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서화악(詩書畵樂)
4분 33초 동안 침묵의 연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가 알았다면 반드시 퇴계(退溪)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다. 퇴계가 존 케이지보다 500년 전이나 먼저 자연의 소리를 예술적 대상으로 이해하고 그 시연회를 했으니 말이다. 퇴계는 연꽃 필 무렵에 남대문 밖 연지에서 시회(詩會)를 주도했다. 그런데 시회에서 운을 띄우고 시를 지어 주고 받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만 연꽃 봉오리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목적인 침묵의 시회였다.
옛 그림을 이해하려면 화폭 속에 담긴 동양적인 자연관과 미학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재관의 ‘송하처사도’. 키 큰 소나무 아래 한 처사가 동자를 데리고 초연하게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품위와 풍류가 함께 담긴 그림이다. 조선 후기, 종이에 옅은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돌베개]
짧은 일화지만 우리 옛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한 장면이다. “자연의 법도를 체득하여 인간 본성의 회복”한다는 예술 행위의 가장 높은 목표가 제시돼 있고, 선비들의 예술 향유가 시서화악(詩書畵樂)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잘 보여준다. 여러 아집도(雅集圖·문인들의 사교모임을 표현한 그림)나 야회도는 선비들의 이런 멋들어진 풍류 현장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옛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화 전반을 이해해야 한다. 저자가 여러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의 옛 그림은 이상적인 정치체제와 군자의 삶을 꿈꾸는 선비의 삶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모든 미술 작품은 유형문화이며, 그것을 생산한 무형문화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가형(假形)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무형의 진성(眞性)을 파악하는 것이 옛 그림을 이해하는 요체다.
저자가 산수화를 감상하는 세 단계로 경치·흥취·이치를 설명하면서 책을 시작하는 것도 이런 보이는 가형을 넘어 무형의 진성을 파악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경치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경관을 그린 것이며, 흥취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해 얻은 감격을 표현한 것이며, 이치는 만물의 근원적인 이치를 깨닫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이다. 책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넘어, 그것이 품고 있는 동양적인 자연관과 미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저자는 선비들의 문인화, 궁정의 일월오악도 같은 궁궐의 채색 그림에서 민화, 그리고 각종 장식미술과 의복에 적용되는 색에 내재된 상징적인 의미를 꼼꼼하게 읽어준다. 대부분의 전통 예술에 관한 책들이 장르별로 나누어져 전공별로 별책으로 쓰여지는데, 이 책은 전장를 아우르고 있다. 이는 사용처와 향유 계층이 다르기는 하지만 같은 문화적인 뿌리에서 자라나온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 사회 구현을 위한 예비적 수양으로서의 예술 향유라는 점에서는 임금도 선비도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상적인 삶을 위한 행동 윤리 속에서 태어난 그림은 일종의 망각 방지책 같은 것이다.
문인화가 윤두서의 ‘무송관수도’. 17세기 후반, 비단에 수묵, 개인 소장. [사진 돌베개]
성종은 “본받고 경계할 만한 일”을 가려 병풍을 만들게 했는데, 늘 곁에 두고 성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정사로 바빠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 대신 보고 즐기려고 그리게 했던 그림이 책가도(冊架圖) 그림이다. 선비들에게 시서화악은 필수교양이었으며 민간에서도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를 그려서 생활윤리에서 삼가고 명심할 것을 되새겼다. 상징은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의미체계이며 동시에 공동체에 동일한 가치관과 행동패턴을 규정한다.
예컨대 소나무와 잣나무(松柏)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김정희의 ‘세한도’, 이인상의 ‘설송도’는 어려운 세상에도 굽히지 않고 “꿋꿋한 겨울 소나무의 기개”를 높이 사는 그림이다. 절개와 지조에 대한 이런 상징적인 관념은 일상 생활로도 연결되어 결혼할 때 사용하는 혼서보에 수놓은 송죽, 혼례상에 놓이는 솔가지와 대나무도 부부간의 절개와 지조라는 동일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작품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상징 분석과 더불어 저자는 옛그림의 배경이 되는 당대의 철학, 문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여러 차례 촉구한다. 그는 “옛그림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로 상고주의를 지적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건국됐다. 유교역사관의 핵심 원리인 상고주의는 선대 문물과 사상을 존중하는 태도다. 그들에게는 하(夏)·은(殷)·주(周) 삼대가 존재했던 이상사회였으며, 다시 도달해야만 하는 지상목표였다.
이러한 상고주의적인 태도가 갖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많은 우리의 옛그림들이 중국회화의 모방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21세기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것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고, 융합하면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선의 왕도 정치의 이상적인 모델은 정의와 법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요순시대다. 중요한 것은 요순시대 자체가 아니라 ‘정의와 법치’가 정치적 이상으로 제시됐다는 점이다.
지금 서울의 상징으로 사랑을 받는 해치는 정의와 법치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해치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옳지 못한 사람을 깨”무는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신령스러운 동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가 보는 해치 캐릭터에게는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까 싶다. 만화 같은 귀여움은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상실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닐런지.
이진숙 미술평론가
[출처: 중앙일보] 저 솔가지의 한 획 한 획 … 이상향을 품에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