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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태실(胎室)이 지켜낸 김천 직지사

왕의 태실이 지켜낸 김천 직지사

 

 

직지사 대웅전 옆의 佛頭花 나무에 치렁치렁한 꽃이 만개했다. 만개한 꽃 아래로 떨어진 꽃잎이 마치 쌀알을 흩뿌려놓은 듯하다. 흩어진 꽃잎이 마치 부처님 앞에 내어놓은 보시(布施) 같다.



경북 김천의 직지사. 법당 앞 단풍나무 숲에 누군가 붙여놓은 한 장의 소원지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 봄까지 지켜주세요.’ 아무런 단서 없는 딱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짐작하는 사연만으로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막 지났습니다만, 오늘 LIFE & STYLE은 절집을 찾아갑니다. 김천의 직지사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도로 다져진 숲길을 걸어 암자를 둘러보았고, 청량한 계곡의 폭포 뒤로 숨은 절집 청암사까지 찾아갔습니다.
신록이 녹음으로 번져가는 숲도, 암자에 깃든 이야기도, 데일 듯 뜨거운 기도도 거기서 만났습니다만 그 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암자와 절집을 찾아가는 긴 숲길 위에서 주어졌던 괄호처럼 빈 시간이었습니다.


# 왕의 태(胎)가 직지사를 지키다

직지사는 ‘태실(胎室)’을 빼고 말할 수 없다. 태조 이성계에 이은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 얘기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른 곳에 있던 자신의 태실을 경북 김천의 직지사 뒤편 북봉으로 옮긴 것이다. 자고로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를 땅에 묻고 석물을 세웠다. 그게 ‘태실’이다. 태를 묻은 이가 왕이 되면 태실의 대접도 달라졌다. 주변을 정비하고 석물을 추가로 설치했다. 이렇게 정종이 왕에 등극하면서 태실을 김천으로 옮긴 것이다.

정종은 태실을 옮기고 직지사에 자신의 태실을 수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직지사가 오래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태실 수호의 임무 덕분이었다. 태실은 사찰의 위세뿐만 아니라, 직지사 인근의 숲도 지켜줬다. 조선왕실은 정종 태실을 보호하고자, 태실을 묻은 산을 태봉산으로 봉한 뒤에 직지사 인근 30리 일대에서 벌목과 수렵, 경작을 금했다.

정종은 왜 하필 직지사 뒷산으로 태실을 옮겼던 것일까. 그건 바로 직지사 일대가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기(氣)를 분출하는 이른바 ‘생기처(生氣處)’인데다 직지사 뒤편 북봉의 정종 태실 자리는 풍수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인 ‘사두혈(蛇頭穴)’ 자리였기 때문이다.

정종은 과연 자신의 태를 명당에 묻고 그 효험을 보았을까.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났으니 그다지 덕을 본 건 아닌 듯 싶지만, 상왕이 돼서 19년 동안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생활하다 세상을 떴다니 권력을 지키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에 휘말린 것보다 그 편이 더 나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종은 정안왕후 김 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서 자그마치 15남 8녀를 두기도 했다.

정종이 태실을 묻은 길지와 명당의 효험을 보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직지사는 태실 덕에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 지위를 받아 당당한 위세를 누렸다. 직지사에 내려진 태실을 지키라는 명령은 사실상 직지사에 태봉산 일대의 독점적·배타적 이용권을 위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이던 1928년 일제에 의해 파헤쳐져 정종 태실은 서삼릉으로 옮겨졌지만, 지금까지도 직지사가 자그마치 600ha에 달하는 산림을 보유하고 있는 데는 530년 동안 임금의 태를 모셔온 사연이 있다. 직지사 태실은 지금 자취도 없지만, 그 흔적은 직지사 경내에 남아있다. 태를 봉안했던 태석이 직지사 천불선원 앞 안양루 마당에 남아있다. 청풍료 앞에는 난간석도 있다.

태실이 남긴 건 흩어진 석물만이 아니다. 직지사 주변의 소나무 숲 역시 태실이 남긴 유산이다. 소나무야말로 조선의 왕목(王木)이었다. 사찰림 곳곳에 거대한 둥치로 서 있는 거북 등껍질 같은 수피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각별하다. 어디 이뿐일까. 조선조 말까지 왕의 식탁에 오른 홍시를 생산하던 직지사 설법전 뒷마당의 600년 묵었다는 감나무도, 청풍료 굴뚝 옆의 팔뚝 굵기의 가지로 뻗은 늙은 개나리도 예사롭지 않다.


직지사의 산내암자 은선암의 산신각으로 오르는 청량한 숲길. 은선암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꼭꼭 닫혀있던 암자다.





# 절집 마당까지 내려온 숲

그건 그렇고. 절 이름이 왜 ‘곧을 직(直)’에 ‘손가락 지(指)’, 직지(直指)일까. 유래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선산에 신라 최초의 절집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스님이 중창할 때 자 대신 손가락으로 측량해 지었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는 얘기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래가 세 번째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얘기다.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말이나 글로 설명하지 않으며, 경전이나 책으로 전하지 않는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뜻. 참선 수행을 통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다.

격식보다 수행을 앞세운다는 이름의 유래 때문일까. 직지사의 분위기는 다른 절집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절집 안의 건물들이 헐겁다. 엄격한 격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어 분방한 느낌이다. 딱딱하게 조여진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열린 듯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산문을 들어선 이의 동선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편안하고 푸근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서다.

직지사가 여느 절집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숲이다. 직지사에서는 절의 영역과 숲의 영역이 서로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 숲이 법당 마당까지 흘러내렸다. 헐거운 건물과 마당까지 밀고 들어온 숲이 한데 어울려서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감을 보여준다. 대웅전과 비로전 사이에 숲길이 그런 식이다. 직지사에서는 대웅전을 나와 비로전으로 가려면 단풍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경내의 한 통로를 짙은 숲으로 만든 건 직지사가 유일하다.

직지사에서 또 하나 특별한 것은 물이다. 직지사 경내에는 물길이 있다. 대개 절집의 물길은 물을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는데, 직지사는 오히려 계곡의 물길을 절집 마당으로 들여놓았다. 그 물길이 숲길을 따라가고 전각의 담을 끼고 돌기도 한다. 계곡 물이 절집 마당의 수로를 따라 천불암 담벼락을 끼고 황악루 앞을 가로질러 만세루 앞의 소나무 숲을 흘러내린다.


# 암자보다 ‘가는 길’

▲ 직지사 천불선원 앞마당에 남아있는 정종의 태를 담았던 태석.

직지사는 한때 산내 암자만 26개를 거느렸다. 절집의 건축물이 도합 352칸에 달했을 당시의 얘기다. 지금 직지사가 거느린 산내 암자는 모두 다섯. 부속 암자는 직지사가 깃든 황악산 자락에 부챗살처럼 퍼져있다.

직지사를 마주 보고 왼쪽부터 순서대로 다섯 암자의 이름을 적어보면 이렇다. 은선암, 명적암, 중암, 백련암, 운수암. 산자락 깊이 들어선 암자는 어둑한 숲 사이에 놓인 실타래 같은 길로 이어진다. 모든 길이 다 시멘트 포장도로라는 게 아쉽기도 하고, 암자로 향하는 길이 제법 가파르고 길어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숲이 워낙 깊고 짙으니 그 길에서 걷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모두 청량해진다.

직지사의 다섯 암자는 사실, 암자 자체의 경관으로만 본다면 이렇다 할 게 없다. 직지사의 암자로 가는 길의 보람은 ‘거기까지 가는 길’ 위에 있다. 직지사에서 암자로 가는 길은, 적막한 숲길을 따라 가빠지는 제 숨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늦춰 걷는 길이다. 따져보면 고요한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면서 저를 돌아본다면, 그게 기도와 뭐 그리 다를까.

직지사 다섯 암자 중에서 적막하기로는 은선암이 으뜸이다. 나머지 네 개의 암자가 하나의 길에서 가지 치듯이 이어진 숲길 끝에 있는데, 은선암은 반대편 산자락에 홀로 뚝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은선암까지 가는 산길도 길고 가파르다. 은선암은 최근까지 아예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30년 넘게 암자를 지키던 노스님이 앓아 누우면서 사람을 들이지 않았던 것. 오랜 투병 끝에 두 달 전쯤 스님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노스님이 떠난 자리에 상좌스님이 들어왔다.

은선암에 들어섰을 때 군 입대를 앞두고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청년이 연상됐다. 노스님의 병환으로 오래 방치해 덥수룩하던 잡초와 덩굴을 쳐내면서 꽃과 나뭇가지를 바투 잘라내 그래 보였다. 하지만 소쩍새 울음소리 들리는 법당 마당 앞에는 작약꽃이 온통 만개했고 작약꽃 지고 나면 노스님이 가장 좋아했다는 능소화가 암자 이곳저곳에서 지천으로 꽃을 피울 것이니, 거기까지 온 보람은 그것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 특별할 게 없어서 특별한 곳

▲ 고즈넉한 절집 청암사 들머리의 물길에 내걸린 청아한 폭포.

은선암에서 되돌아 나와 반대 방면으로 다시 길을 잡는다. 다섯 암자 중에서 은선암을 뺀, 네 곳의 암자로 이어지는 길은 해발 1111m의 황악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와 거의 겹쳐진다. 그 길에 올라 가장 먼저 만나는 명적암은 근래 지어진 암자. 이렇다 할 볼거리도 이야기도 없지만 터덜터덜 돌아 나오는 길가에 세워진 작은 팻말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거기 적힌 법구경의 구절을 다시 읽는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게 길은 멀어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생사의 길은 멀고 길어라.” 깊은 산중 적막한 암자에서의 정진은, 이 길을 찾기 위함이리라.

명적암에 이어 곧 중암이다. 중암은 수행 정진을 내건 도량이라 한 달에 한 번, 음력 24일에만 외부인에게 개방한다. 출입금지 표지판 앞에서 드는 의문 하나.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다 해도 여기 암자까지 찾아올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일까. 개방하는 날이 아니라도 여럿이 몰려가거나 소란스럽게만 하지 않는다면, 조용하게 찾아와 경내를 들여다보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다. 중암에서는 마당을 빙 둘러 심은 붉은 적송이 특히 인상적이다. 가지를 뒤틀고 선 적송의 비범한 자태에서, 중암에서 정진 중인 스님의 서슬 퍼런 기세가 느껴진다.

중암을 나와 백련암과 운수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단풍나무로 울창하다. 단풍 숲이 어찌나 깊은지 가을에 꼭 한 번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백련암과 운수암은 두 곳 모두 비구니 스님의 암자다. 그래서일까. 마당이 잘 키운 야생화들로 화사하다. 작은 마당을 두른 소박한 백련암도 그렇고, 성벽처럼 높은 돌담을 두르고 있는 운수암도 그저 적막할 따름이다. 직지사의 산내 암자는 근사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치장을 뽐내는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암자에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것은 눈과 마음을 빼앗을 만한 특별한 것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제 마음의 기척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고요해서이기도 하다. 더불어 직지사의 암자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딱 하나, ‘오래 숲길을 걷게 한다’는 것이다.


직지사의 암자 중 하나인 중암의 중심건물인 영산보전의 화려한 꽃 문살.



# 숨어든 왕후를 지켜주다

김천을 대표하는 절집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직지사다. 그 명성에 밀려 청암사는 낯설다. 하지만 절집의 내력과 뿜어내는 청량한 기운으로 치자면 청암사도 이에 못지않다. 청암사는 왠지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그득하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길부터가 그렇다. 들머리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협곡이다. 그 옆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서 물길을 건너면 절집 마당을 들어서게 된다.

청암사는 기사환국 때 궁궐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강등된 인현왕후가 숨어들었던 곳이다. 장희빈의 간계로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5년 뒤 갑술옥사 때 다시 왕후로 복귀했던 숙종의 계비, 그 인현왕후 말이다. 청암사는 지금도 제법 깊은 산중인데, 인현왕후가 몸을 숨기던 시절이야 오죽했을까. 첩첩산중의 절집에서 폐위돼 비탄에 빠진 왕후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특이한 건 청암사의 몇몇 법당 건물들이 반가 고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웅전 양 옆의 진영각과 육화전이 그렇고, 별당 격인 극락전 건물도 그렇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곳이 따로 대문을 달고 뚝 떨어져 있는 극락전이다. 여기가 바로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가 기거했던 곳이다. 사대부 한옥의 양식으로 극락전을 지은 건 왕후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궁중의 상궁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폐위당한 인현왕후를 만나러 청암사를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상궁들은 왕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왕후를 돕기 위해 청암사에 시주를 바치기도 했다. 극락전 중창과정에서 나온 시주록 명단에 이름을 올린 궁중 상궁만 26명이다.

청암사와 상궁의 인연은 훗날에도 이어진다. 고종의 넷째 아들 영친왕의 생모 엄비의 총애를 받았던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송설당. 김천 출신인 그는 빈민구제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독립자금을 대기도 했던 여걸이었다. 그는 말년에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지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청암사의 중창도 한때 불교에 귀의해 정진했다는 그의 시줏돈이 큰 보탬이 됐단다.

누구는 그곳에 자신의 태를 묻었고, 누구는 그곳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갔으며, 또 출가를 꿈꿨던 누구는 모은 돈을 불전에다 바쳤다. 얼마나 많은 인연과 기도가 그곳을 지나갔을까.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에도 직지사와 다섯 암자, 그리고 청암사는 번져가는 녹음 속에서 그저 고즈넉할 뿐이다.


■ 여행정보

직지사·청암사 가는 길 = 직지사를 찾아가려면 경부고속도로 김천 IC보다 추풍령 IC로 나가는 게 더 빠르다. 추풍령 IC로 나가서 광천삼거리에서 김천 방면으로 우회전해 4번 국도를 탄다. 덕천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대항면사무소와 직지사우체국을 지나면 이내 직지사다. 직지사가 김천 북쪽에 있다면 청암사는 김천 남쪽에 있어 차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직지사에서 903번 지방도로를 타고 동구지산과 삼성산 사이의 계곡을 타고 넘어 구성면사무소까지 가서 3번 국도로 갈아타고 감천의 물길을 따라간다. 지례면을 지난 뒤 903번 지방도로에 올라 증산면사무소까지 가면 거기서 청암사가 지척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직지사 입구 주차장 인근의 파크호텔(054-437-8000)을 추천한다. 직지사 입구에 민박집들도 많다. 김천 혁신도시에 로제니아 호텔(054-429-4700)이 있다. 청암사나 수도암 부근에도 인근 수도산 등산객을 위한 모텔, 민박집들이 많다.

지례면은 흑돼지구이로 이름났다. 주민들이 1980년대 후반 지례의 명물이던 흑돼지 복원에 나서면서 면 소재지에 스무 곳에 달하는 흑돼지 전문식당이 생겨나 ‘흑돼지 거리’가 됐다. 지례 흑돼지는 크기는 작지만, 맛은 뛰어나다. 감문면의 배신식당(053-430-5834)도 돼지구이로 이름난 60년 내력의 맛집이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돼지고기를 구워낸다. 오단이꼬마김밥(054-434-7924)과 중국만두(054-434-2581)는 간식으로 괜찮다. 김밥에는 어묵, 단무지, 오이. 이렇게 딱 세 가지만 들어가는데도 자꾸 당기는 맛이다. 중국만두는 상호처럼 진짜 중국식은 아니지만 만두소의 육즙이 제법 촉촉하다.

충북 옥천 대청호 수변의 정자 청풍정. 새잎이 돋는 이즈음의 풍경이 한 해 중 가장 아름답다. 이곳에는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뒤 숨어들었던 구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얘기가 깃들어 있다. 자신과 사랑에 빠져 김옥균이 큰 뜻을 접었다고 생각한 명월은, 그를 놓아주겠다며 정자 뒤쪽의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연둣빛 신록의 화려함으로 겨룬다면 충북 옥천의 봄 풍경을 따라올 곳이 있을까요. 대청호와 금강 을 끼고 있는 옥천은 신록이 유독 아름답습니다. 옥천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입니다만, 잦은 봄비로 호수는 만수위를 기록했고 강물도 제법 몸집을 불렸으니 지금 옥천의 봄 풍경은 예년보다 빼어납니다. 옥천의 봄날에 마주쳤던 물과 숲이 만든 풍경 이야기를 여기 풀어놓습니다.


# 꼭꼭 숨어 있던 옥천의 명소 두 곳

충북 옥천 땅에서 꼭꼭 숨어 있었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곳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하나는 물 위의 풍경,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산속의 숲 얘기다.

먼저 물 얘기부터. 잦은 봄비로 지금 대청호는 만수위다. 대청호로 흘러드는 금강 상류의 물줄기도 하나같이 몸집이 불었다. 신록이 물든 봄날에 대청호와 금강에 물이 차오르면 옥천 땅 곳곳에는 그림 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물을 한껏 빨아들인 수변 나무의 맑은 초록이 고요한 수면 위에 선명한 도장처럼 찍힌다.

옥천 땅에 물과 어우러지는 최고의 경치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대청호 상류 쪽의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에 병풍처럼 떠 있는 ‘부소담악(芙沼潭岳)’이다. 부소무니란 마을 이름은 고리산 자락 아래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리고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가에 떠 있는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부소담악은 본래 산줄기였던 곳이 대청호 담수로 물에 잠기면서 칼날 같은 능선만 수면 위에 길게 드러났고, 물에 잠긴 부분의 흙이 씻겨나가면서 바위가 드러나 마치 바위 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독창적인 풍경이 된 곳이다. 물 위에 병풍처럼 길게 펼쳐진 바위의 길이가 자그마치 700m나 된다.

부소담악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절경임에도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다. 빼어난 명승에는 옛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법인데, 부소담악에는 경관의 값어치에 걸맞은 얘기가 없다. 그저 유배객 송시열이 일대의 풍경을 통틀어 ‘소금강’이라고 일컬었다는 것 정도가 전해지는 이야기의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소담악의 비경은 대청댐 담수로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경관이기 때문이다. 산자락이 물에 잠기고, 긴 능선이 돌 병풍처럼 남아 만들어진 부소담악 경관의 탄생시점을. 대청호가 완공된 해로 잡으면 ‘1981년 산(産)’인 셈이다.


물 건너 맞은편의 구릉 위 조망지점에서 바라본 옥천의 ‘부소담악(芙沼潭岳)’과 정자 추소정의 모습. 30년째 농사를 짓던 이가 땅을 사들여 간벌하면서 이런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부소담악은 대청호 물에 잠긴 산줄기의 바위가 돌 병풍처럼 길게 이어진 절경에 붙여진 이름이다.




# 밖에서 안을 보는 자리…부소담악

경관 명소는 두 종류로 나뉜다. 그곳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는 조망대 역할을 하는 곳도 있고, 명소가 경관의 일부가 돼서 밖에서 그곳을 보는 경관이 빼어난 곳도 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관이 그림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맛이 훌륭한 곳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기준으로 나눈다면 부소담악은 ‘밖에서 안을 보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부소담악의 정자 추소정도 그 안에 들지 않고, 뒤로 물러 바위와 어우러지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최고다.

그런데 문제는 부소담악 정면을 마주할 마땅한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부소담악 앞으로는 물줄기가 U자 형상으로 굽이친다. 부소담악 물 건너편은 깊은 숲과 거친 벼랑 때문에 섬이 아닌데도 배가 아니면 닿지 못한다.

어찌어찌 물 건너 땅으로 배를 타고 건너간다 해도 부소담악의 전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야가 나올 법한 구릉이 있긴 하지만 굵은 나무들이 가로막아 경관을 즐길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소담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 부소담악을 바라볼 수 있는 근사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30년 전쯤 부소담악 맞은편에 땅 120평을 사들여 농사를 짓던 이재홍(59) 씨. 해마다 조금씩 사들인 일대 땅이 1만여 평에 달하자 지난 해부터 땅을 다듬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소담악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냈다.

여기서 정면으로 보는 부소담악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마침 대청호 수위상승으로 바위 병풍의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경관은 더욱 그림 같았다. 이런 빼어난 경관을 혼자 보는 게 너무 아쉽다는 그는 부소담악을 찾아온 이들에게 자신의 땅을 열어줄 방법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 어쩌다 사서, 어쩌다 기른 숲

이번엔 산속의 숨겨진 숲 얘기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에 꼭꼭 숨겨진 산림욕장이 하나 있다. 화인산림욕장. 지난 2013년 일반에 개방한 개인 소유의 숲이라는데, 입장료도 없고, 이렇다 할 시설도 없다.

먼저 전제할 것. 여기는 다른 독림가들이 키운 숲처럼 ‘생애를 바쳐’ 비장하게 키워낸 숲이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갖게 된 고향 땅의 산에, 또 어쩌다 보니 나무를 심게 됐고 그렇게 45년의 시간이 더해져서 만든 숲이다. 그렇다고 ‘심고 가꾸기’를 대충대충 했다는 뜻은 아니다. 산을 사고 거기 나무를 심은 것은 어쩌다 벌어진 일이었으되 숲에 들인 정성만큼은 누구와 비교해도 지지 않는다니 말이다.

화인산림욕장까지는 비좁은 논둑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 도무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 안내 팻말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러다 길이 끊겨 낭패를 당하지나 않을까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분명 ‘최근에 넓힌 길’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전에 이 길은 과연 어땠을까.

화인산림욕장을 찾은 날,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짐작건대 탐방객이 찾아오는 날보다 사람이 없는 날이 더 많지 싶었다. 외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옥천 주민들도 여기를 아는 이가 적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애초부터 산림욕장에 기대는 없었다. 궁금했던 건 이것이었다. 입장료도 없고, 하다못해 커피 한잔 팔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찾아오면 번잡스럽기만 할 뿐 득이 되는 일은 하나 없을 게 뻔한데 대체 누가, 왜 이렇게 소득 한 푼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화인산림욕장 주인 정홍용(74) 씨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인공 고관절 치환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절룩거리며 혼잣말처럼 “나무를 심느라 다리가 다 망가졌다”고 중얼거렸다. 산림욕장 구석구석을 3시간이 넘도록 샅샅이 둘러보고 난 뒤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서 이 깊고 넓은 숲의 나무를 죄다 혼자 심었으니 몸이 고장 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깊은 산중에 산림욕을 즐길 수 있을만한 거대한 숲을 만들어 내느라 한 사람이 감당한 ‘노동의 총량’은, 그것이 비록 45년에 걸친 것이었다 해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북 옥천의 화인산림욕장. 45년을 가꾼 개인 소유의 숲인 이곳에는 자그마치 1만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해 있다.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숲은 늘 호젓하다.


# 척박한 오지의 산이 수목원이 된 까닭

정 씨의 고향은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 1구. 화학리 1구는 학촌마을과 엽송마을, 그리고 만곡마을 등 3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다. 산림욕장이 들어선 산은 본래 세 마을 주민들의 공동소유였다.

주민들이 산을 팔기로 한 건 전기 때문이었다. 때는 1975년.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려면 주민들이 자그마치 25년에 걸쳐 비용을 분할 상환해야 했다. 그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주민들은 공동묘지로 쓰는 마을 공동소유의 산을 팔아 비용을 충당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쓸모없는 오지의 척박한 산을 사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다급해진 주민들은 땅을 사줄 만한, 도회지에 나가 성공한 고향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성공해 종로통에 대형 약국을 차린 고향 사람도, 마을 출신 국회의원도 다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이 땅을 정 씨가 샀다. 부친이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던 인연으로, 대학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원을 다녔던 그는 일본에서 일하면서 번 돈 250만 원을 다 털어 마을 산 6만여 평을 샀다. 지금의 가치로 셈하면 3억 원쯤 되는 돈이다.

그가 고향 마을의 쓸모없는 산을 산 건 전후 일본의 조림사업을 가까이서 본 게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나무를 심고 키워서 수입을 올리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 ‘갖고 있으면 괜찮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이었다.

처음 그의 나무 심기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시작됐다. 사정인즉 이렇다. 부지런한 농사꾼은 스스로도 부지런하지만, 남의 게으른 꼴도 못 봐준다. 완고한 어르신일수록 더 그렇다. 피가 무성한 논 주인이며, 잡초가 자란 밭 주인이 이웃으로부터 게으르다며 타박을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정 씨도 마찬가지였다. 산을 사서 그냥 놔두자 대번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돈푼깨나 있다고 산을 사놓고는 그 넓은 땅을 다 놀린다’는 게 욕을 먹는 이유였다.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주말마다 내려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가볍게 운동처럼 시작한 일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내 숙명이 됐고, 그 일은 자그마치 4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 청량한 숲길을 조용히 걷다

▲ 충북 옥천의 이지당.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돼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조헌이 후학을 가르쳤던 서당이다.
산림욕장에 당도하자 몸이 저절로 숲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산림욕장 들머리에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마치 마중이라도 나와 있는 듯했다. 우람한 둥치의 실핏줄 같은 가지마다 돋아난 여린 새잎의 색감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정 씨는 산 전역에다 3만5000그루의 메타세쿼이아를 심었다는데, 그중에서 절반 넘게 죽고 1만 그루가 살아남아 이렇게 우람하게 자랐다. 이 정도만으로도 다른 숲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국내 최대의 메타세쿼이아 군락지다. 산림욕장 들머리 오솔길에 사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이 이렇게 살아남은 것들이다.

산허리를 감으면서 이어지는 산림욕장의 전체 산책코스는 4㎞ 남짓. 수직의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자 밤나무와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숲을 지나 붉은 둥치의 금강송 숲이 등장했다.

산허리를 감고 이어지는 숲길 내내 피톤치드의 향기가 출렁거렸다. 산림욕장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조용하고, 고즈넉하다는 것. 눈을 확 휘어잡는 경관은 없지만,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제 발걸음소리만 데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번졌다.

정 씨는 아직 산림욕장 입장료를 받을 생각이 없다. 시설을 더 갖춘다면 모를까. 이 정도만 해놓고 돈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산림욕장 개방은 지난 2013년 우연찮게 숲을 찾은 안남면장이 “이 좋은 숲을 혼자만 누리는 건 벌 받을 일”이라며 사정 반, 위협 반으로 조르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산림훼손과 쓰레기 투기 등을 걱정했지만 정 씨는 “막상 개방해 보니 숲을 찾아오는 이들의 매너가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고 했다. 개방 이전과 이후가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정 씨는 “이 숲을 제 것처럼 아껴주는 관람객들을 위해, 앞으로 힘 닫는 데까지 나무를 심고 가꾸겠다”고 했다. 나무를 심고 가꾼 이의 이런 소박한 진심이 화인산림욕장의 숲에는 담겨 있다.


# 적막하고 나른한 봄날의 옥천

옥천 곳곳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도처에 있다. 신록이 물드는 요즘 같은 봄날, 더구나 잦은 비로 대청호며 금강 줄기가 만수위로 출렁거린다면 호반이나 강변 어디서든 한 편의 시와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신록이 가장 화려한 곳이라면 단연 금강 지류인 소옥천 일대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이 낙향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당 이지당과 소옥천 생태공원 사이 구간에서 만나는 신록은 탄성부터 나온다. 물가의 버드나무 신록의 색감이 어찌나 강렬한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하다.

금강이 호수에 담기는 대청호 상류의 군북면 석호리의 정자 청풍정 일대 경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청풍정에는 구한말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과 기녀 명월의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쫓기는 몸이 된 김옥균이 명월과 함께 이곳으로 숨어들었단다. 뜻이 꺾인 김옥균이 이곳에서 무력한 생활을 하며 두문불출하자, 명월은 김옥균이 자신과 사랑에 빠져 이곳을 떠나 꿈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다.

여기까지 보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훗날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인근에서 계집종으로 신분이 격하돼 10년 동안 치욕과 고통 속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면 생각은 좀 달라진다.

옥천에서 가장 빼어난 강변길은 금강 유원지에서 둔주봉이 있는 안남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금강 유원지를 출발해 합금리를 지나 가덕마을까지 이어지는 길도 나무랄 데 없지만, 특히 청마 대교부터 종미리까지 강을 끼고 이어지는 길이야말로 차로 달리는 게 아쉬울 만큼 뛰어난 경관을 품고 있다.

나들이객들은 다들 이름난 관광지로 몰려갔으니 이 길은 호젓하기 짝이 없다. 어디 강변길뿐일까. 봄날 옥천은 어디나 한가하다. 옥천읍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도,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600년 역사의 옥천향교도 모두 봄 햇살 아래 적막하고 나른하다.


■ 여행정보

옥천 부소담악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경유해 옥천나들목으로 나오면 바로 옥천읍이다.

부소담악을 가려면 옥천읍에서 4번 국도에 올라 대전 방면으로 향하다 환경사업소에서 우회전해 이지당을 거쳐 15번 군도를 따라가면 된다. 고리산(환산·581m) 둘레를 도는 이 길은 대청호 상류의 물길을 바라보며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금강유원지에서 안남면까지 금강변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코스를 즐기려면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안쪽에 있는 금강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여기서 575번 지방도로를 타면 강변을 끼고 합금리를 지나 독락정까지 이어진다.

 

 

            이성계의 탯줄을 왜 금산 땅에 묻었을까.

 

국내 최대 산벚나무 자생지인 충남 금산의 보곡산골에 지금 산벚꽃이 만개했다. 덜 핀 것과 다 핀 것, 지는 것의 색이 모두 다 다르다. 발치에 피어난 건 조팝나무꽃이다. 보곡산골이란 군북면의 궁벽한 산촌인 보광리, 상곡리, 산안리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충남 금산은 ‘비단 금(錦)’에 ‘뫼 산(山)’ 자를 씁니다.
뜻 그대로 쓰면 ‘비단 뫼’입니다.
금산 땅을 휘감아 흐르는 금강(錦江)도 마찬가지로 ‘비단 금’ 자를 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금산에서는 산도, 그리고 강도 모두 화려한 비단 같지요.
산과 강화사한 봄꽃과 신록으로 수놓아지는 이즈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 이성계의 탯줄을 왜 금산 땅에 묻었을까.

태조 대왕 태실 얘기부터 하는 게 바른 순서겠다. 충남 금산 땅이 가진 비범함에 대해 말하고자 하면 말이다. 태실은 왕손의 태를 묻은 자리. 태조 대왕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른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 땅에서 태어났다. 그가 조선을 건국한 후에 조급하게 서둘렀던 건, 뜻밖에 ‘태실 이전’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이성계는 함경도에 묻었던 자신의 태를 파서 금산 땅에다 다시 묻도록 했다. 지금도 심히 의심스러운 건, 왕손이 아니었던 그가 과연 태를 보관해두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분명한 건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성계는 자신의 태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태실을 옮겨 묻는 것은, 자신이 국왕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조선 건국이 숙명적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일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새 왕조의 첫 번째 태실 자리를 찾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물색과 숙고 끝에 태실 자리는 충남 금산의 만인산 자락으로 정해졌다. 땅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자리를 찾아낸 이는 물론이고 본래 그 자리에서 묘를 쓰고 집을 지어 살던 이에게까지 현감 벼슬을 내렸을 정도였다. 태실 자리를 내주고서 지금으로 치면 군수가 됐으니, 그것 또한 명당이 가진 발복의 힘이었을까.

태조 대왕 태실은 대전과 금산의 경계 부근인 추부터널 위 만인산 푸른 학습원 숲속에 있다. 지금의 자리가 본디 있던 자리는 아니다. 일제는 1928년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태실에 보관된 왕조의 태를 서삼릉으로 모았다. 태를 꺼내면서 석물은 내팽개쳤다. 이걸 훔쳐가기 위해 도굴범들이 석물을 매일 조금씩 움직여 도로 가까이에 옮겼다. 도굴범들이 실어가기 직전에 길가에서 태조의 태실석물을 발견한 주민들이 도난을 막기 위해 이를 인근 중부대 운동장에 가져다 놓았다. 석물은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태실 자리는 이미 땅 임자가 묘를 쓴 뒤였다. 1993년 태조 태실이 본래 자리에서 1㎞쯤 떨어진 언덕 위에 복원된 이유가 이렇다.

석물은 만인산 푸른 학습원의 숲속 오솔길로 200m 남짓 걸어 들어간 자리에 있다. 금산 땅을 굽어보고 있는 태실 앞에 서면 아늑한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이 이성계의 태를 묻었던 본래 자리가 아니고, 태실 안에 있던 태마저도 이미 꺼낸 뒤라는 걸 알고 봐도 그렇다.

조선왕조의 시작을 묻은 태실이 금산에 있었다는 건 그곳이 기운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의 수많은 왕족은 지세가 좋은 명당 중의 명당을 찾아내서 수백 기의 태실을 조성했는데, 그 처음이 이곳 금산 땅이었다니 더 무슨 말을 할까. 강과 산이 어우러지는 금산의 빼어난 경관은 이런 맑은 기운과 지세의 덕이 아닐까.




금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오지인 충남 금산의 ‘작은 방우리’ 농원 마을 강변 길 끝에서 만난 습지. 여기서부터 적벽강까지의 금강구간은 강변 산자락의 경사가 급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전인미답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 아는 이 적어서…여유작작 봄꽃 구경

금산의 봄 풍경이 가장 화려한 무늬를 갖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적다. 내로라하는 봄의 명소들은 행락객들로 시끌벅적한데, 금산에서는 아직도 호젓하게 봄을 누릴 수 있는 건 그래서다. 그러니 뭐 알게 되더라도 굳이 주변에 소문을 내지는 마시라. 그저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와서 화려한 봄날의 여유를 느긋하게 즐기면 그뿐이다.

꼽자면 더 못 꼽을 것도 없지만, 여기서는 금산의 딱 세 곳의 명소만 골라봤다. 봄날의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그래서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풍경을 품고 있는 곳들만 챙겼다. 한 곳은 산이고, 두 곳은 강변이다. 먼저 산 얘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꽃, 혹은 산골 마을 얘기다.

금산의 군북면에 ‘보곡산골’이 있다. 충남에서 가장 높은 산인 서대산과 천태산 사이에 들어선 궁벽한 오지 산촌마을인 보광리, 상곡리, 산안리 마을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세 마을을 한데 묶은 이름을 만든 건 산꽃 때문이다. 봄철에 마을이 끼고 있는 산중에 산꽃이 화르르 불붙었다 지기를 거듭한다. 진달래에서 시작해 생강나무꽃과 산벚꽃, 조팝꽃이 마을과 산자락을 뒤덮은 뒤 이어 철쭉과 병꽃나무, 산딸나무, 국수나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운다. 봄날의 그 경관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보곡산골이란 이름을 따로 지어 붙여줬다.


# 산벚꽃이 아름다운 까닭

보곡산골에 피는 봄꽃 중에서 특히 압도적인 것은 산벚꽃이다. 일대가 국내 최대의 산벚꽃 자생군락지다. 자그마치 661만여 ㎡(200여 만 평)의 산자락 가득 산벚꽃이 피어난다. 자연에서 저 스스로 자란 산벚나무는 꽃이 늦다. 산 아래 벚꽃들이 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개화를 시작한다. 짐작해보건대 보곡산골 산벚꽃의 절정은 이번 주말쯤이겠다.

산 아래 벚꽃에 대면 산벚꽃은 수수한 쪽에 가깝다. 대신 연두색 신록과의 대비로 눈이 부시다. 산 아래 벚꽃이 모여 피어서 화려하다면, 산벚꽃은 연두색 새잎의 신록과의 대비로 돋보인다는 것이다.

보곡산골은 마을 세 곳을 끼고 있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지 막막하다. 아니, 그 전에 보곡산골을 찾아가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보곡산골을 감상하는 길이 셋 있다. 첫 번째는 산 아래 자진뱅이 마을에서 출발해 크게 산을 한 바퀴 도는 길. 두 번째는 ‘보이네요’란 이름의 정자까지 차로 간 뒤, 산길을 휘적휘적 걸어 봄 처녀 정자를 지나 자진뱅이 마을에 닿는 길이다. 세 번째는 정자에서 곧바로 자진뱅이까지 내려오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은 너무 길다. 권하는 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길이다.

보이네요 정자까지 가겠다면 제원면 신안리의 절집 신안사를 목적지로 삼으면 된다. 거기서 군북면 산안리의 보이네요 정자까지는 차로 금방이다.

신안리와 산안리. 비슷한 마을 이름이다. 보곡산골이 있는 군북면에는 산안리가 있고, 산안리와 경계에 신안사가 있는 제원면 신안리가 있다. 서로 이웃한 산안리와 신안리의 이름에 모두 ‘편안할 안(安)’ 글자가 들어간다. 산안리는 산(山)이 편안(安)하고, 신안리는 몸(身)이 편안(安)하다. 산이 편하고 몸이 편하니 자연도 나도 다 편안하다. 행락인파 없이 고즈넉하게 즐기는 보곡산골의 봄꽃 구경도 더없이 편안하다.


충남 금산의 보곡산골 인근의 절집 신안사. 법당 마당의 아름드리 벚나무의 벚꽃이 절정이다.


# 스님과 고양이의 동화 속 풍경

신안사는 소박한 절이다. 마을 안에 들어선 절집은 변변한 담장도 없다. 마을도, 절도 스스로 고요하니 구태여 담을 지어 삶과 수련의 경계를 둘 일도 없겠다. 소박하게 사는 마을의 삶이 곧 불법을 닦는 일과 뭐 그리 다를까. 신안사가 들어선 마을 이름이 ‘화원(花園)’. 즉, 꽃동산이다. 이름에 걸맞게 지금 화원동은 조팝나무꽃으로 마을 전체가 그득하다.

신안사 법당 앞에는 꽃 핀 가지를 구름처럼 받들고 서 있는 벚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늙었으되 당당한 아름드리 벚나무가 법당 마당에 드리운 꽃그늘이 크고 환하다. 마당 끝으로 물러서서 보니 화려하게 꽃을 피운 벚나무가 마치 부처님 앞에 바친 탐스러운 연분홍 꽃다발 같다.

이제 막 만개한 벚꽃 그늘 아래서 신안사 주지 맥산 스님이 ‘꽃, 좋다’며 올려다보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비틀비틀 기어 와서 스님의 발목에다 몸을 비볐다. 눈이 먼 고양이라고 했다. 한쪽 눈이 멀어서 스님이 ‘일목(一目·하나의 눈)’이라 이름 붙여줬는데, 이내 다른 눈마저도 안 보이게 돼서 ‘심안(心眼·마음의 눈)’이라 이름을 바꿔줬다고 했다.

주변에서 사람의 기척만 느껴져도 툇마루 아래로 숨어들던 고양이가 스님만 나오면 어찌 알고 반갑게 나와서 몸을 비볐다. 맥산 스님은 “고양이가 나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고 산으로 들어 가버린 게 세 번인데, 그때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았다”고 했다. 봄볕이 환하게 쏟아지는 요사채 툇마루에 스님이 앉자, 고양이 심안이도 이내 스님 발치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절집을 두르고 있는 봄꽃의 화려한 색감이 동화책 삽화의 배경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을까. 봄볕 아래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스님과 눈먼 고양이의 모습이 동화 같았다.


# 절집의 호랑이와 강변의 호랑이

▲ 충남 금산 천내리 강변의 호석(虎石). 해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안사에는 고양이가 아니라, 한때 호랑이도 있었다. 나무로 만든, 네 다리로 서 있는 호랑이다. 왕방울처럼 툭 불거진 눈에다 웃는 듯 송곳니를 드러낸 호랑이의 해학적이고 친근한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지어질 정도였다.

신안사가 당당한 대가람이었던 시절, 호랑이는 아마도 산신각에 모셔져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사세가 기울면서 신안사는 달랑 주불전 극락전과 대광전만 남았다. 다른 전각에 있던 부처님들도 극락전에서 곁방살이하며 비나 피했으니 나무호랑이는 오죽했을까. 대광전의 한쪽 구석에 옹색하게 자리를 내줬지만, 투박하고 못생긴 나무호랑이 처지에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나무호랑이는 1998년 호랑이띠 해에 ‘가장 한국적인 호랑이’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급기야 잡지인지 달력인지, 표지 모델도 됐다. 새옹지마. 하루아침에 유명해지자 누군가 나무호랑이를 감쪽같이 훔쳐 가버렸다. 잃어버린 호랑이는 여태 찾지 못하고 있다. 금산 향토관에 작게 복제한 것을 전시해 두었는데 박물관신축 공사로 향토관을 헐어서 지금은 볼 수 없다.

금산에는 나무로 만든 호랑이뿐만 아니라, 돌로 만든 호랑이도 있다. 화려한 문양의 용과 익살맞은 호랑이를 돌로 쪼아 만든 ‘용호석(龍虎石)’이다. 용호석은 금강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군북면 천내리에 있다. ‘천내(川內)’. 우리말로는 ‘내 안’이다. 천내리 강변의 남쪽에 용석(龍石)이, 북쪽에는 호석(虎石)이 있다. 용이 섬세하고 정교하다면, 호랑이는 민화에 등장하는 해학적인 모습 그대로다.

용석과 호석을 여기 세워둔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온 공민왕이 천하의 명당자리에 자신의 능묘위치를 정한 뒤 석물로 사용될 용호석을 세워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짜 그랬을까.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범부나 꿈꿀만한 부귀공명을 기원했다거나 왕후장상의 후손이 나올 명당을 찾았다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아무래도 훗날 조선 중기 이후의 음택 풍수의 이야기가 덧대져 만들어진 것이란 혐의가 짙다.


# 봄 풍경의 절정을 금강에서 보다.

금산 땅에서 볼 수 있는 봄 풍경의 절정은 금강 변에 있다. 봄의 강은 섬진강이라지만 그건 매화 피는 이른 봄 얘기고, 봄이 깊어지는 이즈음의 강은 단연 금강이다. 섬진강의 봄 풍경이 하동과 광양에 집중돼 있다면, 금강의 봄 풍경은 분산돼 있다. 금강의 물길은 굽이치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군데군데 몰래 부려놓고 간다. 그래서 금강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비밀스러운 곳이 적잖다.

금산 땅에도 봄날의 금강이 빚은 화려한 풍경이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금산 부리면 방우리의 ‘농원 마을’과 부리면 수통리의 ‘적벽강’ 사이 전인미답의 금강 구간이다. 이쪽의 금강 구간은 협곡이라 강변으로 접근할 수 없다. 농원마을과 적벽강은 지척에 있지만 물로 막혀 길이 없으니, 차로 산을 넘어 돌아 들어가야 한다. 두 곳 모두 충남 금산 땅인데, 육로를 따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려면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를 딛고 가야 한다. 강물로는 5분이면 닿는 거리를 이렇게 돌아가면 차로 50분이 걸린다.

방우리는 금강의 물길이 U자 형태로 급하게 휘어 흐르며 땅을 물방울 모양으로 만든 자리에 있다. 육지와 연결된 땅을 떠내면 그대로 섬이 될 듯하다. 본래 지명은 ‘방울’이었는데, 한자로 적으면서 ‘방우리’가 됐다. 방우리 마을은 큰 방우리와 작은 방우리 두 개다. 상류 쪽에 큰 방우리가 있고, 하류에 작은 방우리가 있다.

좁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당도하는 작은 방우리를 농원 마을이라 부르는 건 그곳에 1960년대 간척된 농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원은 6·25 전쟁 후 정착민과 피란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쇠망치와 정으로 바위산에 물길을 돌리는 250m의 바위굴을 뚫어 만들었다. 주민들이 피땀을 쏟아부으며 맨손으로 일군 농원 마을은 한편의 인간승리 드라마였다. 이런 이야기는 1963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금강하류로 이어지는 농원마을 길 끝에는 습지가 있다. 온통 초록으로 가득한 이국적인 공간이다. 여울을 이루는 강변에는 지난가을의 억새와 새로 돋은 버드나무의 신록이 그득하다. 그 사이로 물새들이 날아와서 앉았다가 갔다. 이토록 풍경이 화려한데도 농원 마을은 적막하다.

적벽강도 마찬가지다. 강변에 번듯한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고 인근 수통리 마을에 식당도 몇 곳 있으니, 구멍가게 하나 없는 농원 마을보다야 사정이 낫긴하지만, 봄날 적벽강에도 인적이 없다. 농원 마을에서, 또 적벽강에서 수채화 물감이 번진 듯한 강변길을 걷다가 떠오른 질문. “이렇게 아름다운 봄 풍경이 있는데 여길 놔두고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진짜 궁금해서 묻는 얘기다.


■ 여행정보

적벽강 가는 길 = 적벽강은 금산읍에서 37번 국도로 타고 부리면소재지까지 가서 601번 지방도로로 갈아탄 뒤 금강을 건너는 수통대교와 적벽대교를 건너가면 닿는다. 강에 막혀 길이 끝나는 적벽강 마을 수통리는 궁벽하지만 청정한 강변 마을이다. 수통리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적벽강 인근에서 식당 종가집(041-752-0229)을 운영하는 길선근(59) 씨는 “지금이야 차가 닿지만 과거에는 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고 했다. 적벽강의 물길을 건너는 적벽대교 곁의 준공비에 그 시절 얘기가 있다. 유실과 복구가 되풀이됐던 출렁다리 얘기가 자못 비장하다. 번듯한 시멘트 다리 적벽대교를 놓은 건 1988년 12월의 일이다.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감격했던지 ‘다리를 놓은 뜻’을 비석에 적어두고 ‘후세에 전하니 길이 빛내달라’는 당부까지 덧붙여 놓았다
 

 

부산갈맷길 2.3.4코스

 

부산 갈맷길 2코스의 일부 구간인 ‘이기대 해안 산책로’에서 오륙도 쪽을 바라본 모습. 오륙도 등대섬 앞으로 수직 절벽에 설치한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보인다. 스카이워크에 올라서면 유리로 마감한 바닥 아래로 넘실거리는 파도가 보여 아찔하다.


길을 두고 ‘그 도시의 얼굴이자, 거울’이라고 말할 때, 그 길은 ‘걷는 길’을 말합니다. 차들이 분주히 오가는 도로라면 어떤 도시든 비슷합니다. 차도는 늘 불친절하고 무뚝뚝하지요. 특히 부산이 그렇습니다. 복잡하게 차선이 얽힌 길과 ‘운전 좀 한다’는 자부심을 장착하고 거칠게 차를 모는 사람들, 부두를 드나드는 압도적인 크기의 트레일러 차량…. 여기까지만 보면 부산은 그야말로 억세고 소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걷는 길’ 위에서 본 부산은 다릅니다. 두 발로 걷노라면 작고 사소한 것들이 비로소 보이고, 그것들이 흘러온 시간이 보입니다. 길 위에서는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고, 차곡차곡 접힌 압축된 시간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길을 걷고 마음을 나눠보면 부산 사람들의 거칠고 빠른 사투리에서 말투뿐만 아니라 그 말이 품은 뜻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된답니다. 부산에 가서 딱 한 구간이라도 좋으니 도보코스 걷기를 권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부산에는 ‘갈맷길’이 있습니다. 짐작처럼 부산의 상징 ‘갈매기’에다 ‘길’이란 단어를 합성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검은빛이 돌 정도로 짙은 초록을 뜻하는 우리말 ‘갈매’에 길을 붙여 만든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갈맷길은 부산의 걷기 길을 통칭합니다. 9개 코스에 21개 구간으로 나뉘는, 총연장 278㎞에 달하는 긴 길입니다. 다 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길을 모두 다 걷는다면 91시간이 걸린다는군요.

부산의 걷는 길이라면 해안 길부터 떠올리겠지만, 갈맷길에 바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산을 넘기도 하고, 강변을 걷기도 하며, 마을과 저수지를 끼고 이어지기도 합니다. 도심을 걷는 구간도 꽤 있습니다. 길은 때로는 경관을, 때로는 자연을, 가끔은 역사와 고된 삶의 흔적을 따라갑니다.

그럼에도 부산에서는 바다입니다. 갈맷길 9개 코스 중에서 먼저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코스를 꺼내놓고 골랐습니다. 그리고 코스마다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구간만을 택했습니다. 효과적인 압축을 위해 구간을 좀 잘라내거나 이어 붙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산 갈맷길 바다구간을 대표할 만한 길 3개를 뽑아 걸었습니다. 그 길이 바로 갈맷길 2코스가 지나는 ‘동생말∼오륙도 유람선 선착장’ 구간과 갈맷길 3코스 인근의 ‘흰여울길’, 그리고 갈맷길 4코스에 속하는 암남공원∼송도해수욕장 구간입니다. 봄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한복판에 운동화 끈을 조이고 모두들 한번쯤 걸어보시길 권하는 길입니다.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까지 거친 갯바위 해안을 끼고 이어지는 송도해안 볼레길 구간. ‘부산 에어크루즈’란 이름으로 운행하고 있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 걷는 길이 꺼내놓은 경관… 이기대

부산에는 유독 지명에 ‘대(臺)’를 쓰는 곳이 많다. ‘대’를 만드는 건 ‘시야의 크기’다. 주변의 조망이 좋고 탁 트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의 지명에 ‘대’의 이름이 붙었다. 본디 ‘돈대 대(臺)’란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곳이라는 뜻이다.

‘대’는 주로 산에 많다. 북한산에 백운대와 만경대가 있고, 설악산에는 비선대가 있다. 속리산에는 문장대와 입석대가, 관악산에는 연주대가 있다. 내륙에서 산에다 대의 이름을 허락했다면, 해안가에서는 빼어난 바다 풍경에 ‘대’의 이름을 붙였다. 1740년에 지금으로 치자면 부산시장쯤 되는 동래부사가 지리책 ‘동래부지’를 썼다. 책에 ‘부산 8대(臺)’가 등장한다. 8대는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신선대, 의상대, 강선대, 경효대, 오륜대다.

이기대는 ‘대’의 이름을 얻었으되 이른바 8대 명승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때야 그랬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해운대 인근 마천루의 휘황함과 마주 설 수 있는 이기대야말로 부산의 새로운 명소다. 이런 풍경을 과거에도 갖고 있었다면 ‘부산 8대’ 안에 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리라. 이기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져 있었던 건 지난 1997년까지 해안경비 군부대에 의해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기대 경관의 빼어남은 해안 출입통제가 해제되면서 이기대 해안 벼랑을 끼고 부산의 도보여행 코스 ‘갈맷길’이 놓이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갈맷길이 해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매혹적인 경관을 찾아 꺼내놓은 셈이다.


# 부산 갈맷길 코스의 하이라이트

‘이기대(二妓臺)’란 이름은 부근에 두 명의 기생 무덤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함락한 왜군이 축하연을 열면서 기생을 동원했는데 두 명의 기생이 술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빠져 죽어 이기대 주변에 묻혔다는 얘기다.

부산 갈맷길 278㎞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가 이기대를 지나는 ‘갈맷길 2코스’다. 이 길은 해운대 달맞이공원에서 출발해서 이기대 해안을 지나 오륙도로 이어진다. 코스를 잘게 쪼개보자. 2코스는 해운대 달맞이공원에서 민락교까지의 전반부와 민락교에서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까지의 후반부 코스, 둘로 나뉜다. 두 코스 중에서 좀 더 인기 있는 곳이 후반부 코스다.

둘로 나눴어도 후반부 코스 거리는 자그마치 12.6㎞. 이 길만 걸어도 4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그중에서 다시 하이라이트 구간만 더 짧게 오려내 보자. 그렇게 잘라낸 코스가 용호부두 인근의 ‘동생말’에서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4.7㎞ 구간이다. 경관의 빼어남은 물론이고 대중교통 접근의 용이성까지 갖춘 이 구간은 갈맷길이 조성되기 이전에 조성된 길로, 따로 ‘이기대 해안 산책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느릿느릿 다 걷는 데 1시간 30분쯤. 풍경을 감상하며 자주 다리 쉼을 한다 해도 2시간이면 넉넉한 산책길이다.

이기대 해안 산책로는 길이 다채롭다. 해안의 갯바위를 밟고 지나가기도 하고, 기암의 해변에 세운 나무 덱을 따라가기도 한다. 짙은 초록의 숲에 들어설 때도 있고, 해안 벼랑을 끼고 새소리로 그득한 오솔길이 되기도 한다. 그 길 위에서 궁금했던 것이 ‘과연 어디가 이기대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기대는 사실 딱히 ‘여기’라고 특정해 말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이기대는 용호동 동쪽의 장자산(225m) 자락과 접한 바닷가의 바위 해안 전체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바위 해안의 길이가 2㎞ 남짓이니 이 구간 전부가 이기대인 셈이다.


# 오륙도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철골조 보행교 ‘구름 산책로’. 일제강점기 송도해수욕장의 명물이었던 출렁다리를 현대적으로 복원한 시설이다.
이기대 해안 산책로에서 가장 압도적인 경관이 길 끝에 있다. 산책로의 종점인 오륙도야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 중의 명소. 산책로를 걸으면 시선의 위치에 따라 그 오륙도를 마치 수반 위에 올린 수석처럼 돌려가며 감상할 수 있다.

수선화가 만발한 오륙도 해맞이공원의 전망대에서는 오륙도가 두 개의 섬으로 겹쳐진다. 방패섬과 솔섬이 하나의 섬으로, 그리고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이 다른 하나의 섬이 된다. 여기서 보는 오륙도와 일대 바다의 경관은 가히 비경이라 할 만하다. 경관만을 놓고 겨룬다면 이 모습을 이길 수 있는 곳이 부산에서 몇 곳이나 될까.

등대섬을 마주 보는 이기대 해안 산책로 종점의 벼랑에는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있다. 오륙도가 마주 보이는 35m 높이 땅끝의 아찔한 벼랑에 철골로 U자 형태의 구조물을 바다 쪽으로 9m쯤 내밀도록 만들어놓은 곳이다. 한쪽 끝을 띄워놓은 다리와도 같은 모습인데, 바닥을 24장의 투명한 강화유리로 마감했다. 스카이워크에 올라서 유리 바닥 저 아래로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 허공을 걷는 듯 오금이 저린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에서 눈길을 붙잡는 곳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산책로 중간쯤에 일제강점기에 구리를 캤다는 광산의 흔적이 있다. 광산에서는 순도 99.9%의 질 좋은 황동이 나왔다는데, 이렇게 캐낸 황동은 모두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광산에 여러 개 있었던 갱도 중에서 해안에 남아 있는 것은 수직 380m, 수평 550m까지 파내려 간 2호 갱도 자리다.

이기대 해안가에는 너른 치마를 펼친 듯한 치마바위며, 다른 바위 위에 위태롭게 올라앉은 농바위 등이 독특한 경관을 빚어낸다. 걷는 내내 발밑에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며, 새소리로 가득한 동백 숲길의 정취 역시 빼놓을 수 없다.


# 오랜 시간이 겹쳐진 송도해안 볼레길

갈맷길 4코스는 남항대교에서 시작해 송도해수욕장, 감천항, 몰운대를 지나 낙동강 하구둑까지 자그마치 36.3㎞에 이른다. 다 걷는 데 13시간이 걸리는 긴 코스다. 여기도 하이라이트 구간만 잘라내서 걸어보자. 갈맷길 4코스 가운데 송도해수욕장에서 암남공원까지 이어지는 짧은 구간에는 ‘송도해안 볼레길’이라는 길 이름이 따로 붙어 있다. 갈맷길을 조성하기 한참 전인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공공근로 사업으로 조성한 길이라 이름이 따로 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 길은 송도가 품은 시간의 감회만으로도 따로 이름을 적어 대접할 만하다.

송도해안 볼레길 한쪽 끝은 암남공원이고, 다른 한쪽 끝은 송도해수욕장이다. 길에는 방향이 없으니 이쪽에서 출발해도, 저쪽에도 출발해도 상관없지만 암남공원에서 출발해서 송도해수욕장을 향해 걷는 게 주차도 편리하고 걷기에도 좋다. 두 길 사이에 해상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으나 케이블카로 암남공원까지 간 뒤 걸어서 출발지점인 송도해수욕장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돌아오자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송도해안 볼레길에서의 경관은 이렇다 할 게 없다. 좀 야박하게 말한다면 부산의 다른 해안 길의 평균 수준 아래다. 그럼에도 이곳을 갈맷길 코스의 하이라이트로 꼽는 건 송도해변이 품은 시간 때문이다. 송도해수욕장은 일제강점기 개장해 1960년대까지 부산에서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꼽혔던 곳이었다. 압도적인 명성을 누리던 송도해수욕장에는 다이빙대도, 케이블카도, 출렁다리도 있었다. 30여 년 전쯤 부산 앞바다의 오염으로 쇠락해 폐장하면서 이름이 잊혔지만 이제 추억을 자산으로 삼아 과거의 명물을 하나씩 복원해가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사라진 출렁다리 대신 거북섬으로 이어지는 철골조 보행교 ‘구름 산책로’가 들어섰고, 거북의 모습을 형상화한 다이빙대가 세워졌으며, 과거의 것보다 운행 거리가 4배나 긴 ‘부산 에어크루즈’라는 이름의 세련된 케이블카가 등장했다. 송도의 시작과 번성, 그리고 쇠락과 재기가 길 위의 풍경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부산 영도의 ‘흰여울 마을’.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골목길에 흰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빚어낸다.


# 누추한 골목을 서정의 색으로 칠하다

송도에서 남항대교를 건너 영도 땅으로 들어서면 해안을 끼고 있는 축대 위에 누추한 마을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에 집을 지어 이룬 ‘흰여울 마을’이다. ‘흰 여울’이란 서정적인 마을 이름은, 벽화 골목의 담과 벽을 흰색으로 덧칠하면서 근래 붙은 이름이다. 산에서 해안 벼랑을 따라 물이 여울을 이루며 쏟아진대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흰여울 마을의 본래 이름은 ‘이송도 마을’이었다. 이송도란 ‘2 송도’, 그러니까 ‘두 번째 송도’란 뜻이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으로 이름난 송도와 입지나 경관이 비슷하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를테면 ‘제2의 명동’ ‘제2의 여의도’ 같은 식의 작명이다. 그런데 보통 ‘2’라는 숫자가 붙으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진짜 ‘1’에 버금갈 만한 ‘2’가 있는가 하면 ‘1’의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을 풍자하듯 이르는 ‘2’가 있다. 누추했던 흰여울 마을을, 일제강점기에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이 들어섰고,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들이 모여들었던 유원지 송도와 견줄 수 있었을까.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높은 축대의 가난한 달동네 마을이었던 흰여울 마을 입장에서는 어림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송도’는 비하까지는 아니었어도 풍자의 의미가 새겨진 이름이었으리라.

흰여울 마을과 송도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다른 모습이다. 두 곳 모두 ‘도시재생’의 화두를 꺼내 들고 과거를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이 정반대다. 송도가 과거에 사라져버린 풍경을 현대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흰여울 마을은 외형을 그대로 둔 채 희고 푸른 색감만으로 풍경을 다룬다. 실감 나는 달동네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판타지의 공간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 탓일까. 흰여울 마을에서는 영화 ‘변호인’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촬영됐다.

흰여울 마을 백미는 담장 너머로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골목길인 ‘흰여울길’이다. 갈맷길 3코스가 마을의 마흔 계단 아래쯤에 있는 해안선을 따라간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에 붙여진 이름이 ‘절영해안 산책로’다. 마을을 걷는 흰여울길과 해안을 걷는 절영해안산책로. 두 길은 높이만 다를 뿐 위치와 방향이 거의 같다. 두 길은 서로 모자란 부분을 훌륭하게 채운다. 어디 이 길뿐일까. 부산 갈맷길은 과거와 현재, 서정과 서사, 인문과 풍경 사이를 오가며 이어진다. 이건 단순히 길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내력에 대한, 그리고 길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 여행정보

갈맷길 걷는 법=미리 갈맷길의 특정 구간을 겨누고 찾아가도 좋지만, 부산의 명소를 여행하다가 인근의 갈맷길을 찾아 잠깐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부산의 이름난 관광지라면 대부분 갈맷길이 가까이 지나간다. 기차역이나 관광지 등의 관광안내소에서 갈맷길 걷기를 자세히 안내하는 지도와 소책자를 얻을 수 있다. 코스마다 친절하게 설치해놓은 이정표와 매달아 놓은 안내 리본, 방향 안내 사인 등이 걷기를 돕는다.


벚꽃으로 이름난 황령산, 광복동 야시장, 감천문화마을, 송도해수욕장 등 부산 명소를 둘러보는 자체 투어 프로그램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전남 장성의 백양사 우화루 처마 아래에는 고불매(古佛梅) 가 있습니다。 품격으로 겨루면 호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늙은 매화나무입니다。 그 나무 여윈 가지 끝에 분홍빛 매화 꽃망울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편백 숲이 온통 수직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축령산 숲에도 한결 짙어진 편백나무 향기가 봄의 당도를 알렸습니다。 고흐의 그림이 벽화로 단장된 북이면의 담장과 골목에도、 황룡강을 굽어보는 정자 요월정 뒤편의 솔숲에도 봄의 기운은 가득했습니다。 지금 남도 땅에는 봄 아닌 게 없습니다。 장성은 옐로 시티 를 표방합니다。 노란색이라면 봄입니다。 촉촉한 봄비 속에서 장성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줄곧 연상했던 건 뽀송뽀송한 솜털의 병아리 한 마리、 그리고 가볍게 쥔 손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맥박이었습니다。


# 매화나무 한 그루…절집이 그윽해지다

백양사에는 고불매(古佛梅)가 있다. 백양사 절집 처마 아래서 봄이면 연분홍 꽃을 피우는 360세 먹은 홍매화 나무다. ‘고불(古佛)’의 뜻은 여럿이다. 오래된 부처를 뜻하기도 하고, 노스님을 일컫기도 한다. 나이가 많고 덕망 높은 늙은이란 뜻도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성자(聖者)를 뜻하기도 하고,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면목, 그 자리란 뜻으로 해독하기도 한다. 어떤 뜻으로 해석하든지 고불이란 그 이름이 붙은 것들을 치켜세우는 말임에 틀림없다.

고불매는 이런 이름에 값한다. 우선 꽃 색이 곱다. 늙고 거친 가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고목의 품격을 드러내는 수형도 훌륭하고, 꽃가지를 슬쩍 담장 너머로 넘긴 채 꽃을 피우는 풍류도 그만이다. 여기다가 매화 향기도 짙다. 향기의 농도는 옅은데 희한하게도 한 그루 매화 가지에 핀 꽃의 향기가 절집을 가득 메운다. 이런 연유로 백양사의 고불매는 ‘호남 5매(五梅)’ 중 하나로 꼽힌다. 고불매 외에 선암사의 무우전매, 전남대의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 소록도의 수양매를 든다.

고불매는 대웅보전으로 드는 우화루(雨花樓) 곁의 담장 아래 서 있다. 우화루의 우화는 ‘비 우(雨)’ 자에 ‘꽃 화(花)’ 자다. 꽃잎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뜻의 현판을 내건 처마 아래 고불매가 가지를 뒤틀고 서 있다. 고불매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한껏 꽃망울이 부풀었다. 개화 시기는 아마도 오는 주말쯤. 그리고 며칠이면 만개의 시간을 맞게 되리라. 사실 고불매의 본래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본래 백양사는 지금의 자리 북쪽에 있었는데, 1836년에 고쳐 지으면서 그때 절집 앞뜰에 심어두었던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 중 홍매 한 그루와 백매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옮겨 심은 백매는 그만 죽어버렸고 홍매만 여태 살아남았는데 살아남은 홍매에다 1947년 백양사에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붙여준 이름이 바로 고불매다.


내장산국립공원의 백암산 백학봉 중턱에 들어선 암자 약사암에 올라서서 내려다본 백양사의 전경. 봄이 더 깊어지면 백양사는 숲의 연두색 신록으로 포위된다.




# ‘봄 백양사’ 눈부신 신록을 기다리다

장성의 백양사는 백암산을 병풍처럼 뒤로 두르고 있는 절집이다.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했다. 내장산국립공원이라면 국립공원의 이름으로 삼은 내장산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국립공원 구역 안에는 장성의 백암산도 들어 있다.

백암산은 내장산에 손색없을 정도로 가을 단풍도 빼어나지만, 내장산이 못 가진 그윽한 봄 풍경을 가지고 있다. ‘봄 백양, 가을 내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산은 내장산, 절은 백양사.’ 가을 내장산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얘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백양사가 내장산 버금가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리라. 내장산과 백양사를 병렬로 서술하고 있지만, 내장산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백양사를 얘기하는 문장이라는 얘기다. 백양사의 봄을 장식하는 건 연두색 신록이다. 절집으로 드는 들머리 숲길에는 아기단풍나무와 갈참나무, 느릅나무 고목이 늘어서 있는데 나뭇가지마다 매달리는 여린 신록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백양사의 가장 아름다운 신록은 백암산 백학봉 중턱의 암자 약사암에서 만날 수 있다.

백양사에서 산중으로 들어 숲길을 따라 1㎞ 남짓, 순한 흙길을 600m쯤 가서 가파른 경사 400m를 더 가면 약사암에 닿는다. 급경사라 ‘갈 지(之)’ 자로 길을 뉘었어도 약사암으로 이르는 길의 경사 구간은 숨이 턱에 찬다. 경사 구간의 초입에 암자의 스님이 글 한 줄을 걸어놓았다.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잠깐 숫자가 뒤바뀐 게 아닌가 했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 가파른 길을 근육이 아니라, 생각으로 걸으라는 이야기이리라. 속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암자까지 걷기로 하자 숨과 몸이 금세 편해졌다.

약사암 마당 끝 장독대 앞에 서면 저 아래로 백양사가 내려다보인다. 숲의 바다 한가운데 절집이 들어선 형국이다. 단정한 절집의 처마선이 숲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봄기운이 완연하지만, 아직 신록이 이르니 마음속으로 연둣빛을 그려볼밖에…. 신록이 없어도 이럴진대, 만춘의 봄날에 여기서 온통 연두색으로 포위된 백양사를 내려다본다면 누군들 ‘봄 백양사’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 내리는 백양사 숲에서 만난 봄꽃들. 사진 왼쪽부터 생강나무꽃, 갈퀴덩굴, 둥근털제비꽃, 별꽃.


# 나무를 심어 기른 이가 ‘선생’인 까닭

장성에는 내장산국립공원 못지않은 숲이 또 있다. 축령산 자락에서 하늘을 찌를 듯 자라는 편백나무 숲이다. 편백 숲이라고 하지만, 사실 편백과 삼나무가 어울려 자라는 숲이다. 축령산 편백 숲은, 믿어지지 않지만 ‘한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진 숲이다.

이 숲을 만들어낸 이는 40년 전 일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임종국이다. 전북 순창 출신인 그는 스물다섯 살 때 장성으로 이주해온 뒤, 누에를 기르고 특용작물을 재배하다 1956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헐벗은 축령산을 사들여 대단위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빈 산에다 끝도 없이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다. 이렇게 1976년까지 596만㎡(181만5000평)의 땅에 나무를 심었다.

임종국의 이름 뒤에는 ‘선생’이란 호칭이 따라붙는다.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예우와 존경의 호칭이 붙여진다. 나무를 심어 기르는 것도 따지고 보자면 농사의 일종일진대, 다른 농사일에 존경의 호칭이 따라붙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무를 심어 기른다는 것이 다른 농사와 왜 다를까.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걸었기 때문일까. 먼 미래를 보고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나무를 심어 기른 것에 높은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황폐한 산에다 나무를 심어 기른 이들은 십중팔구 빈손이 됐다.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심고 가꾼 나무와 땅을 빚에 몰려 헐값에 팔아넘겨야 했다. 나무를 돈으로 바꿔서 큰돈을 만졌다면 혜안이 있는 성공한 사업가였겠지만, 역설적으로 처참한 실패와 쓸쓸한 노후가 그들을 ‘선생’이 되도록 했다. 그의 실패로 말미암아 나무는 몇 푼 돈과 바꾸기 위한 재화가 아니라, 그 나무를 심어 기른 이의 고단하되 순수한 노동, 혹은 뜨거운 열정이 됐다는 것이다. 사업은 실패했으되 나무는 남아 아름드리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축령산의 편백과 삼나무로 가득한 수직의 숲속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이 숲에 바친 고단한 노동, 그리고 처참한 실패 때문이다.


# 의적 홍길동과 청백리 박수량

▲ 호남의 명매(名梅)로 꼽히는 백양사의 고불매. 360년 된 기품 넘치는 매화나무다. 나무는 늙었지만 해마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곱고 여린 꽃을 내어놓는다.
장성 출신의 인물 중 가장 이름난 이가 누구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홍길동이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그 홍길동 말이다. 허구의 소설 속 인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홍길동은 실존인물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행적과 딱 맞아떨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홍길동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 100번이 넘게 등장한다. 간추리자면 홍길동은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에서 서자로 태어난 도적이다. 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은 활빈당을 이끌고 율도국으로 갔지만, 탐관오리의 재물을 털어 농민들에게 나눠주던 조선왕조실록의 홍길동은 1500년 의금부에 의해 체포됐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장성군은 ‘홍길동과의 연고’를 주장하며 강릉시가 소유한 11개 홍길동 관련 상표등록 취소심판 소송에서 승소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고향이란 인연을 앞세워 강릉시가 등록해 둔 홍길동의 상표권을 하루아침에 장성군이 빼앗아온 것이었다. 장성은 이렇게 홍길동을 가져다가 73종의 캐릭터를 개발해 상표등록을 마쳤고 해외 국제 특허도 출원했다.

이 과정에서 장성에 만들어진 것이 홍길동 테마파크다. 테마파크라지만 탈것이나 놀이시설이 있는 건 아니고 한옥 숙소와 너른 초지, 분수, 영상관, 기념관 등을 갖춘 공원이다. 흥미로울 건 없지만 한옥 툇마루에서 봄볕을 즐기며 여유 있게 쉬어가는 곳으로는 훌륭하다. 입장료도 주차료도 없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역할을 부여하지 못한 캐릭터의 한계다.

홍길동 대신 근래 장성이 ‘밀고 있는’ 인물은 조선 중기의 청백리 박수량이다. 박수량은 한성판윤부터 형조, 예조, 공조, 호조판서까지 두루 벼슬을 역임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 법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지낸 셈인데, 39년간 공직생활을 했음에도 어찌나 청빈했던지 죽은 뒤 상여 멜 돈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박수량이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명종 임금은 서해에서 캔 돌을 비석으로 내려보내며 ‘생전의 청빈함이 욕되지 않도록 비문을 새기지 말고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박수량의 묘 앞에 아무런 글씨를 새기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가 서 있는 내력이다. 백비가 공직자 청렴의 상징이 되면서, 박수량 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의 교육이나 연수프로그램의 단골 목적지가 됐다. 청렴함을 보고 배우겠다는 걸 나무랄 일은 없지만 그저 조용하게 묘를 둘러보고 마음에 새기면 될 일인데,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시멘트 벽에다 다녀간 기관과 단체의 현판을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음에도 글자 한 자 남기지 않은 선비의 비석을 보면서도 그리하고 싶었을까.


#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초록색

장성은 ‘옐로 시티’를 표방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 ‘옐로 시티 장성’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노랑이란 상징색을 통해 일관성 있는 관광자원화 작업과 관광마케팅을 진행하기 위한 지자체의 신선한 전략이다. 왜 하필 노란색일까. 스토리텔링을 곁들인 장성군의 설명이 이렇다. 장성의 젖줄인 황룡강 깊은 물에 황룡이 살았는데 부족 마을로 내려가 지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됐고, 이로써 장성은 노란색으로 시작된 도시가 됐다는 얘기다. 장성군은 노란색에서 연상하는 꿈과 희망, 아늑함, 따스함 따위를 지향하는 가치로 삼았다.

옐로 시티 장성에서 가장 강렬한 노란색은 백양사역이 있는 장성군 북이면에 있다. 북이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주변의 담장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다. 노란색의 상징 화가 반 고흐의 그림들이다. 면사무소 벽면에는 ‘오베르의 평원’이 있고 긴 담장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가 그려져 있으며 낮은 담장 아래는 고흐의 자화상이 있다. 몽마르트르의 거리 풍경, 해 질 녘의 밀밭, 씨 뿌리는 사람, 아를의 밤의 카페, 집배원 조제프 룰랭,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그의 해바라기 그림은 아예 액자를 빠져나와 담장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다. 벽화로 그려낸 정교한 모사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듯하다. 명작의 모사는 자칫 촌스럽게 느껴지는데, 담장의 벽화는 따스하고 흐뭇한 쪽에 더 가깝다.

전국 곳곳에 비슷비슷한 벽화 마을이 워낙 많아서 ‘벽화공해’라는 말까지 생겨났지만, 이곳 북이면의 벽화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북이면의 사거리 오일장이 서는 1일과 6일에 맞춰 찾아간다면 장 구경과 마을 벽화 구경을 다 할 수 있다. 사거리 오일장에는 장날에만 손님을 받는 장성식당이 있는데, 밥과 스무 가지에 가까운 맛깔나는 반찬을 차려내고 4000원을 받는다. 장날 좌판을 편 상인들 거의 전부가 여기서 밥을 대다 먹어 흡사 ‘오일장 구내식당’ 같은 분위기다. 술손님에게는 반찬을 상에 가득 차려 놓고는, 술값만 받는 식으로 영업한다.

장성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또 있다면 황룡면의 요월정 원림이다. 조선 명종 때 공조 좌랑을 지낸 김경우가 500여 년 전 산수와 벗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짓고 조성한 정자와 원림이다. 황룡강 변에 들어선 정자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찾아와 노닐며 시를 읊었다. 원림에서 눈이 가는 건 배롱나무다. 초록빛이 짙어가는 언덕에 들어선 정자 주위를 제법 굵은 배롱나무들이 호위하고 있다. 정자 뒤에도 배롱나무 군락이 있어 붉은 꽃이 선홍색으로 피어나는 여름날이면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 배롱나무는 지금 빈 가지뿐이지만 정자 뒤편 언덕 위의 청량한 진초록 솔숲이 아쉬움을 덜어준다. 장성에는 고흐의 노란색도, 배롱나무의 붉은색도, 솔숲의 초록색도 있다.


■ 여행정보

백양사·축령산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IC나 백양사 IC로 나와서 1번 국도를 탄 뒤 북하면 약수교차로에서 좌회전, 중평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면 백양사에 닿는다. 축령산 편백 군락지에는 국립장성숲체원이 있고, 숲체원이 조성한 ‘치유의 숲’이 있다. 군락지는 숲과 이어진 길이 여럿이라 지도를 놓고 보면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헷갈린다. 세 곳의 들머리에 각각 주차장이 마련돼 있는데 거기를 목적지로 찾아가는 게 요령이다.

하나는 금곡 영화마을 쪽 들머리.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500번지를 입력하면 된다. 두 번째는 모암리 입구다. 주소는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682번지. 나머지 하나가 축령산 안내센터와 가까운 장성군 서삼면 추암리 699번지다.

숲체원 직원은 “특별히 다른 목적이 없다면 축령산 정상이나 산림치유 안내센터가 가장 가까운 추암리 699번지로 찾아올 것”을 추천했다. 차량 내비게이터에 이 주소를 입력하고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뒤에 차를 대놓고 걸어가면 된다. 오르막 시멘트 임도를 20∼30분쯤 걸으면 산림치유 안내센터에 닿는다.

 

 

지금 월출산 아래 백운동 정원은 동백꽃이 낭자하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 올랐다가 하룻밤 묵어간 백운동 정원의 경관에 매료돼 서화첩을 만들어놓고 꺼내보며 늘 그리워했다. 그러나 다산도 백운동에서 선혈처럼 붉은 동백의 낙화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산이 백운동에 들른 건 1812년 9월의 일이었다.



전남 강진에 간다면 다산 정약용을 비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18년의 유배 기간에 그가 강진 땅에 드리운 그늘이 넓고도 깊은 까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진에 꼭 다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다산의 그늘에 강진의 더 많은 것이 가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딸려 올라왔으니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강진 땅으로 갑니다. 다산의 발자취를 좇아 정원을 거닐고, 동백꽃 낭자한 숲에 들었으며, 오랜 공력으로 쌓은 돌탑 앞에 섰고, 늙은 나무한 그루를 만나러 시골 마을의 골목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 백운동 정원, 그 비밀의 공간

강진을 여행하다 보면 도처에서 다산 정약용을 만난다. 다산이야말로 강진 땅에다 숨을 불어넣고 스토리를 부여하는 압도적인 인물이다. 그의 자취가 새겨진 곳은 어김없이 관광 명소가 된다. 18년의 유배 중 10년을 보낸 다산초당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혜장 선사와의 만남의 자취가 새겨진 백련사도 마찬가지다. 유배 직후 첫 번째 처소였던 주막집의 한 칸 방에 현판을 내걸었던 사의재 역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명소가 되니,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를 앞세운 스타 마케팅과 그리 다를 게 없다.

강진에서는 도리 없이 ‘다산’이지만 여기서는 다산초당처럼 일러주지 않아도 다 아는 명소는 건너뛰기로 한다. 한 해 중 지금이 절정인 백련사의 동백숲만큼은 아무래도 아쉬우니 따로 뒤에서 얘기하기로 하자.

다산의 발길이 닿은 곳 중에서 백련사에 앞서 그 빼어남을 이야기할 곳이 있으니 바로 ‘백운동 정원’이다. 백운동 정원은 월출산의 기묘한 암봉을 병풍처럼 두른 기가 막힌 자리에 있다. 정원 주위는 붉은 꽃을 떨구고 있는 아름드리 동백숲으로 어둑하고, 담 밖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계곡이 흘러내린다.

백운동 정원의 주인은 조선 중기의 처사 이담로. 그가 정원을 만든 지 100년쯤 지난 뒤에 유배 중이던 다산이 찾아들었다. 때는 1812년 가을.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백운동 정원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산의 막내 제자가 정원의 주인 이담로의 6대손이란 인연 덕이었다.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아름다움에 적잖이 감동했던 모양이었다. 다산을 단번에 매료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딱 하룻밤 묵어갔으면서도 정원 주변의 빼어난 풍경 12곳을 정해 ‘백운동 12경(景)’을 정하고 초의선사에게는 백운동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한데 묶어 ‘백운첩’으로 남겼다. 다녀간 뒤에도 자주 이곳을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꺼내 봤을 만큼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경관을 잊지 못했다.


주작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룡산과 주작산의 능선과 봄기운이 완연한 강진의 들판. 길게 이어진 덕룡·주작의 능선은 기기묘묘한 암릉으로 이어져 있어 설악산 공룡능선에 빗대 ‘작은 공룡능선’이라고도 불린다. 덕룡산과 주작산은 암릉 사이에 진달래가 필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오는 주말쯤 진달래가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 풍류의 정원, 시와 그림으로 지켜지다

백운동 정원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방치되다시피 했다. 허물어진 담과 쓰러져가는 농가는 그곳이 정원이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러던 것이 정원 발굴과 복원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다산이 남기고 간 백운첩이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이 백운동의 아름다움을 그림과 시로 남기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과연 여기에 이렇게 빼어난 정원이 있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백운동 정원 주변은 지금 온통 동백꽃으로 가득하다. 지난겨울의 혹한에 꽃을 피우지 못한 동백들이 한꺼번에 피기 시작했다. 절정의 순간에 툭 떨어진 동백꽃의 핏빛이 정원으로 들어서는 계곡에 낭자하다. 여기 백운동 정원의 동백은 다른 곳의 동백과는 좀 다르다. 꽃잎이 두껍고, 꽃이 크다. 색감도 훨씬 짙다.

감히 말하건대 다산은 백운동 정원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백운동에 매료되기에는 가을날 하룻밤은 너무 짧다. 결정적으로 다산은 봄날의 정원에서 선혈처럼 붉은 동백의 낙화를 보지 못했다. 딱 이맘때 백운동 정원을 가보면 이 말에 수긍하게 되리라.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물가에 후드득 떨어진 동백꽃을 마주하게 된다면 말이다.

동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금 강진 백련사 동백숲의 동백도 절정이다. 딱 이맘때쯤 강진을 통틀어 첫손에 꼽히는 명소가 백련사다. ‘동백꽃’ 때문이다. 백련사 동백숲에서는 지금 동백의 낙화가 한창이다. 화려하게 꽃 지는 풍경이 예년보다는 좀 못한 듯해 아쉽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비장하면서도 처연한 낙화의 풍경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 아무것도 없어 더 매력적인 곳

▲ 경내에 20여 년에 걸쳐 쌓은 돌탑 3000여 개가 있는 강진의 옴천사.
강진의 옴천면은 ‘면(面)’이라는 행정단위가 부끄러울 정도로 작다. 면 전체 인구를 다 해봐야 800여 명이다. 초등학교 하나에 식당 하나, 그 흔한 다방도 없다. 가장 높은 건물이 2층짜리 면사무소다. 그나마 면에 딱 하나 있는 식당도 문을 닫을 뻔했다가 마을 노인회와 청년회가 나서서 주인을 설득하고 군청의 지원을 이끌어내 겨우 살렸다.

번잡스러운 건 하나도 없이 그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옴천이 가진 풍경의 전부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길러낸 민물새우로 담그는 토하젓 말고는 변변한 산물도 없다.

농담을 좀 섞자면 옴천에서 가장 유명한 건 ‘옴천면장’이다. 전라도에는 속담처럼 쓰는 ‘옴천면장 맥주 따르듯이…’란 말이 있다. 누가 맥주잔에 거품만 따를 때 하는 얘기다. 혐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면장이 맥주 따르는 방법도 모를 정도로 촌 동네라는 것. 다른 하나는 면장이 맥주한 병으로 여덟 잔을 따라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 누군가는 ‘옴천면장 맥주’ 브랜드로 맥주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누구는 맥주 한 병으로 몇 잔을 따르는지 대회를 열어 기네스북에 등재하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옴천 주민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들을 비하하는 듯해 불편하다.

옴천이란 지명은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옴’이란 글자를 지명으로 쓰는 곳은 전국에서 여기밖에 없다. ‘옴’은 여러 종교의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음절이다. 힌두교도들은 기도나 명상을 할 때 이 음절을 외고, 불교도 의례에서도 자주 사용한다. 반야심경도 첫 글자가 옴으로 시작한다. 한자로는 ‘머금을 암(唵)’ 자를 차용해 쓴다.

그렇다면 이곳에 왜 옴천이란 지명이 붙었을까. 그 이유인즉 이렇다. 옴천면을 끼고 흘러내리는 물길인 옴천천의 본래 이름이 연천(燕川)이었는데, 주민들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불경에 나오는 옴(唵) 자를 써서 옴천천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옴천이란 지명이 기원과 의탁의 이름이라면, 그곳에 절 하나 들어서는 것도 썩 잘 어울리는 일이겠다.


#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절집 두 군데

▲ 강진 만덕산의 절집 백련사 누각 안에 걸어놓은 오색의 물고기 등(燈).
전남 강진에는 독특한 절집 두 곳이 있다. 서로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도 같은 절집이다. 그중 하나가 강진 옴천면의 절집 옴천사다. 옴천사는 경내에 자그마치 3000개가 넘는 돌탑이 있다. 돌탑은 절집의 주지 정암 스님이 6·25 전쟁통에 죽은 이들의 영령을 달래기 위해 20년에 걸쳐 쌓았고, 또 쌓고 있는 것이란다.

옴천사 일주문에서부터 돌탑이 도열해 있다. 기중기가 아니면 쌓기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것부터 무릎 높이를 겨우 넘는 작은 것까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돌탑이 경내 곳곳에 불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손수 쌓은 돌탑이나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다. 아무렇게나 쌓으면 돌탑은 몇 층 올리지 못하고 무너져버린다. 돌탑을 높이 쌓는 데는 여간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절집이 속한 ‘선각종’이란 종파는 낯설지만, 다 제쳐놓고 탑을 쌓은 이가 바친 노고 앞에서 탄성을 거둘 수 없다.

군동면 풍동마을의 남미륵사는 아예 시골 마을 전체를 사찰로 삼다시피 한 절집이다. 절집의 경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과 탑들로 가득해 독특한 느낌을 준다. 마치 무협지의 판타지 공간을 재현한 것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사찰 입구에는 거대한 코끼리 상을 놓아 두었고,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길의 철쭉나무 사이사이에 나한상 500개를 배치해 놓았다. 만불전에 모신 불상의 수가 자그마치 2만3000개다. 경내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건축물과 거대한 불상, 비석 등이 온통 뒤섞여 있다.

36m 높이의 청동 아미타불 좌상과 용을 딛고 선 석조 관음보살상, 관음전 등은 그 크기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진다. 이 엄청난 불사를 단 한 명의 스님이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가사의하다. 종교적인 시선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관광 사찰’임을 자임하고 있는 만큼 가볍게 볼거리로 들러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남미륵사 경내에는 1000만 그루가 넘는 철쭉이 심겨 있어, 꽃이 필 때면 사찰 전체가 붉은 철쭉으로 뒤덮인다.


# 범상찮은 기운의 향나무 한 그루

▲ 강진 성전면 송학리의 수령 700년이 넘는 향나무, 한눈에도 귀기(鬼氣)가 넘친다.
나이 많은 나무에서는 귀기가 느껴진다. 시간이 가지를 뒤틀고 상처가 옹이로 박힌 나무라면 더 그렇다. 그런 나무가 성전면 송학마을에 있다. 마을 앞 들판의 소나무에 학이 날아들어 ‘청송백학(靑松白鶴)’을 이룬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송학(松鶴)이다. 그 이름처럼 마을 앞 논둑에 백학을 불러모았다는 수령 500년을 넘긴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나무가 아니다.

마을이 자랑해 마지않는 귀기 넘치는 나무는 마을 안쪽의 민가 마당에 있는 700여 년이 넘는 수령의 향나무다. 이름하여 ‘양반 향나무’다. 조선 영조 때 왕명을 받아 마을에 당도한 벼슬아치들이 말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향나무 가지에 갓이 걸리자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고 해서 이후부터 ‘양반’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높이는 5m에 직경은 1.5m 정도. 크기로만 겨룬다면 압도적인 거목이라 할 수 없지만, 죽은 고목을 감고 뒤틀며 자란 모습에서는 범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깟 나무 한 그루가 뭐 볼 게 있겠냐 싶지만, 막상 가보면 나무가 뿜어내는 느낌이 강렬하다.

16년 전쯤 한 조경업자가 나무 값으로 2억3000만 원을 불렀다고 했다. 오래된 향나무가 비싸다지만, 그 정도 가격이면 횡재나 다름없었다. 나무 주인은 처음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랬다가 하루 자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 돈 없어도 살지만, 나무 뽑힌 자리를 보면서는 못 살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김홍순 씨는 그렇게 향나무와 함께 살다가 일흔여덟의 나이로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아들 김명식 씨가 향나무를 돌보고 있다. 철제 울타리 안에서 귀하게 자라는 앞마당의 향나무 말고 뒷마당에도 제법 굵은 향나무들이 어둑한 그늘을 드리웠다. 마당 장독대의 화단에는 분재가 가득하다. 마을을 둘러보니 이 집뿐만 아니다. 집집이 마당 한쪽을 우거진 숲으로 가꿨으니 시골 골목을 걸으면서 나무를 구경하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 봉황과 용이 함께 깃들인 산

나무 얘기로 이야기를 이어보자. 강진 병영면의 성동리에는 송학리 향나무보다 백 살쯤 더 먹은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32m에다 둘레 7.2m의 거목이다. 은행나무는 하멜표류기에 등장한다.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 태풍으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그는 350여 년 전 강진 병영에서 7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병영성 인근에서 큰 은행나무를 봤다고 썼는데, 그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은행나무는 그때도 450세쯤 되는 거목이었다. 병영성에서 고된 노역에 동원됐던 하멜은 함께 억류됐던 32명의 일행과 함께 이 은행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을 그리워했다. 은행나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인들의 한숨, 그리고 그들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봤을 것이다.

성동리 은행나무 인근에는 하멜 기념관이 있다. 하멜이 표류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전시해놓았다. 병영성으로 내려온 하멜 일행의 표류부터 여수를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하멜이 노역을 했던 병영성도 빼놓을 수 없다. 병영성은 지금으로 치면 조선의 육군 총사령부 격이다. 성곽만 복원됐을 뿐 성안은 빈터로 남아 있지만, 성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거목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강진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곳에 대한 얘기다. 덕룡산과 주작산. 능선이 맞붙은 두 개의 산은 거친 기암괴석과 암봉이 절경을 이룬다. 특히 암봉 사이로 진달래가 피는 이즈음이 덕룡산과 주작산이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때다. 두 산을 이어 종주하려면 7시간이 넘는 노고를 바쳐야 한다. 잠깐 맛만 보겠다면 차로 주작산 전망대에 오르면 된다. 전망대는 주작산 자연휴양림의 임도 끝에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주작·덕룡산의 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의 일출이 이름났다지만, 저물 무렵의 풍경도 못지않다. 다산초당이 깃들어 있는 만덕산과 봄빛이 완연한 들녘 그리고 푸른 강진만을 내려다보면서 여행을 마무리하기 딱 좋은 곳이다. 저물어가는 강진 땅을 오래 굽어봤다. 강진은 다산이 있어서 좋지만, 다산을 지워도 모자람이 없다.


■ 여행정보

백운동 정원 가는 길 = 백운동은 월출산 아래 있다. 강진보다 영암 쪽에서 더 가깝다. 호남고속도로 산월갈림목에서 광주 제2순환로로 갈아탄 뒤 유덕갈림목에서 무안∼광주 고속도로에 오른다. 이어 서광산 나들목으로 나와서 광산, 평동산단 방면으로 49번 지방도로와 13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해남, 영암 방면으로 간다. 영암읍을 지나서 월남교차로에서 경포대 방면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백운동이 있는 월출산 아래다. 백운동은 지도를 들고서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최근 설록다원 쪽에 이정표가 세워져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글·사진 박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