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감정들
“소인 원통한 사정 아룁니다”
신분제·남녀차별 시대였지만 여성 노비 등 약자들도 ‘소송’
신문고 세운 태종 “북을 쳐라”
백성, 王 행차할때 징 치기도 세종 “寃 푸는것이 정치 도리”
촛불·1인 시위·청와대 청원… 조선 법전통 그대로 이어진듯
#1. 18세기 중반이나 19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경오년(庚午年) 2월, 말금이라는 이름의 여성 노비가 고을 수령에게 ‘소지(所志·군현이나 도의 법정에 제시된 원통함에 대한 하소연)’를 냈다. “소인이 당한 ‘원통한 사정(寃情)’을 아룁니다”로 시작한 소지는 죽은 남편의 친족인 승운이라는 자가 남편이 남긴 땅을 빼앗기 위해 부당한 소송을 제기했다는 고발이었다. 수령은 조사 끝에 말금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
#2. 1771년 10월 김씨 성의 조이(召史·양인의 아내나 과부를 일컫는 말)가 남장을 하고 궁궐 앞에서 징을 쳤다. 고을 수령에게 부당하게 고문받아 죽은 아버지의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요구였다. 손가락을 잘라 쓴 상언(上言)은 영조에게 보고됐고, 진상을 알아본 영조는 수령을 파직하고 옥에 가두도록 했다.
#3. 1705년 제주 관기(官妓·관청에 소속된 기생) 곤생은 전라도 감사를 찾아가 자신의 세 딸을 고문해 죽게 한 제주 수령의 만행을 고발했다. 감사의 보고 내용을 접한 숙종은 진상을 조사하게 한 뒤 제주 수령을 유배형에 처했다.
재미 역사학자 김지수의 신간 ‘정의의 감정들’에 나오는 이들 사례는 다양한 신분의 조선시대 여성이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관(官)에 호소해 구제받았음을 보여준다. 피해를 호소한 사람은 양인뿐 아니라 기생과 노비까지 다양했고, 처벌받은 가해자는 민간인은 물론 지방 수령도 포함됐다.
이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수직화된 신분제와 남녀 차별이 사회 질서의 근간이었던 조선시대에서도 모든 사람이 법적 주체로 인정받는 데에서만큼은 평등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성과 감정을 철저히 구분하면서 이성의 우위를 신봉한 근대 서구와 달리 조선에서는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감정이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됐다는 점이다. 셋째는 미천한 신분인 자의 호소가 왕에게까지 보고된 데서 알 수 있듯, 왕이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조선이 성리학적 질서에 짓눌린 경직된 사회였다는 통념에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실제로, 저자가 검토한 600여 건의 조선시대 여성 소원(訴寃·원통함을 호소함) 관련 기록에 담긴 이야기와 처리 과정을 보면 각종 1인 시위와 촛불 시위, 청와대 국민청원 등 적극적인 권리 주장과 요구에 익숙한 우리 국민의 DNA 속에 조선시대의 법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신분과 젠더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이 법적 주체로서 법적 능력을 인정받은 조선의 사례는 동시대 서유럽이나 중국·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기 영국이나 중국에서는 여성의 법적 지위가 철저하게 남성에게 종속됐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을 통하지 않고는 법적 행위에 나설 수 없었다. 중세 시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도 하인, 농노, 무슬림, 유대인 등 비자유인과 소외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공론화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럼 조선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자는 ‘원(寃)’, 즉 ‘원통함’에 대한 조선 위정자들과 백성들의 독특한 관념에서 그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원’은 조선시대 법적 담론과 법적 서사의 핵심이었다.” 저자는 “‘원’은 백성들이 법적으로 침해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으로 복수, 증오, 분노, 비탄, 회한, 고통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모여 ‘원통함’이라는 감정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감정의 영역을 ‘원시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근대 서구와 달리, 조선의 왕과 위정자들은 백성들의 ‘원’이라는 감정을 잘 풀어줘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나아가 ‘원’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이 조화로운 합일 속에 사는 단일 유기체”라는 성리학적 우주관에 부합하며, 이를 제대로 못 할 경우 ‘원’은 사회 질서를 흔들거나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부정적 에너지가 될 것으로 봤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3년 동안 기근이 든다’거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는 이런 관념이 잘 배어 있다.
이 때문에 왕들은 백성 누구라도 원통함을 호소할 길을 열어주는 데 적극 나섰다. 태종은 조선 건국 9년만인 1401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했다. ‘신문고에 관한 교서’에서 태종은 정치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게 있거나 부당한 일로 억울함을 바로잡길 원하거나, 반역이나 반란을 꾀하는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경우 “즉시 와서 북을 치라”고 했다. 백성들의 소원 및 정소(呈訴·소장을 관청에 냄) 절차는 1476년 ‘경국대전’에 반영됐고, 1746년 ‘속대전’에서는 그 범위와 대상은 넓히고 절차는 간소화했다. 백성들이 궁궐 근처 높은 곳에 오르거나 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징을 치는 일도 빈번했다.
‘속대전’ 이전까지는 지방 행정기관을 거치지 않은 채 서울로 올라와 임금에게 직접 소원하는 경우 처벌하게 돼 있었는데, 그 규정을 적용할지를 놓고 왕과 신하 사이에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왕은 유연하게 대응했다. 지방 수령에 의한 고문이나 살해 등 인권 침해와 패악이 자신에게 보고되지 않을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은 1895년 12월 검거 뒤 신문 과정에서 지방 관원들의 실정과 부패에 항의하고자 수차례 등장(等狀·집단적으로 소원을 냄)했으나 그 소원은 무시됐다고 진술했다.
저자는 조선 여성의 소원 기록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뒀지만, 결과는 그 이상이다. 여성은 성리학적 질서에서 대표적인 약자에 속하는 만큼 이들의 소원 기록은 조선의 법 집행과 관행은 물론 왕의 국가 운영 원칙과 사회 시스템 전반을 조망할 수 있게 도와준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조선 사회가 신분제에 입각한 불평등 체제였음에도, 왕과 위정자들은 백성 전체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을 정의 실현과 성리학적 질서 유지의 근간으로 봤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세종의 말은 절차나 규정에만 집착할 뿐 민생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인 정치인과 관료 집단에 대한 질책으로 들린다. “만일 백성의 ‘원’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정치하는 도리(道)겠는가?”
<정의의 감정 ; 308쪽, 2만원> 김지수 지음│김대홍 옮김│너머북스
오남석 기자 greentea@mu감정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