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1352판이냐, 아니면 8만1316판이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팔만대장경’(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의 경판 숫자가 사상 처음 확인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경판 36개의 포함 여부에 따라 그 숫자가 바뀔 처지다. 팔만대장경뿐 아니다. 문화재청이 조사 중인 ‘조선왕실의궤’에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 팔만대장경과 조선왕실의궤는 광복 70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문화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던진다. 전문가들의 숙고와 더불어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실정이다.

국보 32호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
■ 36개 경판 어떻게 봐야 하나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8만4000 법문을 목판에 새겼다고 해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
고려 고종대인 1237년부터 1248년 사이에 당시 전해져오던 송나라, 거란 등의 대장경까지 총정리한 것으로 수천만개의 글자가 오·탈자 없이 정밀하게 판각된 데다 오랜 역사와 완벽한 내용을 지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세계문화유산) 등에 보존돼 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만1258판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지난해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근 대장경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마쳤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이던 1915년과 1937년에 제작된 36개 경판이 확인됐고, 이 경판도 국보의 가치를 인정해 팔만대장경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결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포함시키면 팔만대장경은 8만1352판, 포함시키지 않으면 8만1316판이 된다. 100년 만에 경판 숫자를 확인했지만 36판의 포함 여부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리는 실정이다.
오용섭 문화재위원은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순종실록은 일본인이 편찬위원장이었고 특성상 정치적 견해가 들어갈 수 있지만, 대장경은 원래 있던 판을 똑같이 만든 것”이라면서 “목조문화재는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이 불가피해 조선시대부터 계속 보완·수리해왔다”고 밝혔다. 불교계도 팔만대장경의 완결성을 강조하며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해도 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암 스님(해인사 대장경보존원장)은 “경판을 찍다가 손상된 부분이 있으면 ‘보판’이라고 해서 다시 새겼다”며 “대장경은 국보 이전에 목숨같이 중시한 신앙의 대상으로 완결성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36판을 포함시켜선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신승운 문화재위원(동산문화재분과 위원장)은 “문화재에는 시기상 하한선 문제가 있다”며 “일제강점기 판을 별도로 근대문화재로 등록할 수는 있지만 국보에 포함시킨다면 가치의 문제가 생긴다”고 밝혔다. 그는 “1937년에 만든 한 질은 만주국 푸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36판 중에 유일본이 있어, 만약 36판을 제외한다면 이 유일본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고 밝혔다.

조선왕실의궤 중 명성황후 발인반차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조선왕실의궤’도 똑같은 난제
의궤는 조선시대 왕이나 세자의 혼례 같은 왕실·국가 차원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록해놓은 귀중한 사료다.
의궤는 임금이 보는 어람용 1부와 기관 및 사고 보관용을 포함해 9부 내외를 작성했다. 종류와 분량이 워낙 방대해 부분적으로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되거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방대한 의궤 전체를 일괄 조사해 한꺼번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팔만대장경처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의궤가 확인되면서 그것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옥영정 문화재전문위원은 “제목 자체가 ‘조선왕실의궤’이기에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은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신승운 문화재위원은 “의궤는 순종까지 포함시키는 게 맞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포함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실록은 일본인들이 서술에 개입한 데 비해 의궤는 정치색이 덜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며 “팔만대장경처럼 전문가 의견 통일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올해 안에 의궤 조사를 끝마치고 문화재위원회에 문화재 지정 여부 심의를 의뢰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