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화냥년 & 호로자식

<최종병기 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3년 뒤,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으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한 나라의 국왕이 청나라의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더 이상 나라가 지켜줄 수 없는 백성들은 전리품이 되어
머나먼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만갑의 ‘병자록’과 정약용의 ‘비어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 수는 최소 50만(당시 조선 총인구 400~500만 추정)
이 짧은 기록에서 영화<최종병기 활>은 시작되었다.
한민족이 지닌 불굴의 정신을 담은 시리즈물을 만들고자 했던
<김한민 감독>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사건 속에 감춰진 영웅을 탄생시켰다.
인조반정 이후 모든 것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다
병자호란으로 청의 포로가 된 누이를 구하기 위해
홀로 전쟁 속으로 뛰어든 신궁의 이야기는
어쩌면 역사가 담지 못했을 뿐 진짜 있었던 우리 민족의 이야기 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역사 속에 스러져간 수많은 감춰진 영웅 중
하나를 스크린에 부활시켰다.
실제 역사적 사건이 배경인만큼 고증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김한민 감독은 당시의 상황이 나타난 각종 사료들은 물론,
청나라 군대를 재현하기 위해 역사에 충실한 중국 TV 드라마를
참고하기도 했다고 하며, 또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활은
대한궁술원의 도움을 받았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자문을 얻어
당시 청나라의 언어였던 만주어를 재현하여 영화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우리의 뼈아픈 역사에 감춰진 영웅의 또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낸 <최종병기 활>은 사실적인 액션과 사극에 대한 이미지를 뒤엎는
스릴감으로 2011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부각되었댜.

▶욕 <화냥년과 호로자식>의 근원

사람들은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나쁘게 말할 때 “화냥년”
그리고 버릇없는 못된 사람, 주로 남자를 “호로자식”이라 욕을 한다.

이 욕의 근원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인조 때 중국의 後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정묘약조에 따른 형제의 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 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은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3천의 군사로 진을 쳤으나
세력의 열세로 45일만에 항복을 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끓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척화론을 부르짖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등도 청으로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인조의 항복으로 좋아하던 백성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좋아하였으나
얼마 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인조는 청에 끌려간 부녀자들 조사해보니 대부분 부녀자로써 그 수가
무려 50만 명이나 됨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의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인조는 하는 수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그 돈(속량전)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여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청에 끌려가 돌아온 여인을”還鄕女”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 환향녀들이 청나라에 끌려가서 못된 性관계를 배워와서
온 동네 남자들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여자들이 사회문제화 되어 있으나 조정에서는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 대책으로 각 가정에서 엄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노인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을 엄히 단속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할 때는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장옷)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하였다.

이때부터 오랑케에 끌려 다녀온 여자들을 ” 還鄕女(환향녀) = 화냥년”
이라고 하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 올 때에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 즉 오랑케의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하였다.
즉 "환향녀"나 "호로자식"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피해자들 이었다.
왜냐하면 왕은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지도 못했고 전쟁이 나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부녀자들만 끌려가서
청군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가 돌아 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불쌍한 여자에게 뒤집어 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당시에 그들 나약한 자들을 괄시, 멸시만 할 줄 알았지
그들을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질 못한 산물이었다.

이때 환향녀들은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자결을 하는가 하면
청군에 더렵혀진 여인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과 내 쫓김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떠도는 슬픈 신세가 되었다.

인조는 환향녀의 사회적 문제를 더 이상 간과할 수가 없어
“홍제천에 몸을 씻고 도성에 들어오면 더 이상 정조에 대한 논란을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 홍제천변의 弘恩洞”은 청군에게 더렵혀진 많은 여자들이 왕의 특별 聖恩을
입었다는 데서 “홍은동”이라 불리고 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화냥년”이나 “호로자식”의 욕은 하지 맙시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