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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뒤흔드는 정치팬덤 O빠

자유주의 뒤흔드는 정치팬덤 O빠

지난해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응답 중인 조 후보자(왼쪽)와 금태섭 의원.

 

“민주당은 미쳤습니다.”

 

지난 12일 진정권 전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제목입니다. 이날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죠. 그는 “기어이 금태섭의 목을 쳤다, 친문 팬덤 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막대기에 '조국수호'라고 써서 내보내도 공천 받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온리버티’는 21세기 한국 사회를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 의원의 공천 탈락 사실을 놓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 진 전 교수의 말을 깊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리버티’는 지난해 ‘조국 사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억압돼 왔는지 ‘반지성주의’의 관점으로 3회에 걸쳐 심도 있게 따져봅니다.

왜 21세기 '온리버티'인가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on liberty)』은 J.S. 밀이 1859년 출간한 자유주의의 교과서입니다. 철학에서의 ‘자유의지’와 달리 ‘사회적 자유’란 무엇이며,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깊은 통찰력으로 논했습니다. 밀은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역사를 발전시키는지 체계적으로 논증한 최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온리버티’는 새 시대에 걸맞은 21세기의 ‘on liberty’라는 뜻과 ‘only liberty’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only liberty’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의 모든 권리와 가치를 하나씩 제거해 나갈 때 최후에 남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 뿐(only liberty)이라는 이야기죠.
‘온리버티’는 인간 이성의 마지막 보루인 자유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합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끝나고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인문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이성을 마비시킨 매카시즘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던 서울 광화문 집회 모습. [중앙포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처음 정의한 개념입니다. 이성과 합리가 무시되고, 지성과 지성인을 배척하는 현상을 뜻하죠. 호프스태터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포퓰리즘과 결합한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민주적 가치를 무너뜨리는지 분석했습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선 제일 먼저 광기와 폭력이 자유주의의 싹부터 자릅니다. 선동가는 대중의 반지성을 등에 업고 비판적 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죠. 사고 회로가 마비된 대중은 선동가를 신격화 하며 정치는 종교로, 시민은 신민으로 전락합니다. 국가와 국민 사이에는 자연법상이 권리를 위탁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신과 그의 뜻을 대리하는 사제를 향한 맹목적 믿음 ‘신약(covenant)’이 존재할 뿐입니다.

‘온리버티’는 2019년 ‘조국 사태’가 남긴 반지성주의의 상처를 해부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법철학』)의 말처럼 실체적 진실은 일련의 사건이 모두 완료된 뒤에야 천천히 드러납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조차 이슈의 한 가운데에선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해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세상을 탐색했죠. 한국 사회를 둘로 쪼개놓은 ‘조국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자유주의의 눈으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던 서울 서초동 집회 모습. [연합뉴스]

 

이식된 민주주의와 시민의 부재

 

스스로 ‘민주주의’ 개념을 발명하고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시켜온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의 민주주의는 갑작스럽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은 300여개에 달했고 1946년엔 400여개로 증가했습니다. 그 후에도 정당 간 이합집산과 반복적인 당명 바꾸기가 지속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당정치는 19세기 산업화의 산물입니다.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자가 다양한 사회 갈등과 균열을 대리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정치체제입니다. 서구사회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요한 사회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결국 정당은 다양한 시민의 의사가 대표되는 창구이며, 그런 고민이 모여 하나의 이념을 이루고 이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은 시작부터 본질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념·정책에 따라 정당이 차별화 된 것이 아니고 명망가 위주로 판이 짜였기 때문이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당이 오직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고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대의 기능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사유화된 정당과 정치세력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대회의실에서 김영삼 민주ㆍ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동석한

가운데 민주자유당의 탄생을 선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의 자유당부터 박정희(민주공화당), 전두환(민주정의당) 등 독재정권은 모두 정당을 사유화 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처럼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이합 집산된 정당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회창의 신한국당,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역시 비슷한 이념과 정책 성향을 가진 이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오로지 권력 획득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뭉친 이익집단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정당은 이념과 정책보다는 인물 중심이었고, 그 결과 정당 지도자가 권력을 잃으면 조직도 약해졌습니다. 정당은 이념 정체성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의 팬덤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정당이 내놓는 정책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의 말 한 마디가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인 것이죠. 민주주의의 운영 주체인 시민의 역량과 성숙도가 낮을수록 정치가의 선전과 선동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미성숙한 시민과 이를 권력 획득·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정치가의 선동이 맞물렸을 때 반지성주의는 쉽게 싹을 틔웁니다.

1세기에도 여전한 386의 운동정치

80년대 전대협 활동 당시의 이인영 의원.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낸 그는 대표적인 '운동권'이자 '586' 정치인이다. [중앙포토]

 

반지성주의를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 정치인들입니다. 현재의 집권세력인 그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와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화가 끝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독재 타도’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분법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선악의 이분법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후퇴시킬 뿐입니다. 다양성과 개방성, 관용과 존중 등을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피아 구분이 명확한 운동권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좌초시킵니다. 소재만 다를 뿐 상대 정파를 ‘빨갱이’로 낙인찍어 권력을 유지했던 반공주의와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이처럼 메시지의 내용과 상관없이 메신저에게 낙인이 찍히면 합리적인 토론이 마비되고 이성적인 공론장이 붕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정책적 차이에 따라 구별되기보다는 그저 투쟁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패를 갈라 싸울 때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일 뿐인 것이죠.

좌우 구분 없는 선악의 이분법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한 장면. [사진 쇼박스]

 

권위주의 세력이 냉전 반공주의를 통해 가치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는 이분법적 사회를 만들었듯, 지금의 집권 세력도 ‘적폐·친일’이라는 프레임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복잡다단한 시민의 이익과 사회 균열·갈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 위해 반공과 적폐 프레임을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균열을 정당이 대표하지 못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큰 위협입니다. 균열 지점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것은 ‘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며, 그 결과 시민들의 혼란과 갈등이 커집니다. 광장이 둘로 쪼개져 치열하게 싸우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선거에선 어떤 균열을 축으로 경쟁이 이뤄지는지, 정당은 무슨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문재인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박근혜를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뿐입니다. 이 같은 ‘진영 논리’가 한국 정치의 기저에 흐르며 반지성주의를 키우고 자유주의를 억압합니다. 단순히 두 개의 정치세력이 패를 갈라 진영 싸움을 벌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언론 등 시민사회도 진영 논리에 동원돼 두 개의 세력으로 수직계열화 돼버렸습니다.

건전한 내부비판까지 차단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성이 경희대 교수(한국정치학회장)는 “정책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크지 않지만 어떤 대통령,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를 따지면 갈등이 첨예해진다”며 “이념에 따라 정파가 나뉘는 게 아니고 정파 갈등이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 토론이나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이슈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며 대립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죠.

더욱 큰 문제는 내부의 건전한 비판까지 차단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지적도 진영 논리를 벗어나는 순간 매장되기 일쑤입니다. ‘조국 사태’ 때 조 전 장관을 비판했던 김경율 참여연대 전 집행위원장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진보층 내부에서 궁지에 몰렸던 게 대표적인 사례죠.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조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둘로 쪼개 놓은 ‘진영 논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요. 그 핵심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는 반지성주의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이성이 감성으로 대체되고, 논리가 마비된 반지성주의는 가짜 민주주의를 부른다"고 경고합니다.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스나이더 교수가 지적하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와 가짜 민주주의 사례는 '러시아 스캔들'입니다. 줄리안 어산지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과 외교 문서를 공개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은 러시아 해커가 자료를 빼냈고, 이를 위키리크스에 전달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트럼프가 개입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통령 취임 후인 2017년 5월 로버트 뮬러의 특검이 시작됐죠.

지난해 3월 특검은 “트럼프 측과 러시아가 직접 공모한 사실은 입증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뮬러 특검은 ”그렇다고 범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면서 러시아 조직의 대선 개입은 사실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특검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라는 조직을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미국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각종 여론 조작을 벌였습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뮬러 특검이 밝힌 러시아식 ‘댓글부대’인 IRA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계정을 사용해 선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IRA는 470개의 페이스북 계정을 마치 미국의 정치·시민 단체가 만든 것처럼 위장하고 각종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IRA가 부추긴 미국의 반지성주의

IRA가 사용한 힐러리 반대 이미지. [BBC]

 

2017년 10월 페이스북이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IRA는 2015년부터 2년간 8만 건의 게시물을 올리고, 약 2900만 명이 이를 뉴스피드로 받아 봤습니다. IRA가 운영한 페이스북 페이지 '블랙 매터스 유에스'(Black matters US)‘는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적개심을 키우며 "힐러리는 흑인의 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선동했습니다.

2018년 5월 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서도 IRA는 총기 규제, 이슬람교, 동성애, 이민자 등과 관련한 자극적인 글과 사진을 올리고 확산을 유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어 '허트 오브 텍사스(Heart of Texas)'라는 계정은 2016년 7월 경찰관 5명을 살해한 댈러스 총격범 미카 존슨에 대해 “이슬람 소유의 건물을 테러에 이용했다. 1만 명의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텍사스에서 보고 싶지 않다"고 썼습니다.

이는 물론 거짓이었습니다. 존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베테랑 군인으로 자신의 집에서 다량의 무기가 발견됐습니다. 당시 블룸버그뉴스는 “러시아가 미국인들의 불만을 자극해 혼란에 빠뜨린 명백한 증거”라고 지적했습니다. “IRA의 6개 페이지가 올린 콘텐츠는 시민들에게 3억4000만 번 공유됐다”며 “미국인 1억 3700만 명이 투표했는데 1억2600만 명이 러시아 조직이 올린 글을 봤다”고 지적합니다.

미 지식인들이 실망한 트럼프식 정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교수, 철학자, 정치경제학자.

 

미국 지식인들은 트럼프 당선 전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비판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17년 9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의 종언’ 이후) 민주주의가 어떻게 퇴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도 분명히 후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30년 전 소련의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선 자본주의가, 권위주의(독재)와의 경쟁에선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봤죠. 이렇게 자유민주주의의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냉전의 프레임으로 작동했던 20세기의 역사는 끝났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미국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미국의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쌓아온 민주적 가치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트럼프식 정치에 큰 절망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트럼프는 수시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고, 해명이 어려울 땐 거짓말에도 거리낌 없습니다. 지난 10일에는 사법권 침해 발언도 서슴지 않았죠. 자신의 참모 로저 스톤이 ‘러시아 스캔들’ 관련 위증 혐의로 기소되자 “끔찍하고 불공정하다”고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심지어 법무장관인 윌리엄 바는 법원에 스톤의 형량을 낮춰 달라고 했죠. 그러자 법무부 전직 관료 1143명이 바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트럼프는 삼권분립의 원칙까지 훼손하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의 지지율은 49%(2월4일 갤럽)로 여전히 굳건합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이를 ‘가짜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는 자극적인 언사가 대중의 사고를 좌우하면서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몰고 있다는 이야기죠.

‘O빠’ 광신적 팬덤도 가짜 민주주의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 촉구 집회 모습. [뉴스1]

 

한국도 마찬가집니다. SNS에선 거짓이 사실로 쉽게 둔갑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보다 광기가 대중을 선동하는 경우가 많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김어준’과 ‘유시민’을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지난 1월 jtbc 토론에서 그는 증거 인멸을 ‘증거 보전’으로, 부모의 대리시험을 ‘오픈북’으로 두둔한 ‘유시민’에 대해 궤변이라며 날선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러면서 “괴벨스같이 선동하고 대중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뇌된 대중은 명백한 사실조차 믿지 않는”(티머시 스나이더) 상황에 놓입니다. 아직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조작했다거나 세월호 사건 당시 ‘박근혜 7시간’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들이 대표적이죠. ‘음모론’은 픽션처럼 잘 짜여 있어 때론 사실보다 더욱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이처럼 정치를 혼란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가짜 민주주의의 근원은 과학과 이성, 사실을 부정하고 궤변과 독선, 거짓이 영향력이 절대적인 반지성주의입니다. 여기엔 합리적 토론이 사라지고 비판적 시민 대신 맹목적 팬덤만 남게 되죠. 정치가와 지지자를 엮는 것은 민주적 원칙이 아닌 종교적 맹신입니다. 소위 ‘박빠’, ‘문빠’와 같은 정치 팬덤은 상대를 ‘악’으로 몰고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하는 독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음 주 '온리버티'는 2019년 하반기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커져왔는지 ‘인지적 편향’의 이론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더욱 자세히 따져보겠습니다.


윤석만 사회에디터 겸 논설위원 sam@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