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바라본다. 한 점 구름이 없이 온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게스트하우스의 공동 목욕탕! 어제의 피곤함을 씻어낸다. 오늘은 차들도 목욕하느라 바쁘다. 언제부터 이렇게 세차바람이 불었는지 호들갑스럽게 차를 목욕시키고 있다. 오직 우리 차안 사람들만 조용하다. 세차하러 왔단 말인가. 서로들 시새워가며 닦아내는 모습들이 우습다. 중국 기사들에게 못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잖아도 잔꾀만 부리는 그 사람들에게 또 세차까지 해주었으니 앞으로 나타날 한국 관광객들은 세차하며 여행해야 할 것 같다. 좋은 것이 좋다지만, 정도가 심하다.
정오가 되어서야 고드리평원으로 달린다. 고대 왕국의 자리, 도보 트래킹이 시작된다. 간간이 남아있는 흔적들.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모른다는 이곳의 왕국! 호수가 있고 말이 있고 야크들이 숨 쉬고 잔풀이 자란 초원에 몸을 눕힌다. 눈이 시리도록 평화롭다. 고흐의 ‘정오의 휴식’처럼 사랑하는 이와 그렇게 드러눕고 쉽다.
평원 안에 자리 잡은 마을, 슬그머니 다가서본다.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여 접근할 수가 없다. 티벳의 집들은 폐허 같다. 돌로 지어 담 위에 얹어놓은 흙이 멀리서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귀곡의 스산한 집안을 연상시킨다.
며칠 전 예정대로 오지학교를 방문했는데 우리나라 시골의 마을회관 크기의 건물로 교문이라기보다 보통 가정집의 대문처럼 생긴 철제문이 꽉 닫혀 그만 돌아서야 했었다. 오늘은 고드리평원을 한참 지나 자리 잡은 초등학교로 미리 방문을 알려 교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바쁠 때라 학생들은 농번기 휴가를 맞아 몇몇 선생님만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현대식 교사 앞뒤로 자그만 화단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우리는 현관으로 들어서서 입구에 부착된 게시물에 기록된 전 교사들의 사진과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몇 개의 교실을 순회했다. 게시물은 거의 없고 책상과 의자, 칠판이 전부였다. 오직 뒷면 칠판에 분필로 단정하게 써내려간 선생님의 글씨만이 교실을 장식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우리 60년대 초등학교 풍경이 이랬을까.
준비한 학습도구들은 앞 교탁위에 수북이 쌓아 두었는데 아마 학생들이 등교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리라 생각한다.
히말라야의 모든 봉우리들이 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 탕라로 향했다. 비를 살짝 뿌려 흙길의 먼지를 잠재워준다. 봉우리들은 대부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마나슬루가 그나마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또한 가장 좋은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구름은 주지 않는다. 마나슬루 앞에서 포즈를 취해 한 컷 담아 아쉬움을 달래본다.
희끗희끗 보여주는 만년설의 신비를 바라보며 탕라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달려 저 꼭대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건만 무거운 심장이 허락하지 않는다. 모처럼 여유로운 산행으로 야생화를 찾으며 산길을 느긋하게 누비며 다들 행복해한다.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에 따사로운 햇살만큼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옷깃을 여민다. 흔들림이 없는 바람, 그저 따갑게만 느껴지는 그곳에 냉기가 몸을 파고들어 살을 엔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일까.
마칼루 마운틴과 록체 마운틴 오른쪽 계곡에 있는 라룽라를 지나 서서히 고도를 낮춰 차들이 질주한다. 3750m의 니알람! 티벳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찾아든 곳. 티벳 사람들과 완연히 다른 형태의 얼굴들. 아니나 다를까 인도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인도인들이 80퍼센트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그만 마을, 물가가 다른 곳보다 두 배는 비싸다.
오늘 밤도 양경연선생 부부와 같은 잠자리. 벌써 세 외간 남자와의 잠자리가 이어지고 있다. 저녁을 해결하기위해 식당을 찾았다. 조금이라도 깨끗한 식당을 찾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다. 다행이 이곳은 영어 메뉴판을 가지고 있다. 모처럼 만난 영어. 정규는 흥이 난다. 우린 계란 볶음밥과 채소 볶음밥을 주문했다. 향을 빼달라고 해야 하는데 도무지 모르는 중국말! 또 더듬거리고. 겨우 ‘不香’이라고 써서 보여줄 뿐….
성공이다. 모처럼 우리나라 중국집에서의 익숙한 그 맛. 얼마나 신이 났던지 계란볶음밥을 또 한 그릇 시켰다. 서빙되고 있는 국수의 먹음직스러움을 보고 그것도 주문했다. 아주 오랫동안의 기다림 끝에 뚝배기에 보글보글 담겨져 나온 국수. 한입 입에 넣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향을 빼달라고 주문했는데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깝지만 그대로 남기는 수밖에. 우리 방에서 술 파티가 벌어졌다. 다른 방의 여자 셋을 불러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 소리가 옆방에까지 스며들었는지 서울 교장선생님이 합세했다. 관리자로서의 자랑이 한창이다. 어찌나 교장냄새를 풍기는지 그만 분위기는 망가져버리고.
티벳의 마지막 밤 네 사람의 열기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티벳 하늘이여, 영원하거라.
8월13일 14일째 (니알람 - 장무 - 코다리 - 나갈코트)
히말라야 산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네팔의 나갈코트에 와있다. 밖에는 까만 어둠과 함께 천둥번개가 내려친다. 한국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부짖음의 바람소리도 연신 나갈코트의 밤을 때린다. 아이 잃은 엄마의 슬픈 울음소리가 저리할까. 빗소리까지 흐느껴 운다. 보름여동안 잠깐 잠깐 내비치던 티벳의 빗방울이 나갈코트에 입성하자마자 호들갑스런 빗소리로 인사한다.
티벳을 벗어나기 전 니알람 고산지대 있는 폭포떼가 그립다. 마지막 그 계곡에 눈길을 모은 채 몸부림치며 빠져드는 마음을 부여잡느라 넋을 잃었다. 여기저기 50여개의 폭포들이 장관을 이룬다는데 가뭄으로 몸을 드러낸 몇 개만으로도 행복했다. 계곡의 숲 또한 얼마나 아름답던가. 티벳은 가장 아름다운 곳을 숨겨두었다가 떠나가는 사람에게 그토록 강한 이별을 노래한단 말인가.
그리고 재미난 일도 보여주지 않는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앞차가 멈추어선 채 온 몸에 물세례를 받고 있다. 11일 동안 뒤집어 쓴 두꺼운 먼지층을 바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숫물로 말끔히 씻어 내리고 있다. 천연 바위폭포.
8대의 차가 차례대로 목욕을 하고 장무로 향했다. 국경의 장무에서 차들만 먼저 내려 보내고 우린 티벳의 마지막 도보 트래킹을 시작했다. 어찌나 길목이 좁은지 국경을 넘나드는 대형트럭들과 소형의 푸른 택시들, 온갖 자동차들의 매연과 사람들로 지나가기가 힘이 들었다. 지저분한 골목, 왁자지껄, 국경의 풍경은 이런가.
우린 빠뜨리면 안 될 것처럼 가는 곳마다 맛보았던 호떡으로 기사님과 이별의 아픔을 대신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티벳과 네팔을 이어주는 다리 중앙에 섰다. 장무와 코다리의 붉은 선 양쪽에 한 발씩 놓은 채 ‘이곳이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이라면.’ 간절히 바랬다.
그렇게 출입국 수속이 끝나고 우린 새로운 버스에 온 식구가 몸을 실었다. 한참을 달리다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이젠 네팔의 음식이다. 우리를 뺀 많은 이곳 사람들이 오른손으로 밥을 비벼 먹는다. 새로운 풍경이다. 네팔을 ‘작은 인도’라고 한다지. 거의 80퍼센트가 인도인이란다. 옥수수 가루를 튀긴 누룽지 같은 음식이 후식으로 나왔다. 짜서 먹을 수가 없다
티벳에서 벙어리였던 난 숨통이 트인다. 영어권의 나라(물론 네팔어이지만 영어도 잘함)에 오니 그나마 몇 마디라도 들려오고 뱉어낼 수 있다.
130킬로미터를 5시간에 걸쳐 나갈코트에 오는 내내 한국의 정서가 물씬 풍긴다.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산위에 군데군데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산악지대라서 평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높은 산의 계단식 작은 다랑이 논에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보성의 녹차밭 같다. 벼논을 뺀 나머지 땅에는 온통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빼곡히 들어선 옥수수와 벼들을 보니 네팔 농민들의 부지런함이 엿보인다. 1년에 3모작을 한단다. 넓은 잎의 토란이 한 밭 가득하고 호박 넝쿨, 칸나, 사루비아, 소나무, 대나무, 무궁화가 우리의 들판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낀 조그만 나라, 네팔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추어두고 있었는지 어찌 알았겠는가? 만년설의 아름다움만 생각했었지. 산꼭대기까지 자연스레 들어서있는 아기자기한 집들은 그야말로 낙원이다.
나갈코트에 들어섰는데 주변이 온통 붉다.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피라칸사스가 붉은 열매를 매달아 호텔로 들어서는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았다.
온 산이 구름을 머금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들이 부리나케 퍼져가는 구름덩이에 가려 가늠해볼 수가 없다. 하지만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넋을 놓는다. 신들이 장난치다가 망가뜨려 자연스러운 이런 풍경이 만들어졌을까.
나갈코트의 밤은 아름답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천둥번개, 굵은 빗방울 소리가 어울려 네온싸인 불빛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고국의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워진다. 모처럼 이 밤을 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가슴에 품으며 잠들고 싶다.
8월 14일 15일째 (나갈코트 - 박타풀 - 카트만두)
히말라야의 전망대, 나갈코트가 새소리와 닭 울음소리로 눈을 뜬다. 어젯밤 아우성이 산자락에 온통 운무를 피웠다. 길가 피라칸사스도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한련이 분홍물감을 머금고 돌담위로 기어오른다. 담장 위로 수북수북 피어오른 진보라 나팔꽃이 짙푸른 이파리의 풍성함과 어울려 당장이라도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
대나무로 엮은 닭 우리가 시골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그 속에 갇힌 닭들이 우리를 열자마자 뛰쳐나와 부르르 몸을 떨며 아침을 노래한다.
효남씨와 난 그 정경에 취해 그만 멀리까지 걷고 말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다. 느지막이 도착하여 접시에 음식을 담아 바깥 테라스에 앉아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한 모금 마시는 커피 맛은 아마 영원히 녹지 않을 만년설의 신비만큼 달콤하다.
짐을 꾸려 아쉬운 그곳을 이별하고 우리 일행은 카트만두가 내려다보이는 좁은 도로를 따라 걸으며 또다시 달아오르는 심장의 열기를 느껴야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박타풀 유적지 관광이 시작되었다. 이곳 사원에는 8월 한 달간 여인들의 축제가 이어진다. 빨간 사리를 걸친 여인네들이 가는 곳마다 무리를 지어 줄을 서 있다.
형형색색의 향들, 쌀, 바나나, 둥그런 떡, 알 수 없는 과일과 음식들, 나뭇잎을 그릇에 담아들고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있다. 이런 것들이 담겨져 있는 그릇들을 보니 우리나라 애들의 소꿉장난처럼 보인다.
피자위에 토핑 하듯, 손바닥에 물감으로 특이한 문양을 만들어주는 남자, 여러 여자들을 둘러앉히고 경전을 읽어주는 남자, 모두가 생소한 풍경이다.
박타풀의 사원 건축은 고풍스럽고 조각미가 뛰어난다. 그 화려한 건축들은 빨간 사리로 더욱 붉게 물들고 치렁치렁 늘어뜨린 원색의 장식물들로 화려함의 극치를 더한다.
팔월은 여인들의 축제 빨간 사리는 결혼한 여자들이 입는다
우린 원색의 밀물을 빠져나와 갠지스강의 원류인 바그마티 강둑에 늘어선 파슈파트 화장터로 향했다. 이곳은 힌두인들의 화장터다. 들어서자마자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재를 강물로 밀어 넣고 있다. 방금 지상에서 사라진 영혼의 재인가보다.
네팔은 힌두교가 80퍼센트를 넘는단다. 나머지는 라마교와 이슬람교라고 한다.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화장하는 과정을 보고 싶지만, 준비하는 시간이 길 것 같아, 우선 시바 신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힌두교는 다신교다. 그중 최고의 신으로 믿고 있는 신이 시바신이다. 링가로 표상되며, 흔히 요니와 결합된다. 반대로 그는 엄격한 금욕과 고행의 신이기도 하다.
시바와 그의 배우자 파르바티 여신, 그리고 아들 가네샤·카르티케야는 히말라야의 봉우리에 앉아 있으며, 황소 난디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단다. 난디의 조각상은 시바를 모신 모든 사원에서 본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사원과 개인의 사당에서 시바는 그의 근원적인 상징인 링가로 숭배된다.
힌두교도들은 싱싱한 꽃과 깨끗한 물, 어린 새싹, 과일, 나뭇잎, 햇볕에 말린 쌀을 바치며 '링가'를 경배한다. '링가'에게 바치는 이런 물건들은 깨끗해야 하고 경배하는 사람의 몸도 깨끗해야 한다.
바그마티강 옆으로 파슈파티나트 사원이 있다. 원래 시바신에게 헌납한 사원인데, 네팔 힌두교 최대의 성지란다. 독실한 힌두교도들이 이곳으로 찾아와서 죽고, 화장되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한단다. 2층 사원에는 힌두교도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네팔은 역시 8월이 가장 화려한 계절인 것 같다. 이곳 또한 박타풀 사원처럼 울긋불긋 사리 입은 여자들로 붐벼 강 주변이 빨갛다.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강에서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 것처럼 이곳 사원 앞을 흐르는 바그마티강에서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광경을 엿볼 수 있다. 성수를 손으로 떠서 머리에 묻히는 여자들, 둥근 잎에 촛불을 켜서 띄워 보내는 여자들, 온갖 향과 음식들이 강물로 둥둥 떠내려간다.
그런데 마음은 화장터로 가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강가 계단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하며 하염없이 강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에게 죽음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장작더미가 여러 층으로 쌓여있고 네 남자가 긴 막대를 들고 강물 속에서 의식을 행하느라 돌고 돈다. 밖으로 나오더니 시신을 더미위로 올리고 그 위에 장작을 더 얹는다.
그 위에 야크 버터를 뿌리고 짚으로 마무리를 한다. 아들이 세 번을 돈다. 한 번은 창조의 신 브라마에게, 두 번째는 보호의 신 비슈누에게, 마지막은 파괴의 신 시바를 향해 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장자가, 어머니가 죽으면 막내아들이 돈단다. 아들이 없을 때는 사제가 대신 한단다. 입안에 제일 먼저 불을 지피고 여기저기 자잘한 불쏘시개를 지핀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타오른다. 힌두인들은 하루만에 장례를 치룬단다. 날씨가 뜨거워서일까? (이것은 술취한듯한 남자가 장례절차에 따라 정규에게 영어로 설명해준 내용이다.)
딸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도 요즘은 아니지만 예전엔 딸들을 장지에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슬피 울어대는 딸들의 마음 때문이 아닐는지.
이렇게 잠깐의 과정으로 한줌의 재가 된다. 하지만 힌두인들은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일까. 모든 의식을 너무도 덤덤하게 치루고 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네팔의 전통춤과 함께 저녁 만찬이 있는 날이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한 여인이 이마에 티카를 칠해주며 우리를 맞이한다. 티카는 붉은 가루인데 젊은 여자들은 붉은 색 뿐만 아니라 사리의 색깔에 맞추어 칠하기도 한단다. 2층으로 올라서는데 식판처럼 생긴 그릇에 여러 가지 곡식을 담아 한쪽에 놓아두었다. 종교가 곧 생활인 것이다.
고량주맛과 비슷한 네팔의 술, 무엇보다 1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자그만 술잔 속으로 쏟아 부어내는 요술 같은 종업원의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잠깐 잠깐 펼쳐지는 민속춤. 별맛 아닌 소량의 음식들이 풍성하기만 하다. 몇몇은 오른손으로 비벼 이곳의 음식문화를 접한다. 후식으로 나오는 달짝지근한 흰 쌀죽, 맛이 오묘하다. 음식의 맛보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다. 특히 외국에서는.
8월 15일 16일째 (카트만두 - 상해)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를 보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갔다. 난 라싸 도착하기 전 공중에서 바라본 히말라야가 얼마나 멋있었던지 경비행기는 생략하기로 했다. 구름사이를 지날 때 스프레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단실보다 더 가는 물 타래에 취하고 우뚝 솟은 기암절벽의 만년설에 취해 고정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연신 내뱉었던 탄성의 신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경비행기로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것보다 더한 환희가 따르리라.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것도 나의 여행 비법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몽키템플(소앤부나뜨)로 가는 길. 앞에는 만장이 펄럭이고 뒤따르는 행렬. 이번엔 불교 다비식이 펼쳐지고 있다. 강둑에 줄줄이 세워진 시멘트 바닥의 힌두인들의 화장터와는 조금 다르다. 한쪽에 시신을 모셔두고 경전을 20분가량 낭독해주는 공간과 그 옆에 화장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 있다. 아마 화장법은 힌두교와 거의 비슷하리라 본다.
소엔부나뜨는 네팔에서 약 2000년 전에 건립된 가장 오래된 사원이란다. 네팔 불교인 라마교의 성지로 카트만두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본래 카트만두는 호수였는데, 문수보살이 호수의 물을 모두 말려 없애자 가장 먼저 이 사원이 떠올랐다고 한다. 흰 돔의 사원 꼭대기에는 금빛탑이 있으며, 이 탑에는 카트만두를 수호 하는듯한 거대한 눈이 그려져 있다. 경내에 원숭이가 많이 살아 원숭이 사원이라고도 하며 늘 성지를 순례하는 불교도들로 만원을 이룬다.
특이한 점은 한 곳에 힌두사원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벳과 네팔을 돌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타 종교와 더불어 잘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도 화합할 수 있을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를 비롯하여, 북부 네팔과 티켓의 바즈라야나 불교신자들과 네와르 족 불교신자들이 있다.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언덕으로 통하는 365개의 계단을 오른다. 일렬로 금박을 한 바즈라를 지나 입구를 지키는 2개의 사자상을 지나서 시계방향으로 사리탑을 돌기 시작한다.
세계 최대 불탑 보다나뜨. 네팔에서 가장 높은 사리탑이며 티벳과 네와르 불교신자들에 의해 숭배를 받는 곳이다. 자드지모라는 천민에 의해 지어졌는데 그는 부처에게 공양할 것을 찾다가 왕에게 이곳을 건설할 것이라고 허락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천민에 의한 거대한 사원의 건립을 보고 지방 귀족들이 중상모략으로 왕에게 사원을 헐라고 탄원을 했는데 ‘한번 허락된 것은 철회할 수 없다’라고 해서 완성을 시켰다고 한다. 훗날 이 공덕으로 자드지모의 아들은 8세기 티벳 불교를 확립한 왕으로 환생하였단다.
이곳을 돌 때는 홀수로 돈다. 사리탑이라 내부 공간이 없으며 어마어마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한다. 티벳인들은 이곳이 고대 부처의 사리가 묻혀있는 곳이라고 믿고 있다.
파탄은 아름다운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엔 구왕궁과 사원들이 쭉 늘어서 있다. 박물관에 비치된 조각품들의 정교함을 보면서 네팔의 문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그 나라의 훌륭한 문화를 접한다. 우리 것만이 최고가 아닌 훌륭한 문화들이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것. 이것이 여행에서 배워야 할 겸손인 것 같다.
파탄에도 축제가 무르익었다. 어느 지방의 축제인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명절날 각 지방마다 고유의 춤과 음악이 있듯이 이곳에도 그런 축제가 열리는 모양이다. 모든 곳들이 종교와 관련된 축제인 것 같다.
탐험가 모험가의 타멜거리로 윈도쇼핑을 떠났다.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다지 좋은 상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등산 장비는 제법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한 모양이다. 산악인들이 이 나라에 보태주는 돈이 어마어마하다지 않는가.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을 오르려면 반드시 네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그 또한 이 나라의 지리적 위치의 혜택이 아니겠는가. 산악인들이 꿈꾸는 곳, 히말라야를 품고 있는 나라, 네팔이 부럽기만 하다.
8월 16일 17일째. (상해 - 인천 - 순천)
15일 밤, 몬순기후로 변덕을 부리던 습하고 우중충한 카트만두를 떠나 다음날 아침 상해에 도착했다. 환승하려면 무려 세 시간의 여유가 있다. 지나온 순간을 더듬어본다.
여행이란 몸으로 부딪치며 겸허하게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티벳에서의 지프 트래킹! 나름대로 의미도 있지만 흙밭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거운 짐덩이를 자전거에 매달고 고도를 올라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도 온몸을 던져 자연과 문화에 동화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티벳 네팔을 돌면서 ‘자기다움’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어느 곳에서나 오체투지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이것이 티벳다운 풍경이었으며 네팔의 사리 입은 여인들의 축제는 바로 네팔의 축제이자 세계의 축제였다. 우리도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살리는 것이 세계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걸…….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 네팔의 히말라야부터 도보 트래킹을 하고 싶다. 네팔의 박타풀, 파탄 유적지 그리고 그림 같은 산과 들…
티벳의 푸른 하늘, 굽이진 쪽빛 강물을 따라 서있는 빽빽한 원시림, 끝없이 펼쳐진 메밀밭과 유채밭 그리고 민둥산 -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조각 없이 온전하게 보고 싶다.
*겉표지의 히말라야 봉우리들은 경비행기에서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