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고 느렸다. 어디든 깨끗하고 소박했다. 노르웨이 남서부, 오슬로에서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크리스티안순에 도착했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피오르(fjord) 순례에 나섰다. 64번 지방도로, 아틀란테하브스베이엔(Atlanterhavsveien·대서양길)이라 불리는 8.3㎞의 길은 스키점프대처럼 치솟은 다리로 섬과 섬을 잇고 있었다. 바다 위를 달리고 시골길을 지나 바닷가 소도시 몰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예이랑에르(Geiranger),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피오르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페리를 타고, 다시 자동차로 달리고, 또 페리를 타고, 눈 덮인 산봉우리 밑 해발 400m 고도의 호수를 지나니 예이랑에르가 내려다보였다. 독수리 날개깃들을 닮았다 해서 ‘외르네스빙옌(Ørnesvingen·독수리길)’이라 불리는 꼬불꼬불 산길을 타고 내려가는 길은 장관이었다. 협곡을 비집고 들어온 바다가 산과 만나는 곳, 피오르가 시작되는 곳에 마을이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예이랑에르 피오르가 펼쳐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뉴질랜드와 칠레, 미국 알래스카에도 비슷한 지형이 있지만 피오르에 사람들이 사는 곳은 노르웨이뿐”이라고 말한다.
‘예이르’(화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화살의 맨 앞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인구 250명, 골짜기 속 마을은 작고 고요했다. 계곡 밖 세상과 연중 내내 이어진 길은 외르네스빙옌 하나뿐이라고 했다. 오슬로까지 이어진 다른 도로들은 겨울에는 폐쇄된다. 5월인데도 산을 넘어올 때에는 진눈깨비가 몰아쳤다. 산 아래 풀밭과 새잎이 돋아나는 나무들, 눈 덮인 산꼭대기는 한눈에 4계절을 보여주는 듯했다.
부둣가의 레스토랑 옆에는 목조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아랫단은 돌로 받치고, 나무로 벽을 이었다. 지붕에 떼를 입힌 건 이 동네 전통 방식이다. 여름철 햇빛과 겨울철 한기를 막아주기 때문이란다. 언덕길을 올라가면 테마파크의 기념품점처럼 예쁜 초콜릿 가게가 나온다. 위층은 초콜릿을 파는 하늘색 상점이자 카페이고, 아래층 작은 ‘공장’에선 부지런히 한 남자가 초콜릿을 휘젓고 있다.
카페도 초콜릿 가게도 식당도 모두 아담하다. 군더더기 장식도 없고, 옛스럽지도 그렇다고 모던하지도 않은 것이 이곳 사람들 삶의 모습이다. 빼어난 경관도 좋지만 이 외진 곳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피오르를 옆에 끼고 느릿느릿 걸으며 마을의 역사를 엿보는 것은 여행의 숨겨진 재미였다.
산에서 쏟아져내리는 강물은 유속이 빨라 얼지 않는다. 이곳에 오래전부터 마을이 자리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나 있는 산책로로 들어섰다. 한옆에 낡은 파이프가 보였다. 수력발전을 할 때 쓰던 것이라고 했다. 부두 옆 캠핑장엔 캠핑카와 텐트들이 모여 있고, 가파른 산등성이에는 관광객들에게 빌려주는 집들이 있다.
집들의 뒷면은 부두를 향해 있고, 위쪽 길로 난 앞면에는 초콜릿 카페 등의 가게가 있다.
주민 수는 몇 안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당 넓은 학교 옆엔 오래전 썼던 옛날 교사(校舍)가 그대로 서 있다. 학교 옆은 노인 요양홈이다. 노르웨이는 인구 510만명 중 20%만 도시에 산다. 피오르 근처 섬 출신인 헬렌(40)은 “나는 전교생이 52명뿐인 시골 학교에 다녔다. 노르웨이에선 시골이나 도시나 삶의 질은 똑같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피오르의 물빛은 푸르다 못해 검었다. 여름이면 ‘일곱 자매들’이라 불리는 일곱 개의 폭포가 산꼭대기에서 바다로 내려온다고 했다. 천혜의 협곡을 보러 외부 관광객이 처음 예이랑에르에 들른 것은 19세기 말이다. 1400년 무렵부터 마차와 말이 다니는 도로가 있었다지만 예이랑에르는 현대가 되기 전엔 오지나 다름없었다. 1889년 두 마리 말이 끄는 네 바퀴 마차를 타고 남쪽 내륙의 릴레함메르에서 이곳 경치를 보러 온 ‘첫 관광객들’이 도착했다. 릴레함메르에서 온 손님들은 2년 뒤 이곳에 호텔을 지었다. 산기슭에 위치한 유니온 호텔이 그곳이다.
피오르드 지역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집들. 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붕에 풀을 심은 것이 특징이다.
이 호텔을 짓고 4대째 경영해온 미엘바 집안의 역사는 근현대 예이랑에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대째 이어진 호텔은 초창기 목조건물에서 1979년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호텔 1층에는 자동차 박물관이 있다. 1932년산 고풍스러운 뷰익 앞에는 자동차를 공동소유했던 농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옆에는 고풍스러운 외관의 1931년식 내시와 1919년식 캐딜락57이 위용을 자랑한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세상이 바뀌던 시절, 농부들은 일종의 차량조합을 만들어서 미국 자동차를 사들였다. 깎아지른 협곡 마을에서 타기엔 적합하지 않았기에 미엘바 집안에서 자동차 개조공장을 만들어 ‘피오르 스타일’로 고쳤다. 이렇게 재탄생한 자동차들 문에는 예이랑에르의 마크가 찍혀 있다.
미엘바 호텔의 자동차 전시관.
미엘바 집안 3대손인 칼 미엘바는 여기저기 흩어졌던 자동차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로 호텔 경영을 맡고 있는 신드라 미엘바(47)는 “아버지는 이 차들이 예이랑에르에 속한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1993년 소냐 여왕도 은혼식 때 이곳을 방문했다”고 자랑하지만, 오래된 호텔도 세상의 변화 앞에선 도리가 없다. 직원 120여명 중 상당수는 외지인이며 스웨덴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고령화 탓에, 이곳 주민들로는 노동력을 충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광객으로 경치를 구경하기는 좋지만 피오르 안에서 사는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그 자취를 보여주는 곳이 유니온 호텔 맞은편의 피오르센터다.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아담한 박물관은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예이랑에르의 옛 생활상을 보여주는 민속박물관이면서, 뱃길 체험과 폭포 체험을 3D로 구현한 미니 테마파크 같기도 했다. 배를 타고 피오르를 지나듯 바닥이 흔들리고 물살이 튄다.
예이랑에르의 피오르 센터. 강을 따라 아래쪽으로 산책로가 나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피오르 센터 안에는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과 심지어 '체험 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사진속 짧은 다리를 지날 때면, 배를 타듯 흔들린다!
이 협곡의 상징과도 같았던 닙스플로(knivsfla), 수면에서 250m 위 절벽에 자리잡았던 ‘벼랑농장’들이 사라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염소를 키우던 농장들은 산사태 위험 때문에 1960년대가 되자 모두 떠나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농장 건물들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숨어 유유자적 배를 타고 노니는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슬로에서 국내선 항공편으로 올레순으로 이동, 올레순에서 124㎞는 자동차로 움직이는 게 편하다. 에이스달에서 시작되는 지방도로 63번이 외르네스빙옌과 예이랑에르로 이어져 있다. 여름철에는 올레순에서 예이랑에르까지 정기버스가 운행된다. 헬리실트에서 피오르로 들어가는 카페리는 하루 4~8차례 운항한다. 6월20일부터 8월20일 사이에는 발달렌 부두에서도 매일 2차례 페리가 다닌다.
그림같은 초가집, 첸달 호수와 빙하
예이랑에르를 뒤로한 채 산을 넘어 또 다른 협곡으로 향했다. 노르드피오르다. 1848m 높이의 스콜라 산이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반긴다. 해마다 여름이면 해수면 높이부터 이 산에 뛰어올라가는 경기가 열린다고 했다. 피오르가 끝나는 곳에 7000명이 사는 작은 도시 로엔이 있다.
눈 덮인 산들과 셴달 호수를 바라보며 초가집들이 서 있다. 미네랄 성분이 많은 이 호수의 물빛은 유독 파랗다.
로엔의 명물은 피오르와 거의 맞닿을 듯 가까이 있는 셴달 호수다. 물이 유난히 푸르다. 물속 미네랄 성분이 햇살을 머금고 에메랄드그린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람선의 선장은 “1890년대부터 증기선 관광이 성행하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호숫가 언덕엔 브렝 폭포가 떨어지고, 역시 지붕에 풀밭을 얹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풍경이겠구나 싶었다.
호수가 끝나는 곳에는 레스토랑이 있고 송어요리를 팔았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송어는 흰살생선이었다. 호수의 미네랄 때문에 생선살이 붉지 않고 희다고 했다. 호수를 떠나 숲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니 셴달 빙하가 나왔다.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생태학자였던 아르네 네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로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 가치를 뒀다. 그는 환경을 인간의 쓸모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걸 ‘표층생태주의’라 부르면서, 이를 벗어난 심층생태주의를 주창했다. 어떤 이들은 네스와 같은 사람들을 ‘근본생태주의자’라 부르기도 한다. 네스가 바로 노르웨이 태생이다. 평생 숲과 산골짜기를 벗삼아 찾아다녔던 네스 같은 사람을 낳은 것은 노르웨이의 자연이었다.
유난히 흰 자갈들, 봄을 맞아 연초록을 뽐내는 나무들, 그 위로 서늘한 푸른 빛을 내는 빙하.
하지만 아름다운 피오르들이 지금까지 공짜로 지켜진 것은 아니다. 1970년 네스는 700m 높이의 마르달스포센 폭포 앞 바위에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었다. 정부가 피오르에 댐을 건설해 자연을 망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네스를 비롯한 일군의 시위대는 경찰에 들려나왔고 결국 댐은 예정대로 지어졌으나, 이 사건은 노르웨이 전역에서 환경을 지키자는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예이랑에르도 실은 지금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05년 유네스코가 그 일대를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지만 정부는 피오르를 가로지르는 전력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밤이 되어도 여전히 날은 밝았다. 피오르에 한 주민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올린다. 손바닥보다도 큰 물고기였건만, 낚시꾼은 “너무 작다”며 이내 다시 풀어준다. 팔뚝만 한 고기가 낚이는 이곳에서 그 정도 크기는 치어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선선한 바람,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산들과 바다. 피오르 사람들의 삶의 시간은 우리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아르누보의 도시' 올레순
노르웨이 남서부 올레순(Alesund)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와 섬들로 이뤄진 인구 4만5000명의 작은 도시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원래 부르던 이름은 ‘카우팡’, 시장이라는 뜻이었다. 바닷가 시장 마을이 1838년 시로 격상되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올레순은 ‘아르누보(신예술)의 도시’로 통한다. 1905년 큰 화재가 일어나 목조주택 850여채가 불에 탄 뒤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스타일로 도시가 재건축됐기 때문이다. 악슬라(어깨)라는 이름의 산 전망대에 올라가면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희고 노랗고 파란 집들이 모자이크돼 만들어내는 풍경은 왜 이 곳이 아르누보의 도시라 불리는 지 알수 있게 해준다. 현지 신문 다그블라뎃이 2007년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았던 곳이기도 하다.
악슬라 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올레순의 전경은 왜 이곳이 ‘아르누보의 도시’라 불리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바닷가 양편으로 지어진 지 100년 넘은 호텔과 집들이 들어서 있다.
악슬라 전망대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사람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은 장식적이고 화려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하지만, 올레순의 아르누보는 조금 다르다. 옹기종기 예쁜 집들이 모인 유럽의 여느 도시들에 비하면 소박한 편. 건물 외벽 가운데에 뱀 무늬, 밧줄 무늬, 투박한 얼굴 모양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가이드 벤테(67)는 “바이킹들의 문양을 곁들여 올레순만의 아르누보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운하처럼 도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호텔들과 언덕 위의 집들은 깔끔하고 아름답지만 관광객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허세나 화려함은 없다.
시내 중심가의 아르누보 센터는 1907년 지어진 건물이다. 약국으로 쓰이다가 2001년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약국 시절의 고풍스런 가구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벽지,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문화와 2차 대전 후 재건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볼 수 있다. 아르누보 센터 앞에는 쇠파이프에 온수를 넣은 ‘온돌 벤치’가 지나는 이들을 붙잡는다.
아르누보 센터
온돌 벤치
올레순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아틀란테하브스파르켄(대서양 수족관)이다. 바닷물을 가둬 물개와 물범을 키우고, 바위 지형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친환경 수족관으로 유명하다. 앞발로 박수를 치며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물개들 뒤편으로 수평선이 이어져 있다. 건물 안과 밖에 여러가지 체험 시설들이 있다. 수조에 손을 넣어 불가사리를 커다란 가리비 위에 올렸다. 가리비가 포식동물인 불가사리를 피해 허둥지둥 도망을 친다.
올레순 대서양수족관의 사육사가 물개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지형을 살려 바닷물을 끌어들인 이 수족관은 친환경 설계로도 유명하다.
언덕 위로 걸어올라가니 작은 영화관이 나온다. 멀티플렉스 상영관들만 남은 한국에선 이미 오래 전 사라진 소극장. 기둥에 붙은 <어벤저스>와 <매드맥스> 포스터만 아니라면 이 곳이 극장인 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오후 5시가 넘으면 거리는 텅 빈다. 저녁 늦게까지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레스토랑 중 한 곳에 들어가 바칼라우를 먹었다. 바칼라우는 스페인에서 대구를 가리키는 말인데, 노르웨이에서는 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를 지칭한다.
올레순의 작은 영화관
함께 간 벤테에게 “이렇게 일찍부터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올레순 관광당국에서 일하는 벤테는 “안 그래도 그것이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집권 우파 연정 중 가장 보수적인 진영에서 평일 영업시간 연장, 일요일 영업 등 관광산업을 키우기 위한 방안을 내놨으나 결국 무산됐단다. 벤테는 “나도 소비자로서 가게들이 일요일에 문을 열면 편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며 삶의 질 순위 1위인 노르웨이 시민다운 답변을 내놨다.
고요한 항구에 서 있는 빨간 등대가 눈에 띈다. 지어진 지 150년이 넘은 이 등대는 객실 1개짜리 호텔이다. 이웃한 바닷가에 위치한 브로순뎃 호텔에서 운영하는 특별 객실인 셈이다.
1층엔 침실, 2층엔 욕실이 있는데 1박에 550달러가 넘는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를 디자인한 유명 건축회사 스뇌헤타가 실내 설계를 맡았고, 주로 신혼여행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스웨덴 말라렌의 ‘떠다니는 수족관 호텔’ 우테르인, 네덜란드 하를링겐 부두의 독사이드 크레인 호텔, 미국 플로리다주 키라르고의 줄스해저롯지 등과 함께 세계의 이색호텔들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다.
오슬로에서 만난 고흐+뭉크
노르웨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두바르 뭉크다. 오슬로의 뭉크갤러리에서 ‘반 고흐+뭉크’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특별전시회를 볼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예술가들, 그러나 그리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두 사람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고흐와 뭉크라니, 얼핏 두 사람의 작품 스타일을 생각할 때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다. 1853년 태어나 1890년 세상을 뜬 고흐는 네덜란드 태생이고, 186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뭉크는 노르웨이 남동쪽 오달스브룩에서 태어났다. 19~20세기 북유럽의 대표적인 화가인 두 사람의 접점은 프랑스 파리다. 파리에서 두 사람은 유럽 대륙의 화풍과 사조들을 받아들였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고흐는 1886년부터 2년 동안 200여점을 그린 뒤 아를로 옮겨갔고, 1890년 생레미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뭉크는 고흐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 파리에 도착했다.
뭉크의 '마돈나'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과 오슬로 뭉크갤러리의 합작으로 이뤄진 전시회는 두 걸출한 화가가 남긴 작품들을 교차해 보여준다. 병 든 아이, 절규, 낫을 든 밀밭의 농부,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 75점의 유화와 25점의 스케치들에는 예술가들의 내면의 고통이 담겨 있다. 점묘파 화가 쇠라와 고흐, 뭉크의 작품들이 한 벽에 걸리니 미묘한 붓질의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관객들을 쏘아보는 듯한 고흐의 자화상이 너무나도 강렬한 화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보이는 반면, 뭉크의 자화상은 관객의 어깨를 넘어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고흐의 밤은 어둡지만 별들은 노랗게 빛난다. 뭉크의 밤은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색채들로 젖어 있다. 무도회에서 춤출 때조차 뭉크의 인물들은 관객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절규’의 가장 유명한 버전은 오슬로국립건축디자인박물관 소장품인지라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없었지만 스케치에 좀더 가까운 또 다른 ‘절규’가 있어 아쉬움을 달랬다. ‘모성’이 가진 모든 생명력을 제거해버린 듯 창백한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다.
전시는 9월6일까지다. 한진관광은 오슬로 직항 대한항공 전세기를 6월20·27일, 7월4·11일(총 4회, 매주 토요일) 운항하며 카타르항공도 오슬로에 취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