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잇는 걸출한 구상작가, ‘생의 기쁨’ 그렸지만 삶은 반대 강박·신경쇠약 앓는 여인 사랑, 늙음 못견디자 생기 있게 묘사, ‘욕조속 누드’등 500여점 남겨
욕조 속의 누드
천지가 연둣빛으로 물들고 분홍색 꽃잎들이 분분히 날리던 날의 첫 미팅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한 오래된 2층 찻집에서였는데 오후의 미팅에 가기 전 신경 안정제를 한 알 먹어두었다. 그때까지도 난 어머니와 누이들을 제외하고는 여자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시골 출신인 내가 세련된 여대생 앞에 앉아 주어진 시간을 리드해 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가까워 왔지만 신경 안정제는 효과가 없었고 약국에 들러 다시 한 알을 먹고 나서야 약속 장소에 갈 수 있었다. 나의 상대는 아직 여고생티가 가시지 않았는데 한껏 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첫눈에 내가 별로 맘에 들지 않은 듯했고 고양이가 공을 가지고 놀 듯, 질문을 쏟아놓았다. 동사무소 호적 계원처럼 가족 사항을 묻는가 하면 커피도 호로록 소리 나게 마시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등 내가 그렸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첫 미팅의 환상이 깨어지면서 긴장이 풀리자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비몽사몽 간에 몇 마디가 더 오갔는데 ‘어머, 이 사람 자고 있어’ 하는 소리와 함께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일어서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대학로 천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를 걷는데 무연히 서러워졌다. 그런 내게 첫 누드수업이 주어졌다. 눈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이 포즈를 취하며 앉아있는 것이었다. 심장은 민망할 정도로 쿵쾅거렸고 시선은 허공에서 길을 잃은 채 연필 잡은 손과 따로 움직였다. 내가 그때까지 만난 여성은 거의 늘 문학 작품 속에서였다. 한결같이 신비했고 순결했으며 우아했다. 그리고 여성과의 사랑은 가슴 시린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대낮에 벗은 여인이 내 눈앞에 눕거나 앉아있는 것이다. 내 얼굴은 숯불처럼 타올랐고 그림은 갈지자를 그렸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나는 조용히 일어나 이젤 앞을 떠났고 다음 달에는 신병 훈련소로 가는 열차 안에 있었다.
내게는 이토록 어려웠던 ‘누드’를 일생의 화두로 삼은 듯한 화가가 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직업적 모델이 아닌 아내를 대상으로 수십, 수백 점에 이르는 누드작품을 해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대상인 아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픈 아내를 대상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예술가로 떠오르는 사람이 일본 작가 미우라 미쓰요(三浦光世)와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다.
신은 종종 아픈 삶을 위해 곁에 손을 내밀어 줄 한 사람을 세워두는 배려를 한다.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에겐 늦게 만난 연하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가 있었고, 그는 마치 성직을 행하듯 아내의 병간호를 했다. 의사, 간호사, 신부, 목사가 돼 아픈 아내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보살폈던 또 한 사람으로는 화가 보나르를 들 수 있다. 그는 르누아르를 잇는 가장 걸출한 구상작가의 한 사람으로, 생의 기쁨으로 일렁이는 듯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반대였다. ‘예언자’라는 의미의 ‘나비파’라는 젊은 미술운동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지만 운동이라고 해서 무슨 사회적 상상력의 거대 담론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가정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온화한 패밀리즘의 그림들이었다.
그림 속과 자신이 처한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림만으로 보면 달콤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데 실상은 반대였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환자였다. 다만 그녀가 아픈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우연한 첫 만남에서부터 운명적 사랑에 끌려 들어간다. 어느 날 신호등을 걷다 맞은편에서 오던 아내 마르트를 처음 만났고 전차에서 내리는 그 모습을 먼발치로 보고 홀리듯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쨌든 운명은 스쳐 지나칠 뻔했던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열일곱이라며 뻔한 거짓말을 했다. 이후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가공으로 만들어냈고 ‘지금 이곳에서의 현실’이 아닌 ‘몽롱하고 비현실적인 다른 현실’ 속에서 꿈꾸듯 살고 싶어했다.
빛으 받는 누드
무엇보다 그녀는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못 견뎌 했다. 몸매가 망가진다고 아이 갖기도 거부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그녀에 대한 보나르의 태도였다. 마치 이교도 같은 그녀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으며 ‘허언증 환자’가 꾸며낸 것 같은 그 가상현실을 실제 현실로 인정했다. 그리고 천연스럽게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기이한 동거가 계속됐고 보나르는 그동안 무려 오백여 점 가까이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림 속의 그녀는 한결같이 행복했으며 늙지 않는 모습이었다. 심한 강박증과 신경쇠약을 앓던 마르트는 그림에서 조금이라도 ‘늙음’의 흔적이 발견되면 악을 쓰며 견딜 수 없어 했다. 반대로 막 피어오르는 봉오리처럼 화사한 모습으로 그려지면 그렇게 행복해할 수 없었다. 현실과 그림 사이의 기이한 알고리즘은 그렇게 반평생을 이어져갔던 것이다.
원래 보나르에겐 화가가 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법대를 나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자 뒤늦게 화가의 길로 전향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미술 동네에서 대성하겠다는 식의 야망이 없었다. 유명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림도 그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허구한 날 커튼을 쳐놓고 집안에서만 지내는 아내는 음지 식물처럼 점차 생기를 잃으며 늙어갔지만 그림 속의 그녀는 변함없이 생기발랄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웠다. 그렇게 화장하는 모습, 목욕하는 모습, 커튼을 젖히는 모습,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 등 수많은 마르트의 삶의 단면들은 그림으로 남겨졌다. 대표작인 ‘욕조 속의 누드’ ‘일상생활’ ‘세면대의 거울’ 등이 모두 그녀나 그녀의 삶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그가 그린 그림은 아내를 위한 일종의 처방약인 셈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동거하며 살다가 두 사람은 법적 결혼을 한다. 그러나 병약했던 아내는 얼마 안 가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그림은 실내의 인물에서 풍경화 쪽으로 옮겨갔다. 인물화로는 홀로 남은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들이 전부였을 뿐이다.
미우라 아야코의 남편 미우라 미쓰요는 질병과 상처의 여정이었던 34년간의 결혼생활에 대해 회상하는 책 한 권을 아내가 떠난 다음에 펴냈다. 마치 아픈 원숭이가 다른 아픈 원숭이의 상처를 핥아주듯 아내를 돌보았던 그 시간에 대해 놀랍게도 그는 ‘행복했노라’고 술회한다. 보나르 역시 병든 아내의 삶에 포박당하다시피 한 일생이었지만 작품 어디에도 우울이나 불만의 색채가 보이지 않는다. 제럴드 젬폴스키는 “우리는 사랑과 두려움, 행복과 슬픔 중 어떤 것을 선택해 살아갈지의 결정권을 결코 타인에게 넘겨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명저인 ‘사랑은 모든 것의 해답’을 펴낸다. 보나르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그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행복이 아닌 두려움이나 슬픔의 방향으로 걸어가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병종 ;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행복을 그린 화가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1947)
피에르 보나르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취미로 그리던 그림이 본업이 된 화가였다. 고갱을 좋아해 그의 회화정신을 계승하고 싶어했으며 ‘예언자’라는 의미의 나비파(Nabis)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화사한 색감의 누드화와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의 인물화가 각종 신경증적 질병을 앓고 있던 아내 마르트를 모델로 했으며, 그녀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기 위해 그려진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