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로 역사학자인 한영우(78·사진)서울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한 지난 9일, 국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표결하고 있었다. "지금이 저점(低點)이라면 더 이상 나빠질 것은 없다는 뜻이겠죠." 노교수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는 "단기적 혼란은 피할 수 없고 우울함과 절망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나겠지만, 역설적으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변화의 기로(岐路)에 섰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과거의 낡은 유산에서 헤어날 때가 된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가.
"대한민국은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예외적 경우에 해당한다. 산업화를 주도한 세력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자긍심이 있다. 민주화 세력 역시 피와 상처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고 자부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졸업'한 오늘의 시점에서 양쪽은 모두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고마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문제는 언행(言行)이 신중하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천박하고 경솔한 말을 부끄러움 없이 입에 담으니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신뢰가 가질 않는다. 시장에서 떡볶이 먹고 사진 찍으면 모두 서민적 정치인인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전통적 지식인상(像)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했다.
"장수(長壽) 시대에 100세만 살아도 건강 비결을 알고 싶어 한다. 한국사도 마찬가지다. 왜란과 호란(胡亂), 숱한 실정(失政)에도 조선 왕조가 500년간 지속됐다면 반드시 '장수 비결'이 있을 것이다. 유럽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면 한국에는 '선비 문화'가 있다. 선비 정신이야말로 조선의 장수 비결이다."
―과거 회귀적인 건 아닐까.
"아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은 뛰어난 학행(學行) 때문에 34년간 천거를 받았지만 실제 등청(登廳)한 건 모두 합쳐도 1년이 되지 않는다. 예전 학자들은 달콤한 꿀단지 같은 권력에 취해서 정신을 잃다 보면 말로가 비참하다는 걸 알았기에 경계했던 것이다. 요즘 벼슬을 준다고 하면 누가 안 받는다고 사양하는가. 전통적 지식인들은 관직에 오르면 임금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에 최고 권력자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관료는 누가 있는가. 예전 학자들이 요즘 정치판을 보면 아마도 가가대소(呵呵大笑·소리 내어 크게 웃음)할 것이다."
―한국사에서 배워야 할 또 다른 유산이 있다면.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한국은 근대 이전 기록 문화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선진국이었다. 사관(史官)들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던 실록은 권력자를 감시하는 'CCTV'와 다를 바 없었다. '밀실 정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 로 인사 정책이다. 인재를 등용할 때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는 '입현무방(立賢無方)'과 오로지 재주만을 기준으로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은 조선 시대 인사 정책의 지침이었다. 비선 실세라는 말이 횡행하는 지금이 그때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역사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12/20161212001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