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 올가을 첫 한파주의보가 내려지면서 단풍의 하산 속도가 빨라졌다. 대청봉에서 출발한 오색단풍은 용아장성릉을 타고 수렴동계곡 상류에 있는 대피소에서 잠시 거친 호흡을 고르다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강돌이 눈부신 수렴동계곡을 오색으로 채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 내설악 입구인 백담계곡에서 황홀한 색(色)의 잔치를 펼치고 있다.
삼각산에서 공부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에 격분해 책을 불사른다. 그리고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은 후 오랜 방황 끝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다. 안동 김씨의 후손 삼연 김창흡도 아버지와 형제가 기사환국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전국을 유랑한 끝에 깊은 계곡 속으로 은둔한다. 김시습과 김창흡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한 산과 계곡은 바로 설악산 수렴동계곡이다.
내설악의 수렴동계곡은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수렴동대피소까지 약 5.6㎞로 외설악의 천불동계곡 및 남설악의 흘림골과 함께 설악산 단풍명소로 유명하다. 설악산의 여느 계곡과 달리 조붓한 산길이 평지처럼 순할 뿐 아니라 길섶을 수놓은 오색단풍과 투명한 에메랄드빛 담(潭)의 유혹에 단풍철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예전에는 수렴동계곡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인제의 백담마을에서 백담사까지 계곡미와 단풍이 황홀한 백담계곡을 두세 시간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백담마을 주민들이 사회적기업 형태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백담사까지 수시로 다니면서 백담계곡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전락했다.
백담계곡과 수렴동계곡이 만나 강폭을 넓히는 곳에 위치한 백담사는 신라고찰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과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한 백담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5공(共) 비리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은둔하면서 유명해졌다. 백담사(百潭寺)라는 이름은 대청봉에서 이곳까지 담이 100개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백담사 앞 수렴동계곡에는 작은 돌탑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백담사나 설악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작은 소원을 담아 쌓은 돌탑으로 큰물에 휩쓸려 허물어지면 다시 쌓고 또 쌓아 수렴동계곡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수렴동계곡으로 가는 등산로는 이 돌탑 사이로 난 세월교를 건너야 나온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수렴동계곡 초입의 등산로 옆에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작은 길이 계곡을 따라 100m 정도 뻗어있다. 발끝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원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황홀한 계곡물이 작은 돌탑 무더기를 돌아 흐르는 소리가 청아한 이 길에서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설악산의 수렴동계곡은 금강산의 수렴동계곡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지만 금강산의 수렴동은 설악산의 수렴동보다 한 수 아래인 모양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금강의 수렴동이 오두막집의 들창에 친 발이라면, 설악의 수렴동은 경회루의 넓은 한쪽 면을 뒤덮고 있는 큰 발이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추색이 완연한 수렴동계곡은 최남선의 찬사가 빈말이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물살이 센 여울처럼 보이는 황장폭포, 에메랄드빛 담이 보석처럼 영롱한 사미소 등 수많은 담이 단풍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빨간색, 주황색, 오렌지색, 노란색 단풍을 비롯해 초록색 잎과 갈색 낙엽이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도 눈이 부실 정도.
수렴동계곡은 영시암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다. 영시암은 ‘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뜻으로 아버지와 형제를 잃은 김창흡이 세상과 영원히 단절하겠다는 선언적 뜻을 담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김창흡은 영시암 일대를 “봉우리와 골짜기가 그윽하고 기이하며, 흙이 많아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곳이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시암 텃밭에는 김장용 배추가 나날이 몸무게를 더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하던 터가 있다는 영시암 골짜기에서 5분 정도 산을 오르면 등산로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입산이 금지된 용아장성릉을 중심으로 왼쪽 길은 오세암와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향하는 코스이고, 오른쪽 길은 수렴동대피소와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오르는 길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대청봉을 오르려면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수렴동계곡은 수렴동대피소 앞에서 구곡담계곡으로 이름을 바꾼다. 구곡담계곡은 계곡의 굽이굽이에 담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시암에서 구곡담계곡을 따라 1.2㎞를 더 오르면 깊은 산속에 위치한 수렴동대피소가 나오고 그 아래에 첫 번째 담인 방원폭이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방원폭 뒤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용아장성릉의 옥녀봉으로 가파른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가을비가 만든 운해에 둘러싸여 더욱 신비롭다. 등산로가 좁아지고 험해질수록 구곡담계곡은 더욱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지만 대청봉이 가까워질수록 산속은 만추의 풍경이기 때문에 단풍여행은 안타깝게도 수렴동대피소에서 끝난다.
서북능선과 용아장성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흘러들어 내설악에 깊이 파놓은 수렴동계곡.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떠난 사랑하는 나의 임은 수렴동계곡을 에메랄드빛으로 채색한 100개의 담이 아닐까.
인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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