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중의 공물
하지만 이 난리 통에도 왕실을 유지하는 여러 기능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한창이던 1598년 1월, 궁궐의 음식을 맡은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에서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경상도에서 중전(中殿)에 별도로 진상하는 생청어(生靑魚)를 배지인(陪持人)을 시켜 가져오게 한다면 먼 도(道) 사람들에게 많은 폐해가 생길 것입니다. 조처하기가 매우 어렵기에 감히 여쭙니다.
<조선실록 31년 1월 16일>
아직 전란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백성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상황인데 조정에서는 엉뚱하게도 중전에게 진상하는 생청어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생청어를 바치게 되어 있는 경상도 지방은 왜적이 침입하는 1차 관문으로, 전란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비록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이 전국적으로 들끓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는 여전히 수많은 왜적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고 답답했던 건 당시의 사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경상도는 왜적이 처음으로 쳐들어온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도보다도 더 심하게 인가가 텅 비고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또다시 큰 전쟁이 일어나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군량을 운반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식이 아비를 잃고 통곡하니 애통한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왔다. 그런데도 공물(貢物)로 올리는 청어 하나를 없애지 않고 원래대로 바치게 했으니, 이를 통해 나랏일이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31년 1월 16일>
![‘영일현 토산’ 청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상도 영일현에서 나는 토산품 중 하나로 청어가 실려 있다. 매년 겨울이 오면 이곳에서 청어가 가장 먼저 잡혔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경상도가 황폐해졌을 때에도 선조는 생청어 공물을 견감해주지 않고 계속 바치게 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b/f3/99/b0/5bf399b004e6d2738de6.jpg)
‘영일현 토산’ 청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상도 영일현에서 나는 토산품 중 하나로 청어가 실려 있다. 매년 겨울이 오면 이곳에서 청어가 가장 먼저 잡혔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경상도가 황폐해졌을 때에도 선조는 생청어 공물을 견감해주지 않고 계속 바치게 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나라에서 요구하는 공물의 진상은 평상시에도 백성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주었다. 그런데 전란 중에도 변함없이 공물을 바치라고 하니 그 고통은 더욱 배가되었을 것이다. 당시 백성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는 왜적의 침략에 벌벌 떨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물을 납부하라는 관가의 독촉에 피가 말라갔다.
청어는 예부터 동해, 남해, 서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잡힌 흔한 생선이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수군들이 청어를 잔뜩 잡아다가 군량미와 바꾸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워낙 흔하고 값이 싸다 보니 가난한 선비들도 살찌운다 하여 ‘비유어(肥儒魚)’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청어 산지는 포항 앞바다의 영일만(迎日灣)으로, 그곳에서 맨 처음 청어를 잡아 진상하면 비로소 다른 고을에서도 진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조정에서 요구한 것은 그냥 청어가 아닌 ‘생청어’였다. 등 푸른 생선이라서 쉽게 부패하는 청어를 생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빠른 운송이 필수적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흔히 파발(擺撥)이라 하던 배지(陪持)까지 동원해야 했다. 한창 전란 중에 급보를 알리기 위해 존재하던 파발을 진상품 수송에까지 동원하다 보니 현지에서 발생하는 폐해가 만만치 않아 사옹원에서 임금에게 여쭙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일은 사옹원에서 따로 사람을 파견해 생청어를 인계받는 방식으로 바꾸어 폐해를 줄이는 쪽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할 뿐, 궁극적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조처는 아니었다.
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선조는 황해도의 생청어 공납을 견감해준 적이 있었다.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란했다가 가까스로 환도(還都)하면서 해주에 머무르는 동안에 내린 조치였다. 하지만 전란이 전국으로 확산되지 않은 정유재란 때에는 왕실 안위에 큰 문제가 없다 보니 경상도 지역에서 받는 고통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다. 전란이 끝난 뒤에도 청어 진상은 계속해서 백성을 괴롭힌 것 같다. 선조 33년(1600)에 체찰사(體察使) 이항복(李恒福)이 올린 보고를 살펴보자.
잘못된 정사를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개선할 방법을 모색하여보았습니다만, 예전부터 지켜오던 규정이라 어찌할 수 없어서 장부를 조사하며 한숨만 쉴 뿐 감히 변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중에 그나마 조정해볼 만한 것이 딱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청어의 진상과 각 관사에 긴요하지 않은 공물을 올리는 일과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했을 경우 연해의 백성에게 곡식을 징수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상황을 잘 고려하여 이것들을 모두 감면하도록 하소서. <선조실록 33년 2월 25일>
![공폐(貢弊). 1753년(영조 29)에 공물을 생산하는 공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 탄원한 상소와 이에 대해 정부 측에서 조처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dimg.donga.com/ugc/CDB/SHINDONGA/Article/5b/f3/99/db/5bf399db24d5d2738de6.jpg)
공폐(貢弊). 1753년(영조 29)에 공물을 생산하는 공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조정에 탄원한 상소와 이에 대해 정부 측에서 조처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체찰사 이항복은 연해의 백성이 청어 진상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직접 보고 그 실상을 임금께 아뢰어 폐해를 줄일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청어 공물을 감면해주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선조 36년(1603)에는 청어가 많이 잡히니 이왕이면 세금까지 매겨 국가 재정을 확충하자는 호조(戶曹)의 기막힌 주장까지 나왔다.
선조는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마저 포기한 채 의주로 몽진(蒙塵)했다가 왜적이 평양까지 진격하자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했었다. 위기를 당해 국토와 백성은 이토록 쉽게 포기하면서 왜 그 흔한 물고기 하나는 전란 중에도 포기하지 못했을까? 사옹원이 생청어를 진상하는 일에 대해 여쭈자 선조가 즉석에서 내린 대답은 “편한 대로 하라”였다. 임금 자신은 별반 관심 없는 사안이니 해당 부서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어감이다. 한창 전란 중인 상황에서 생청어가 중전의 상에 오르기까지 백성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지 돌아보지 못한 임금의 무심함이 그저 야속할 따름이다.
홍귀달에 앙심 품은 연산군
홍귀달은 세조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온 이래 성종 때에는 대사성, 대제학, 이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거쳤다. 그는 문장 실력이 뛰어났고 중신(重臣)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신하 홍귀달은 늘 거북한 존재였다. 연산군 10년(1504) 2월 21일,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명이 내렸는데, 홍귀달의 손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20일 뒤에 경기 관찰사 홍귀달은 이 문제를 가지고 아뢰었다.
홍귀달
신의 손녀는 참봉 홍언국(洪彦國)의 딸로 신의 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처녀이므로 대궐에 나가야 하는데, 마침 병이 있어 신이 언국을 시켜 사유를 갖추어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당 관사에서는 대궐에 나오기를 꺼리는 것이라 하여 언국을 국문하게 하였습니다. 정말 병이 없다면 신이 어찌 감히 대궐에 보내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명하셔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언국의 딸이기는 하지만 신이 실질적인 가장이므로 처벌을 받겠습니다.
연산군
홍언국을 국문하면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해명하고 아들이 아비를 위하여 해명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니, 홍귀달도 국문하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11일>
홍귀달이 아뢴 말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명하셔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부분이었다. 병이 심해 지금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 말을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한 것으로 듣고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분노가 폭발한 연산군은 홍귀달을 처벌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공손치 못한 말을 그대로 보고한 승지들까지 국문하게 하였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심문이 느리다고 의금부 당상을 심하게 독촉하였다.
대간은 나의 눈과 귀다
대간(臺諫)은 나의 눈과 귀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 이들이 누차 글을 올려, 현재의 폐단을 빠짐없이 아뢰어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이들은 남의 눈치나 보며 제 한 몸 보전하려 드는 무리가 아니기에 내가 무척 높이 평가한다. 집의(執義) 손순효(孫舜孝) 등에게 상으로 특별히 자급을 한 단계 높여주도록 하라. <성종실록 2년 6월 18일>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당시의 폐단을 간언해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러한 손순효를 두고 아첨한다고 평하는 사관도 있었지만,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는 그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쇠와 돌을 뚫을 정도였다고 하면서, 경기감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채소나 과일 하나라도 입에 맞는 것이 있으면 바로 가져다가 임금에게 바쳤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 손순효는 진심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충성을 다했기에 왕에게 신임을 얻어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고 언급한 사론도 있다.
손순효는 기질이 소탈하였으며, 충신·효자로 자부하였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하였다. 친구와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크게 취하면 갑자기 상대별곡(霜臺別曲)의 ‘임금은 현명하고 신하는 강직하네’라는 가사를 노래하였다. 잔치 때도 기생들에게 이 가사를 노래하게 하였고 본인은 일어나서 노래에 맞춰 절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잠시 고향에 돌아온 환관을 만나자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서 그의 부채에 써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환관이 궁궐로 돌아온 뒤 주상이 우연히 그 부채를 보고서 손순효가 지은 시라는 것을 알고는 그가 주상을 사모한다고 여겼다. 또 예전에 주상의 앞에서 경전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실함과 관대함을 실천할 것을 주상에게 권하였는데, 이 때문에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종실록 18년 2월 7일>
성종 21년(1490) 11월, 손순효를 신뢰한 성종은 모화관(慕華館·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연천동에 있었다)에서 무과(武科)를 치렀을 때에도 그의 직언을 받아들였다. 이날 김근명(金近明) 등 22명을 뽑았으나, 격구(擊毬·젊은 무관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다니며 채로 공을 치던 무예)에서는 한 사람도 뽑을 만한 자가 없었다.
성종 -그대 말대로 내가 게을러서 인재 양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종실록 21년 11월 8일>
손순효와 성종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과감하게 직언을 하기도, 과오를 순순히 인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그해 8월 22일, 성종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의정부·육조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이때 손순효가 술에 취해 나와 어탑(御榻) 아래에 엎드렸다. 성종이 내관을 시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손순효는 “신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말씀을 아뢰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주상이 말하라고 하자, 손순효가 어탑에 올라 한참 동안이나 얼굴을 들고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아뢰었고, 성종은 몸을 굽혀 대답했으나,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신하들은 알 수 없었다.
이때 손순효는 무슨 이야기를 아뢰었을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그가 간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세자로 있는 연산군이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나, 신하들은 모두 어린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순효 공이 어느 날 취기를 빌려 그대로 용상(龍床)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손으로 용상을 쓰다듬으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상이 “나 또한 알고 있지만, 차마 세자를 폐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간관(諫官·조선 시대에 사간원과 사헌부에 속하여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비행을 규탄하던 벼슬아치) 이 “신하가 용상에 오른 것만도 몹시 불경한 짓인데, 또 감히 주상의 귀에 대고 말을 하였으니, 이것은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손순효를 옥에 가두어 법률대로 처벌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상은 “손순효는 나를 사모하여 술을 끊으라고 권한 것인데, 이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였다. <오산설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인정전 진연에서 아뢴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손순효가 세자를 폐할 것을 청한 엄중한 사안인데도, 성종이 이를 눈감아준 것이다.
신하가 자신이나 왕실을 폄하하는 말을 하는데 임금이 노여워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임금은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행여 간쟁하는 신하가 없을까 근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왕업의 성패가 신하들의 간언에 달려 있어 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하고 명예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임금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직언이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신하가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광해부자의 비극
조선시대에 묘호(廟號)를 못 받고 군(君)으로만 불린 임금이 둘 있으니,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이들은 반정(反正)세력에 의해 쫓겨나 폐주(廢主) 신세가 돼 쓸쓸하게 여생을 마쳐야 했고, 죽어서도 왕자 시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 역시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지는데, 일기는 제왕의 역사 기록이 아닌 모든 편년체 기록물에 두루 붙일 수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1623년에 일어난 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고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된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인조(仁祖)다. 복위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과 부친 김제남이 모두 비참하게 죽었고 자신도 폐서인(廢庶人)이 된 처지라 ‘철천지원수’ 광해군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형과 동생을 해치고 모후를 폐한 광해군의 패륜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서인(西人)들로서도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게다가 어차피 목숨만 겨우 부지했을 뿐, 폐주와 그 일가의 삶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 내외, 폐세자와 폐빈 내외는 강화도의 각기 다른 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위리안치는 유배지 내 죄인의 거처 주변을 가시나무로 빙 둘러 울타리를 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무거운 형벌이다.
반정으로 쫓겨나 하루아침에 고귀한 왕족에서 몹쓸 죄인으로 전락해버린 충격적인 현실을 광해군 일가가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한창 젊은 나이인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 부부는 절망의 늪에 빠져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으며, 결국 함께 목을 매었다가 여종이 구출해 겨우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폐세자 부부가 서울에서 보내온 어떤 물건을 받은 이후 한 달 동안은 별 소란 없이 조용했다.
그러다 강화도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폐세자 이지가 탈출한 것이다. 도대체 사방이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이고 경계가 삼엄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21m 땅굴 판 폐세자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광해군 묘와 초상화. [동아일보]
약 한 달 전 폐세자 부부가 받은 물건은 가위와 인두였다. 이지는 이 물건들을 보자마자 불현듯 탈출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일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위와 인두로 무작정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지가 땅을 파면 폐빈 박씨가 파낸 흙을 자루에 옮겨 담는 일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그랬듯이, 꺾을 수 없는 탈출 열망에 사로잡힌 이지는 26일 만에 무려 70자(약 21m) 땅굴을 파서 울타리 너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듀프레인이 탈옥에 성공해 벅찬 기쁨을 맛본 것과 달리, 이지의 탈출 기도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낯선 땅 강화도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도와주기로 한 자들이 준비한 배를 찾지 못해 군졸들에게 붙잡혔고,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폐빈 박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비통한 생을 마감했다.
이지가 탈출하다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신하들은 일제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일단 신하들의 청을 물리쳤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인목대비가 나서서 채근하자 인조는 더 이상 그의 죽음을 막기 어려웠다. 몇몇 대간도 처음에는 이지를 죽이라고 청했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바꿔 오히려 성덕(聖德)을 그르칠 뻔했다고 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사관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저 개인적인 처신에만 골몰한 조정 신하들의 작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폐인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 한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끝까지 목숨을 보전해주려고 하여 말씀에 간절하고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으니 그 지극한 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하로서는 그 미덕을 받들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법대로 집행해야 한다는 구실로 분분하게 논쟁을 벌였다. 옥당(玉堂)의 신하들도 몇 번이나 말을 바꾸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데 급급했으니, 임금을 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겠다.
<인조실록 1년 6월 25일>
살아야 할 이유
꼼짝없이 죽음을 맞게 된 폐세자의 태도는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의금부 도사 이유형이 와서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을 전하자 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작 자결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태껏 구차히 살아 있었던 것은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조용히 자결하려고 해서였다. 지난번 땅굴을 파고 탈출한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어찌 다른 생각이 있었겠는가.”(인조실록 1년 6월 25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한 이지는 문득 손발톱이 긴 것을 보고 깎고자 했으나 의금부 도사는 매몰차게 청을 거절했다. 죽고 난 뒤에라도 손발톱을 깎아달라고 도사에게 청한 이지는 부왕의 배소(配所)가 있는 서쪽 방향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 이야기로 유언을 끝맺었다.
“문천상이 8년간 북경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책망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을 안 자이겠는가. 그가 죽은 뒤에 후대의 사람이 시를 지어 ‘원나라가 문 승상을 죽이지 않아서 임금의 의리와 신하의 충성 둘 다 이루었네’라 하였지.”(인조실록 1년 6월 25일)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간 이지는 허리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줄이 끊어져버리자 이번에는 질긴 명주실 끈으로 다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아들 내외의 비참한 죽음이 전해지자 폐비 유씨는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하루아침에 임금 자리와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다 잃어버렸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처참한 처지에도 신세를 지나치게 비관하지 않고 모진 삶을 꿋꿋이 이어갔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망해 이내 세상을 떠난 연산군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후 그는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나라에 변란이 계속되자 왕위 보전에 신경이 곤두선 인조에 의해 저 멀리 제주도까지 내쳐지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폐위되고 18년이 지난 인조 19년(1641)에 머나먼 남쪽 섬에서 임종을 지키는 이도 하나 없는 가운데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반정이라는 크나큰 정치적 사건 이후 폐출된 한 왕가의 삶은 이토록 처절하고 비극적이었다. 스스로를 문천상에 빗대며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남기고도 죽음의 구렁텅이로 기꺼이 뛰어든 폐세자 이지, 그리고 숱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 폐주 광해군. 같은 고난에 처한 두 부자의 선택이 다소 엇갈리는 듯 보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 뒀는지를 두고 굳이 시비곡직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오늘날 광해군은 학계와 대중으로부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것으로 한 많은 폐주 일가의 원혼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반도는 오랜 옛날부터 외적의 침입에 시달려왔다. 가장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는 왜구였다. 왜구는 일본 서부나 대마도를 거점으로 삼아 우리 남해안뿐 아니라 멀리 중국 동남부 지방까지 진출해 노략질을 하던 해적 집단이다. 고려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해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조선 초기에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경책과 삼포(三浦) 개항 등의 유화책을 함께 써서 왜구의 침입은 줄었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늘 왜구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명종 10년(1555) 5월 16일 기사를 보자.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긴급하게 장계를 올려 보고하기를, ‘5월 11일에 왜선 70여 척이 와서 달량포 바깥쪽에 정박해 있다가 이진포와 달량포에서부터 동서로 나누어 상륙해 성 주변의 민가를 불태워버리고 결국 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왜선 11척이 바다의 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상륙해 일부는 뿔피리를 불며 불을 질렀고, 일부는 창을 휘두르거나 칼을 뽑아 들고 공격해 왔다. 가리포 첨사 이세린이 즉각 병마절도사 원적에게 보고하자 원적이 장흥 부사 한온, 영암 군수 이덕견과 함께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됐다.”(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왜적 향하는 칼끝마다 패배’

1592년 4월 15일 부산 동래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동래부순절도’. [동아일보]
5월 11일, 왜구가 영암 달량포로 침입해 민가를 약탈하고 성을 포위하면서 이른바 ‘을묘왜변’이 시작된다. 얼마 뒤에 성이 함락돼 원적과 한온은 전사하고 이덕견은 왜구에게 사로잡혔다.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부대가 붕괴됐고, 왜구는 거칠 것 없이 영암의 어란포, 완도, 장흥, 강진, 진도 등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조정에서는 이준경, 김경석, 남치근 등을 장수로 삼아 전장으로 파견했고, 결국 5월 25일 영암에서 왜구를 격파해 난을 진압했다. 다행히 그달을 넘기지 않고 사태가 마무리됐지만, 전라도 남해안 지방이 초토화하고 병마절도사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앞의 기사를 기록한 사관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국가가 오래도록 태평하자 임시방편으로 하는 정사가 많았고, 기강이 문란해져 공공의 도리가 없어졌다. 조정의 각 관사와 지방의 관원들은 쓸데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오직 권세가에게 들러붙어 좋은 벼슬에 오르고, 뇌물을 바쳐 좋은 명성을 얻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길 뿐, 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남의 나라의 일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수나 재상들은 편안히 놀고 즐기며 항상 은혜와 원한을 갚는 데만 신경 쓰다가, 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정은 방비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변방은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왜적의 칼끝이 향하는 곳마다 패배했다. 왜적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오듯 쳐들어왔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당시 조선이 온전히 태평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대규모의 정규전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쟁의 위협은 늘 존재했다. 북방의 이민족은 물론이고 왜인만 해도 중종 5년(1510)에 삼포왜란을 일으켰고, 을묘왜변이 있기 불과 10년 전에도 사량진 왜변을 일으켰다.
왜구는 해적인지라 언제든 침입해 올 수 있었고 전투에 익숙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의 병사들은 흉년으로 인해 굶주렸고, 훈련 수준도 엉망이라 적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빈약한 병력마저 부족했다.
대마도주 “왜적 방비해야”

2014년 10월 동래읍성역사축제 행사로 열린 ‘동래성 전투’ 뮤지컬. [동아일보]
왜변이 있기 두 달여 전인 3월 20일, 대마도주는 조선으로 보낸 서계(書契)에서 이미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해 올 조짐이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국의 서융은 작년 10월부터 올봄까지 명나라를 침략할 목적으로 수만 척의 배를 앞다투어 바다 건너로 보냈다고 합니다. 서융들이 모의한 내용을 들어 보니 ‘조선의 바다를 통해 명나라로 가면 바닷길이 매우 가까우니, 조선의 바다를 먼저 확보해야 명나라를 침략할 수 있다’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지나간다면 모조리 무찔러 우리의 충성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해안 지역을 굳게 방어해 전투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명종실록 10년 3월 20일)
서융은 원래 중국 서부 지역의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일본 규슈 서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대규모로 조선의 근해를 지나 명나라에 침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난 5월 12일에야 대비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왜구가 최초로 침입한 것이 5월 11일이니 조정은 적이 침입한 다음 날에야 그 사실도 모른 채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구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5월 16일이다. 관리 부실로 봉수(烽燧)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5일이 지난 후에야 침입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조정은 우왕좌왕하며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을묘왜변은 왜구가 일으켰지만, 피해를 키운 것은 불안정한 평화를 태평한 세월로 착각한 조정의 준비 부족과 군대의 기강 해이였다. 을묘왜변 이후 각성한 조선은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망국 직전까지 몰렸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분단국가인 우리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불안정한 평화 속에 있다. 평화를 위한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